< 94 : 93. 만병대가(Weapon master)(2) >
그 어느 시대보다 만병의 대가라는 별호를 가진 자들이 많은 시대였다.
소림 칠십이절예(七十二絶藝, Shaolin training methods)와 십팔반병장기(十八般兵仗器, The eighteen arms)를 모조리 통달한 소림사의 학승(學僧), 만경전주(萬經殿主).
중세부터 현대까지 유럽 전역에서 전승되는 온갖 무기술을 망라하여 정리하고 익힌 교회기사단(The temple knights)의 간호사제, 야조환생(夜鳥還生, New nightingale).
양차 서계대전 당시 수많은 전장을 거치며 실전 무공을 경험하고 은퇴 후 헥사곤 아카데미에서 교관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노장(老將, The veteran).
그 외에도 다양한 병장기와 무술을 완성도 있게 익히고 만병의 대가라고 불리는 자들은 세상에 꽤 많았다.
그러나 그 많은 만병대가 중에서도 절세의 고수가 된 자는 거의 없었다.
그것이 만병대가들이 다양한 병기술을 공부한 것이 대개 학술적 이유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어느 승려는 전통 있는 무공을 정리하고 그대로 전승하기 위해서 방파에 전해지는 모든 무공을 익혔다.
어떤 사제는 각종 상처에 대한 대처를 더 빠르고 적확하게 하려고 온갖 무기에 관해 연구했다.
또 어떤 퇴역군인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가장 알맞은 무기를 찾아주고자 본인이 먼저 다양한 무기술을 익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루고자 했던 목적을 이루었다.
승려는 소림의 무공을 정리한 위대한 대학승이 되었고, 간호사제는 전쟁 영웅의 별호를 이었다. 퇴역 군인은 헥사곤의 존중을 받으며 아카데미의 영년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인으로서의 중요한 벽을 넘지는 못했다.
그들 외에도 대부분의 만병대가는 초절정에 머물렀다.
이는 무공 본연의 특질에서도 기인하는 바가 있었다.
무림에는 이런 오래된 격언이 있다.
─백 가지 초식으로 백 번 휘두른 검보다, 한 가지 초식으로 만 번 휘두른 검이 훨씬 무겁다.
무(武), 아니 생(生)에 대한 공부를 꿰뚫는 말이었다.
선택과 집중.
누구에게나 시간은 똑같이 한정적이었다.
모든 상황에 맞는 모든 초식을 하나하나 수련하는 것이 유용하다 한들 실제로 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양한 초식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깊이가 부족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초식만 해도 그러한데 병기 자체가 달라진다면 완성도가 더욱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단순히 자세와 힘의 배분 측면에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만병대가의 경지조차, 화경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한없이 모자란 수준이었다.
깊이가 모자랐던 것이다.
병기의 궤적이라는 것은 공부할수록 한없이 심오해져 어느 순간 원래는 초식에 존재하지 않았던 묘리마저 담아내곤 했다.
그것은 한 가지 초식을 십억 번 휘둘러도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깨달음이었다.
천 가지 초식을 고작 백만 번 휘두른 만병대가들은 웬만해서는 닿을 수 없는 경지였다.
천마신교의 흑나찰은 달랐다.
그녀는 만병을 다루면서도 화경에 도달했다.
아니, 애초에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만병의 대가가 아니었다.
그녀가 다양한 무기를 익히는 이유가 그저 승리였기 때문이다.
무공의 본질 그 자체.
흑나찰은 이기기 위해 공부했다.
필요한 만큼만 무기의 범위를 넓혔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더했다. 몸에 맞으면 취했다. 취한 것은 깊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버렸다. 미련을 가지지 않고 지웠다. 만병 자체에 집착하지 않았다.
나쁘게 말하면 전통이 없었고, 좋게 말하면 실리적이었다.
학술적 이유로 만병대가가 된 자들은 재능이 부족한 분야까지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 흑나찰은 적성에 맞는 것만을 수련했다.
심지어 무기가 아닌 것까지도 무기로 삼았다.
이는 흑나찰이 익힌 천마신교의 일인전승 무공, 호접천변공(胡蝶千變功)의 본질이자 의의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더 유리해질 수 있다면 더하고 버리고 바뀌어라. 마침내는 내 가르침마저 그렇게 해라.
흑나찰의 스승은 그렇게 가르쳤고 흑나찰은 그렇게 했다.
검, 창, 도, 곤, 권, 장, 각, 방패, 단도, 구절편. 그건 기본적인 무기술이었다. 다양한 병장기술을 익힌 것만으로도 상대의 대처를 까다롭게 만들었다. 그 중 연검술은 대가의 경지에 올랐다.
독, 암기, 총, 머리카락. 대다수의 무인들이 껄끄러워하는 무기였다. 그랬기에 흑나찰은 이런 잡기들을 더 공부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외모를 가꾸었다. 상황에 따라 의복을 다르게 입고, 표정을 관리했다. 발성을 가다듬었다. 아주 유용하게도 환골탈태를 거친 흑나찰의 외모는 썩 아름다웠다. 미인은 잘 먹히는 무기였다.
정보를 제한하고 때로는 풀었다.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만 적을 마주했고 그렇지 못했다면 피했다. 화경의 고수가 도망도 서슴지 않았다.
적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대처했다. 주의력을 흩트렸다. 함정을 파고 습격했다. 약점을 잡고 협박했다. 때로는 인질을 잡기도 했다.
도발을 하고 때로는 도발에 넘어간 것처럼 연기하기도 했다. 입담까지 연구했다. 사용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사용했다.
그리하여 흑나찰은 엄밀한 의미에서 만병대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유일한 진정한 만병대가였다. 그녀는 무기가 아닌 것마저 무기로 삼고 휘둘렀으니.
─흑나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교전 중에 발생한 잠깐의 공백. 서로의 공격권에서 한치나 겨우 벗어난 거리였다. 목 끝에 보이지 않는 칼을 대고 있는 긴장감과 함께 흑나찰은 숨을 골랐다.
의복이 찢어지고 살갗이 한껏 드러났음에도 흑나찰은 일말의 수치심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건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대신 직전의 싸움을 세세하게 분석했다. 김산의 움직임, 무공, 습관, 호흡, 선택을 가능한 최소 단위로 해체하고 분석했다.
벽력자. 화산검룡. 초대의 계승자. 과연 쉽지 않은 상대였다. 찬란한 별호에 마땅한 격을 갖추었다.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분명한 파천신공의 위력이 하늘을 갈랐다. 기술적 측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경지라는 뜻이었다.
도무지 적으로 삼고 싶지 않은 어린 괴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녀가 원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워야 해서 싸워야 하는 상황.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환경을 유리하게 조작할 수도 없었다. 거기에 미인계 역시 전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 전개였다.
그러나 흑나찰은 생각했다.
'할 만하다.'
일방적으로 공격하면서도 수법이 낱낱이 파훼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흑나찰도 얻은 것이 있었다.
검룡의 사소한 습관과 반복되는 버릇을 몇 개 파악했다.
검룡의 파천신공에는 분명 틈이 있었다.
제아무리 무공의 천재라도 익히고 수련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생길 수밖에 없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흑나찰은 그 틈을 파고들어 갈 자신이 있었다.
물론 검룡이 허리춤에 찬 자하신검을 뽑아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검룡은 예비 성인, 초대의 계승자로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파천신공으로 증명해야 했다.
흑나찰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만일 생사를 겨뤄야 하는 대결이었다면, 흑나찰은 이 자리는 피하고 차일을 기약했을 것이다.
어쨌든 필요한 만큼 탐색을 했다.
흑나찰은 그녀가 진짜 만병대가라고 불리는 이유를 보여줄 준비를 끝마쳤다.
***
문득 만병대가의 눈빛이 변했다.
나는 찰나의 숨 고르기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최대 속력으로 전신을 순환하고 있던 동공을 조절하며 다시금 먹구름을 둘렀다.
쿠웅!
다음 순간 만병대가가 진각을 밟았다. 천산 봉우리가 짧게나마 흔들렸다.
파바바박!
만병대가의 의복이 모조리 찢어지며 수많은 연검이 허공으로 뻗어 나갔다. 그 숫자가 마흔 자루를 넘었다.
아직도 저 정도 숫자의 연검이 남아있었다는 것은 신비로운 지경이었다.
연검은 검기를 머금고 회전하며 날아왔다.
일종의 광역기로 보이는 투검술(投劍術, Sword throwing)이었다.
경지가 낮은 무인이 벌판 가운데에 있었다면 휩쓸리며 절명했을 위력이었다.
물론 내게는 일말의 해도 끼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나는 먹구름을 이끌어 근처로 날아오는 연검을 흩어냈다. 연검 두어 자루가 힘을 잃고 튕겨 널브러졌다.
주변시로 벌판을 짧게 살폈다.
천산봉 곳곳에 간격을 두고 연검이 꽂혀 있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형성된 것이 분명한 검진이었다.
힘을 담고 꼿꼿하게 펴진 채 비스듬히 박힌 연검 무리는 이곳을 흡사 검수들의 무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제 만병대가는 거의 헐벗고 있었다. 몸에 두르고 있는 천조각이 없는 수준이었다.
온몸을 얇게 덮고 있는 검은색 문신 같은 것만이 살갗을 간신히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진각을 밟은 충격을 이용해 만병대가는 다가오며 읊조렸다.
"우리 예비 성인님한테는 너무 자극적인 모습인가?"
"별로. 아무렇지도 않다만."
"……아직 여자를 모르는 꼬맹이구나."
"도사로서 한낱 외형에 흔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봐야 아줌마는 조금……."
"내 신체 나이는 한창이다! 환골탈태로 젊음을 오롯하게 되찾았단 말이다!"
"그래. 그건 나도 아는데. 듣고보니 그 나이에 그런 노출은 나로서도 조금 부담스럽군."
"……그냥 죽어라."
만병대가는 일갈하며 내게로 돌진해왔다.
몸을 감싸고 있던 대부분의 연검을 뿌려댄 덕인지 아까보다도 빨라진 모습. 그러나 여전히 내 움직임에는 미치지 못했다.
미세한 차이. 그러나 내가 더 빨랐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왼손에 뇌강을 머금고 응수했다.
그 순간.
턱.
왼팔이 뇌강을 채 출수하기도 전에 내 손목이 만병대가에게 잡혔다. 검게 번들거리는 손이 먹구름을 가르고 접촉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피격이었다.
"……음?"
짧은 순간 만병대가와 시선을 마주쳤다.
뱀 같은 눈, 무정했다.
눈은 곧 마음의 창. 만병대가의 곧은 눈빛은 그녀의 심기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일말의 도발에 화를 내던 모습까지 모두 연기였나. 오히려 가벼운 대화에 집중이 흔들린 것은 내 쪽이었던 모양이다.
만병대가가 아무리 얕은 말을 던지더라도 그녀는 얕봐서는 안 될 화경의 무인이었다.
"흠."
스르륵─.
만병대가의 손이 뱀처럼 팔뚝을 타고 순식간에 올라왔다. 수준 높은 금나수였다.
그 후 상완쯤 도달했을 때 급격한 회전.
근육을 찢으려는 움직임이었다.
나는 땅에서 발을 떼고 만병대가가 가한 힘에 그대로 순응했다. 경력을 허공에 흩었다.
전신이 순식간에 공중에서 반 바퀴 돌았다.
머리 위치를 반대로 하고 시선을 마주쳤다.
그 순간 만병대가가 힘을 역방향으로 가했다.
그대로 있었다가는 팔 관절이 부러지거나 뜯겨나갈 상황이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허공에 장력을 내뿜으며 만병대가가 뒤튼 방향을 따라 다시 몸을 맡겼다.
다시 반 바퀴 돌아 땅에 발을 디뎠을 시점, 순응을 멈추고 팔에 힘을 역으로 줬다.
짧게 진각을 밟으며 만병대가의 손을 떨쳐내고 역으로 금나수를 가했다.
흠칫.
만병대가가 몸을 떨며 급하게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서로의 공격권 안이었다. 강기의 사거리 안.
이어지는 것은 피비린내 나는 박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