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 92. 만병대가(Weapon master)(1) >
"오라."
그리 선언했지만 천산에 있는 화경 중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검마는 내 말을 듣지도 못한 것처럼 여전히 한쪽 구석에 앉아 숫돌에 검을 갈고 있었다.
아니, 숫철이라고 해야 옳을까. 빛깔로 보아 아마 한철로 만든 연마재 같았다.
혈마군 역시 먼저 나설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뒷짐을 진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런. 처음으로 나서기는 싫은데."
만병대가 역시 제자리에 서서 뒷머리만 긁적였다. 순간 만병대가의 손목에 문신처럼 감겨 있는 까만 무언가가 햇빛에 닿아 반짝였다. 주의해야겠군.
만병대가가 혼잣말로 눈치를 주어도 다른 둘은 반응이 없었다.
검마는 여전히 칼만 갈았고, 혈마군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만병대가는 입을 삐죽 내밀고 그 둘을 몇 차례 번갈아 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검마를 지목했다.
"이봐, 검마. 네가 먼저 싸워라."
검마는 칼을 갈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만병대가를 보았다. 감정이 없는 얼굴이었다.
검마는 좌우로 고개를 두어 번 젓더니 이리저리 빠르게 획획 손짓했다. 수화였다.
"뭐? 아직 성전에 앞서 해야 하는 신성한 제례를 다 마치지 않았다고? 너만 그래? 나는 교도 아니냐? 나도 덜했어, 인마."
획획획.
"나는 어차피 율법을 충실히 지키지 않으니 상관없다고? 이 자식이 말을 함부로 하네.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나중에 싸우고 싶단 말이야. 버릇을 분석한 뒤에 비겁하게 약점을 찌르고 싶다고."
획획획.
"분석 다 해도 어차피 질 거니까 아무 문제도 아니라고? 안 되겠다. 교조의 계승자고 나발이고 나는 너랑 싸워야겠다. 당장 일어서, 이 자식아."
만병대가는 씩씩거리며 검마에게 다가갔다.
"흑나찰(黑羅刹)."
"……위 장로."
그때 혈마군이 나직하게 불렀다.
만병대가가 움찔하더니 작게 대답했다.
흑나찰. 만병대가의 또 다른 별호였다.
직위상은 모두 같은 장로였으나 일단은 성혈을 잇고 있는 혈마군이 암묵적으로 상급자의 지위를 가진 듯했다.
"내가 보기에도 자네가 먼저 하는 게 좋겠네. 제례를 온전히 치르겠다는 검마를 굳이 재촉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림이 안 좋군."
"……하지만 난 나중에 싸우는 편이 더 강한 편인데."
"상관없네. 목적을 잊지 말게. 우리의 역할은 계승자의 능력을 검증하는 것이지 그를 쓰러트리는 것이 아닐세."
"하지만……, 젠장, 알았소."
만병대가는 뭐라 반박을 하려다가 체념한 듯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천산 봉우리의 벌판 한가운데 둥그런 공터가 만들어졌다. 논검제의 관객으로 참석한 교도들이 큰 원을 그려 만든 비무대였다.
화경의 격전을 감당하기엔 다소 좁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논검제는 교도가 나를 보아야만 성립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일월마군과 싸울 때보다는 그래도 환경이 좋았다. 하늘은 높았고 땅은 튼튼했다.
"일이 그렇게 됐군."
일단 나서기로 결정이 되자 만병대가가 지체하지 않고 시원하게 웃으며 나왔다.
"우리 예비 성인님한테 기회를 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초장부터 천마신교 장로회의 최강자인 본녀를 만나게 되었군. 안타까운 일이야."
"저쪽 친구 생각은 다른 것 같던데."
나는 턱짓으로 검마를 가리켰다. 여전히 검마는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연마재를 바꿔가면서 검을 계속 갈고 닦았다.
만병대가가 검마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저 컨셉충(Role player)의 말을 믿는 거야? 내가 쟤보다 훨씬 더 세거든?"
나는 귀를 의심했다.
"컨…… 뭐라고?"
"컨셉충. 무슨 뜻인지 몰라? 가상의 인격이나 역할을 연기하는 걸 즐기는 사회 부적응자 말이야. 어리다고 들었는데 유행어는 잘 모르나 보네. 어려서부터 방구석에서 검만 휘두른 은둔형 외톨이들이 그런 경우가 많지. 바로 저 컨셉충처럼 말이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들을 거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단어를 들어서 잠깐 당황했던 거지."
"고작 그 정도로 당황하다니. 우리 예비 성인님, 아직 수양이 부족하구나. 실전이었으면 이미 내게 허를 찔린 거나 다름없는 거야."
"……혹시 그 입도 만병의 일부인가? 쉬지도 않고 휘두르는군."
"어머, 그럼 확인해볼래? 우리 잘생긴 예비 성인님한테라면 이 누나[姐]가 좋은 거 많이 알려줄 수 있어."
만병대가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입술로 쪽 소리를 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진지하게 답했다.
"누나뻘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아줌마[大妈]가 맞지 않나?"
멈칫.
만병대가가 순간 굳었다.
내가 알기로 만병대가의 나이는 내 두 배쯤은 되었다.
환골탈태를 이루어 청춘의 젊은 외형을 갖추고 있어도 아닌 것은 분명 아니었다.
물론 화산에서 수학하던 시절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자(師姉)들은 사자라고 불렀지만 말이다. 그건 배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같은 실력도 없었고.
"……넌 죽었다."
"혹시 옳은 말을 들으면 화내는 성격인가?"
"흐흐."
만병대가는 살벌한 웃음을 짓더니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창을 던졌다.
쒜에엑─.
창은 공기 찢는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정직하게 안면을 노리는 일격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꺾어 피했다.
빨랐지만 궤적이 뻔해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기습이라기보다는 개전 선언의 느낌이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날 우습게 보는군. 진짜 날 잡아서 서열정리를 한번 해야겠어. 아니. 오늘이 날이다. 일단 너부터 때려눕혀주고 그 다음엔 검마다. 그리고 하는 김에……."
만병대가는 등 뒤의 도를 뽑으며 달려오다가 혈마군 쪽을 슬쩍 곁눈질했다.
"……참 바빠 보이는군."
만병대가는 순식간에 다가와 벼락처럼 도를 내려쳤다. 나는 뇌강을 쏘아 받아냈다.
콰쾅!
한 줄기의 뇌강만으로 만병대가의 도를 튕겨냈다. 만병대가는 반동으로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초근접 거리에서의 뇌강은 화경의 고수마저 일수에 밀어낼 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담담히 선언했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닐 거다. 그 과업은 다음으로 미루어라. 서열정리는 내가 대신 해주도록 하지."
"하! 애송이가!"
만병대가는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다시 보법을 밟아 다가왔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도를 휘두르며 동시에 왼손으로는 단검을 들고 찔렀다. 힘을 동시에 싣기 어려운 동작이었는데 만병대가는 그 문제를 절묘한 진각을 밟음으로써 극복했다.
양손에 뇌강을 두르고 공격을 받아내자 만병대가는 반탄력을 이용해 몸을 크게 돌리며 다시 도를 그었다.
아직 도가 닿기 전, 만병대가가 몸을 절반 정도 돌렸을 때 불현듯 내 목을 노리는 것이 있었다.
미세한 강기를 두르고 있는 만병대가의 머리카락이었다. 장발이 가닥마다 예기를 띄고 있었다.
나를 보법을 밟아 뒤로 물러나며 넓고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피했다. 하나하나 막아내기는 힘든 광범위 공격이었다. 피하는 게 나았다.
후퇴 때문에 몸의 중심이 흔들린 찰나의 순간, 만병대가는 휘두르던 도를 그대로 던졌다. 날아오는 도에 아직 강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진각을 뒤로 밟으며 도를 쳐내고 후속 공격을 대비했다.
원근(遠近)을 오가며 몰아치는 연계 속에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로 다음 순간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원형으로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구절편(九節鞭, Nine jointed whip)이었다.
뇌강 줄기만으로는 걷어내기가 난해한 수법이었다. 구절편의 마디마다 담긴 강기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군데를 건드리는 것으로 발생할 흔들림을 정확히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피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뒤에 기척이 가까웠다.
교전 직후부터 몇 걸음 순식간에 뒤로 물러난 탓에 이미 바로 뒤에 관객들이 가까웠다. 천산 봉우리가 그렇게까지 넓지는 않아 그랬다.
이 역시 그녀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내가 피한다면 교도가 다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만병대가는 구절편에 담긴 힘을 줄이지 않았다. 과연 흑나찰이라는 별호를 지니고 있을 만큼의 독심이었다.
나는 단전의 회전 속도를 끌어올렸다.
남은 화경들과의 연전을 고려하면 내력을 가능한 아끼는 것이 옳았으나 나 역시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교도를 희생양으로 삼고 성인이 될 수는 없었다.
이 일련의 수법이 내 내력을 소모하게 만드는 목적이라면 만병대가는 확실하게 성공적이었다.
가벼운 말투와 달리 만병대가는 명확히 논리와 분석 위에서 판을 짜고 있었다.
과연 실리파다웠다. 선봉을 거부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뜻에 휘둘려주기로 했다. 어느 정도 내공을 소모할 마음이었다.
다만 분석이 의미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덧붙여서.
파지지지직─.
뇌강 줄기가 한군데 뭉쳐 용과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뇌정벽력.
뇌강은 구절편을 그대로 녹이고 지나갔다.
만병대가는 단검을 던지고, 종아리 부근에서 비수를 쏘아내고, 주먹으로 쳐내고, 손바닥으로 밀어내는 등 초식을 물 흐르듯 연계하여 뇌정벽력을 받아내었다. 뒷걸음치며 순식간에 아홉 초식을 이었다.
그리고서야 뇌정벽력은 위로 튕겨났다. 뇌정벽력은 만병대가의 오른쪽 머리 위로 지나가 구름을 가르고 사라졌다.
그제야 그녀는 날숨을 쉬었다.
"이게 그거구나. 한번 막아보려고 했는데 과연 힘들군. 다음부터는 피해야겠는걸."
"그럼 그렇게 하도록."
나는 바로 뇌정벽력을 한 차례 더 쏘아냈다.
"이런 미친."
아까보다는 내력을 덜 주입했으나 여전히 빠르고 강력했다.
만병대가가 뇌정벽력에 대한 응수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우레의 바로 뒤를 따라 뛰었다.
만병대가는 어느새 꺼낸 연검 두 자루를 양손에 각각 쥐고 피하며 휘둘렀다.
연검은 검강을 둘렀음에도 뇌정벽력과 부딪히자 산산이 깨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뇌정벽력의 궤도를 틀고 진행을 더디게 만들었다. 만병대가가 뇌정벽력의 범위에서 피할 틈이 생겼다.
그러나 내 수는 끝나지 않았다.
공기 중에 아직 연검의 조각들이 떠있을 때.
나는 파천신공의 먹구름을 주먹에 둘렀다. 흑색의 강기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천마신권(天魔神拳, Chosen one's punch). 운해(雲海, Sea of clouds).
그대로 연검 조각들을 먹구름으로 품고 만병대가에게 휘둘렀다. 뇌기를 품은 음기였기에 가능한 조작이었다.
운해 사이로 날카로운 쇳조각들이 회오리쳤다.
"……천마신권?"
만병대가가 수법을 확인하고 놀란 듯 외쳤다.
"놀랐다면 수양이 부족한 거겠지. 실전이었다면 허를 찔린 거고."
"사내 자식의 언행이 영 쪼잔하구나!"
운해가 연검 조각을 품은 시점에 만병대가는 이미 새로운 구절편을 양손에 쥔 상태였다.
만병대가는 구절편을 팔자로 휘둘러 강풍을 일으켰다. 운해를 흩으려는 시도로 보였다.
그러나 끈끈한 음강과 강력한 뇌기로 묶인 운해는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
만병대가는 시도가 실패하자 그대로 구절편을 땅에 내려치며 반동으로 물러났다.
구절편은 깨지는 순간 마디 사이로 독연기를 뿜어댔다. 나는 숨을 멈추고 손을 저어 바람을 일으켰다.
그사이 물러난 만병대가는 미련 없이 구절편 손잡이를 내게 던진 뒤 품에서 새롭게 쌍절곤을 꺼냈다.
"끝이 없군."
만병대가는 무기들이 부서져도 계속 꺼냈다. 몸 곳곳에 그렇게 수십 개를 감아놓은 듯했다.
별호에 걸맞게 수법이 천변만화했다. 하나하나에는 묘리가 부족했으나 그것들이 쉬지 않고 이어지니 까다롭고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런 비기(秘器)들을 꺼내는 과정에서 옷자락이 말단부터 찢겨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다. 금속이 의복을 찢은 것이다.
벌써 팔다리의 살갗이 꽤 드러낸 상황이었다. 그러나 만병대가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지 쌍절곤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다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찢기고 짧아진 옷자락이 다소 민망할 만큼 크게 쓸렸다.
도사 된 도리에서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혹시 일부러 그렇게 입는 건가?"
"그래, 인마! 맞다! 아줌마가 그래서 아니꼽냐?"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다."
"통하는 작자들도 있으니까!"
만병대가가 얼굴을 약간 붉히며 소리쳤다.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게 내가 아니었을 뿐이지. 힘내도록."
"위로하지 마, 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