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92화 (92/120)

< 92 : 91. 천산논검(The rite on the rock)(4) >

천산논검 1일째 늦은 밤.

교주전 집무실.

당대의 천마 위천량은 늦은 시각까지 낡은 서적 더미를 뒤적이고 있었다.

김산의 부탁을 받고 수하들에게 '편린'이나 '계시'에 관한 자료를 모아 보고하도록 공개적으로 명했으나 제대로 된 결과물을 제출한 자가 없었다.

사관이 기록한 천마실록은커녕 야사를 기록한 잡서를 뒤져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마신교는 신흥 종교였다.

초대 천마라고 해봐야 고작 5백여 년 전의 인물이었고 오래지 않아 서서히 합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계시는 사실 그다지 매력 있는 기적이 아니었다. 차라리 천부적 재능을 과시하는 편이 더 나았다.

위천량 역시 처음에는 김산의 말을 의심했다. 초대 천마를 직접 보았다니. 웃기지도 않는 농담으로 여겼다. 당초 김산이 초대 천마의 환생을 주창했던 것처럼 일월교주로서의 명분을 얻기 위한 가짜 기적으로 생각했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 어디에도 비슷한 일화조차 없었으니.

오늘 판이 바뀌었다.

교리 문답 끝에 궁리당주 한희가 김산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한 순간부터였다.

김산은 천마들과도 비교를 불허할 만큼 뇌강에 대한 완벽한 제어력을 선보였다.

이후 그 활용은 파천신공 본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조공인 군림보에까지 닿았다. 물론 자세히 보면 군림보의 성취는 뇌공에 비하면 하찮았으나 일반교도들이 보기엔 오히려 더 강렬했을지도 몰랐다.

천마비를 지나 높이 날아 벼랑을 뛰어내리는 것은 그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교도들이 홀렸다.

이제는 김산이 초대 천마를 대면한 것이 사실이어야 했다. 김산이 부정해도 천마신교 측에서 맞다는 증거를 만들어 제시해야 할 판이었다.

고작 몇 주 만에 파천신공이라는 절세무공을 독학으로 대성했다는 결론보다는 그편이 나았다.

물론 김산의 경지로써 대성은 택도 없는 일이었으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이냐였다. 다수가 의심하면 외관이 곧 실제가 된다.

파천신공이 지닌 종교적 권위가 흔들리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러니 김산은 천마신교의 성인이어야만 했다. 또한 그 성취는 반드시 초대 천마가 전해준 심득을 바탕으로 얻은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천마신교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상황임에도 갖다붙힐 만한 일화를 찾을 수 없자 위천량의 생각은 문득 본인만이 열람할 수 있는 낡은 책까지 미쳤다.

그리하여 위천량은 늦은 밤 집무실에서 먼지 쌓인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역대 천마의 일기장이었다.

모든 천마가 일기를 쓰는 취미가 있지는 않았다. 당장 초대 천마 역시 일기를 쓰지 않았다. 초대 천마가 일기를 썼다면 모든 일이 잘 돌아갔을 텐데.

초대 천마와 반대로 많은 후대의 천마는 일기를 남겼다.

무공을 꼼꼼히 익히는 자 가운데에는 일기를 쓰는 자들이 드물지 않았다. 천마들은 그 비율이 특히 높았다.

익히기가 몹시 난해한 파천신공이었다. 작은 심득이라도 후대의 천마에게 전하기 위해 후대의 천마들은 일기를 썼다.

그러니 역대 천마의 일기장은 외부에는 결코 공개할 수 없는 비서(秘書)였다.

당대 파천신공의 최고수들만이 대를 이어가며 시도하고 틀리고 맞추고 고친 끝에 얻은 심득을 기록한 파천신공의 집해(集解)였다.

위천량은 누렇게 변한 종이를 한쪽씩 조심스럽게 넘기며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편린, 편린……."

오래지 않아 위천량은 그 단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다."

발견은 갑작스러웠다. 너무나도 뜬금없었기에 위천량이 덜컥 놀랄 정도였다.

위천량은 조심스럽게 책을 들었다. 표지를 보았다. 누가 남긴 일기장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위궁일기]

위궁.

강자존의 교리 아래 수없이 바뀐 천마신교의 주인 중에서도 유독 깊고 커다란 족적을 남긴 선조였다.

36대 천마. 육악(六岳, The sixth great mountain) 위궁.

교조의 재림이라고 불렸던 당대의 절대자였다.

천마신교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교주. 무위가 현경에까지 도달한 마지막 천마였다.

아직 강호에 살육과 야만이 만연하던 시대. 거대 문파들이 아직 기업화하지 않고 지방 군벌과 같은 무뢰배로 남아있던 시절.

육악 위궁은 당시의 정사대전을 학살로 마무리 지은 절대 고수였다.

산 위의 산. 오악(五岳) 위에 세워진 명문 정파들이 힘을 합쳐도 도저히 넘을 수가 없다 하여 경외와 공포를 담아 육악이라고 불렀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여겨졌던 오악보다 높다는 것은, 즉 하늘을 뜻했다.

육악 위궁은 당대의 천하제일인이었다.

그런 육악이 남긴 일기장에 김산이 말했던 편린에 대한 묘사가 있었다.

위천량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 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괜히 긴장까지 될 지경이었다.

[가경 9년 10월.

어느 한낮,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산을 올랐다.

정상이 보이지 않는 산을 계속 오르니 안개가 자욱했다.

눈을 감고 발걸음이 내키는 대로 계속 걸었다.

어느 순간 안개가 사라지니 평화로운 벌판이 보였다.

익히 아는 곳이었다.

천산의 봉우리였다.

바람 부는 벌판, 벼랑 끝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당당하고 곧은 자세를 했으며 미모는 난릉왕과 같았다.

사내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죽음을 직감했다.

태어나서 본 적이 없는 위대한 무인이었다.

살면서 적수가 없었던 나는 그 앞에서 순식간에 약자로 전락했다.

그러나 사내는 나를 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아름답게 웃으며 고생했고 축하한다고 말을 건네었다.

그 순간 머리와 가슴을 꿰뚫는 장대한 깨달음의 격류를 느꼈다.

벅찼다.

나는 그제야 사내의 정체를 알았다.

사내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였다. 그가 나의 신이었다.

꿈은 실로 찰나와 같았다.

어느새 나는 다시 땅 위에 서 있었다.

나는 잠시나마 상계(上界)의 편린을 엿본 것이다.

탈마지경의 실마리를 얻었다.]

"……."

위천량은 종이를 넘겼다. 더 이어지는 내용은 없었다.

육악 위궁이 남긴 일기의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김산의 기적과 유사했다.

아마 육악이 신이라고 일컫은 사내는 초대 천마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날 꿈을 꾸고 천산에서 초대 천마를 만나게 된 구성마저 김산의 계시와 같았다.

어쩌면 김산이 이 일화를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위천량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기장을 열람할 수 있는 자신조차도 바로 떠올리지 못한 이야기를 화산파의 젊은 도사가 어떻게 알고 있다는 말인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차라리 진짜 기적이 있었다고 믿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아무튼 위천량은 이 일화를 채택하기로 했다.

김산의 시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로 이보다 좋은 일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자세한 내용이었다.

육악은 탈마지경과 관련지어 편린을 언급했는데, 김산은 아무리 좋게 쳐줘도 화경 최상위권의 고수였다. 탈마지경은커녕 현경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럼 이 편린이 그 편린이 아닌 것인가? 구성은 비슷하긴 한데.'

위천량은 턱을 쓰다듬으며 사색에 잠겼다.

이 일화가 위궁일기의 마지막 내용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가경제의 시대를 기준으로 시간대를 계산해보니 육악은 당시 나이 두 갑자를 훌쩍 넘기는 노인이었다.

그리고 저 일기를 남기고는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아마 육악이 그때 죽지 않았으면 중원에 마도천하가 도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위천량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치매나 노망 같은데 말이야."

그 어떤 절대 고수도 병마와 시간을 상대로는 이길 수 없는 법이었다.

탈마지경을 언급해놓고 곧장 숨을 거둔 사실이 위궁의 일화는 죽음을 앞두고 본 환상에 불과하다는 위천량의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물론 육악은 정말로 그럴 수도 있었다. 당시에 이미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헌데 막 서른 줄을 넘긴 애송이가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그건 느낌이 조금 달랐다.

"곤란하군……."

육악의 일화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천마의 일기장에만 남아있는 내용이었고 세간에 모든 것을 공개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육악의 꿈이 노망이든 치매든 진짜든 적당히 편집해서 필요한 부분만 공개하면 김산의 기적을 뒷받침해줄 그럴듯한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천량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육악이 아니었다.

"설마 벽력자가 조기 치매인가? 하긴 그래야 저울추가 맞아. 준 것이 있으면 가져가는 것도 있는 것이 섭리지. 그렇다면 사위로 삼는 것은 조금 더 고려해봐야겠군……."

***

날이 밝았다.

십만대산 천산봉.

본단 성지를 메운 교도들의 분위기는 어제와 사뭇 달랐다.

소란은 없었다. 더 이상 축제를 맞이한 것처럼 들뜬 공기가 아니었다.

어제와 달리 대부분의 교도는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논검의 참가자가 아닌 외부인의 위치였다. 논검이 치러지는 벌판의 중심으로부터 멀었다. 하수들이 다 빠진 것이다.

계속해서 하수가 덤빈다면 이제는 목숨을 받겠다고 어제 선언했으니 당연한 흐름이었다.

천마신교 내에서 내로라하는 소수의 강자만이 들끓는 투쟁심을 소리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리 거대 문파라고 해도 화경이 넘쳐나지는 않았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전 세계 화경의 숫자는 약 400여 명 가량.

동양의 구파일방과 칠대세가, 사도삼문과 마도일교.

서양에서는 헥사곤과 교회, 유럽연합.

초고수는 늘 희귀했고 그들을 찾는 대방파는 많았다.

한 문파가 두 자리 수의 화경을 보유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높은 전략적 가치와 뛰어난 내구도 덕분에 화경에게 주어진 휴가는 길지 않았다. 일 년 중 대부분 기간을 임무를 맡아 수행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나를 제외하고 여섯 명의 화경이 자리했다. 내 신변에 대한 천마신교의 관심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기적이 아닌 나의 무위를 검증하는 날이었다.

내가 충분한 강자라면 가장 정신 나간 광신도까지 나를 존중할 것이고, 아니라면 가장 인정 많은 교도마저 나를 부정할 것이다.

그것이 천마신교를 이루는 첫 번째 교리였다.

오늘 이 자리야말로 논검 그 자체였다.

논검, 즉 무를 겨루는 곳이었다.

아침 9시 정각.

나는 다시 천마비를 등지고 섰다.

눈으로 현장에 자리한 화경들을 훑었다.

뇌절 위천량.

금강마군 류청송.

철난 이원호.

익히 알고 있던 천마신교의 교주와 좌우호법을 시작으로.

어두운 천으로 눈을 가린 채 앉아 검을 갈고 있는 사내.

근본파 이단사냥꾼 부대의 선봉장.

검마(劍魔, Sword fiend).

등 뒤에는 도를 메고 발목에는 비수를 찬 채, 왼손에는 단도, 오른손으로는 창을 들고 허리춤에는 구절편과 연검을 감은 장발의 여자.

드러나지 않은 곳에도 각종 암기와 무구를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한 실리파의 무기 성애자.

만병대가(萬兵大家, Weapon master).

마지막으로 전대 천마의 장손. 위옥의 사촌 오빠. 위천량이 손수 장사지낸 맏형의 독자.

파천신공에 손을 대지 않았기에 살아남아 마침내 화경의 경지까지 이룩한 성혈의 후손.

혈마군(血魔君, Bloody archfiend)까지.

천산봉에 자리한 여섯 화경의 면면을 확인했다.

체면상 교주가 직접 논검에 참가하지는 않을 것이고, 금강마군 역시 참가하지 않겠다고 내게 선언했다.

그러니 나는 그 둘을 제외한 최대 4인의 화경을 상대하면서 파천신공의 성취를 증명해야 했다.

아마 교주의 심복인 철난도 참가하지 않을 테니 사실상 내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3명이었다.

나는 파천신공의 강기를 몸에 두르고 선언했다.

파즈즈즈─.

뇌강이 일렁거렸다. 준비는 마음먹은 그 순간에 끝났다.

"오라."

천산논검 제2일차.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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