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 90. 천산논검(The rite on the rock)(3) >
천산 봉우리 중앙.
높게 세워진 임시 정자에 몇몇만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마신교의 최고위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기막을 두껍게 둘러쳐 소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사담을 나누었다.
"실로 놀라운 완성도로군."
"파천신공을 저렇게 얇고 섬세하게 펼칠 수 있다니. 기운, 특히 뇌기에 대한 제어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오. 교주께서는 저렇게 할 수 있으신가?"
"원로회주. 말씀을 높이시오. 신성한 땅에서 치러지는 공식적인 제식 중이요."
"됐네, 좌사. 오늘내일하는 양반 기분 좀 내게 내버려두게."
천마 위천량이 겉보기에는 위엄있는 자세는 유지한 채 하찮은 어투로 떠들었다.
듣고 있는 춘추 두 갑자의 원로회주로서는 전혀 기분을 낼 수 없는 언사였다.
원로회주의 속이 어떤지는 개의치 않고 위천량은 말을 이었다.
"이보, 원로회주. 실로 내가 저런 걸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요? 내 생전에 강기를 저렇게 얇게 만드는 것 자체를 본 적이 없소. 강기가 무슨 자외선 차단제도 아닌데 어찌 저렇게 피부 위에 펴 바르고 있단 말인가."
위천량은 한 번 연 입을 좀처럼 다물지 않았다.
"그리고 난 뇌강을 저렇게 좀스럽게 쓸 필요도 없소. 어려서부터 좋은 영약을 먹고 내공이 넘쳐나니까 말이오. 천산봉 전체를 뇌강으로 가득 메우고도 남을 만큼."
본전도 못 찾은 원로회주가 소심하게 대꾸했다.
"……한마디로 못 한다는 것이구려. 뇌절으로 이름을 날린 교주시라면 혹 가능할까 싶어 여쭈어보았소."
"눈앞에서 뇌강으로 서커스를 하는 묘기를 보고도 나를 뇌절이라고 부르고 싶으시오? 제발 저 어린 괴물이 듣는 자리에서는 그러지 마시오. 그랬다가는 내가 직접 저 아이에게 뇌왕, 뇌제, 뇌신, 뇌선 따위의 별호를 선물해야 할 테니까."
"……벽력자의 수준이 그 정도요?"
"뇌기를 다루는 실력만 따지면 천하제일이오. 당대는 물론이고 까놓고 말하자면 본좌의 부친보다도 낫소."
위천량의 부친이라면 전대 천마를 일컫는 말이었다. 현대 무림사에서 파천신공을 가장 깊이 성취한 자. 당대에는 뇌제로 불렸던 거마.
김산의 실력이 뇌제보다는 낫다는 말의 뜻은 명확했다.
현대 무림의 시작 이후에는 김산과 뇌기 다루는 능력을 비할 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위천량은 태연하게 말을 계속했다.
"어찌 보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지. 위씨가 파천신공을 몇백 년을 익혔는데 외인보다 못하다니 말이오. 아무리 외인이 종조님을 대면하는 기연을 얻었다고 해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위천량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그래서 말인데 외인을 외인이 아니게 만들면 되는 일 아닌가?"
"……무슨 뜻이오?"
"뭐긴 뭐야. 어린 괴물을 교에 데릴사위로 데려오자는 거지. 파천신공을 저렇게 잘 다루는 자가 외인인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성혈이 아닌 게 문제면 손에 성혈을 쥐여주면 될 일 아니오."
"……교주시여. 성혈은 그렇게 가벼이 다룰 만한 것이 아닙니다. 교조님으로부터 이어진 신성한 하늘의 피를 근본도 모르는 자와 함부로……."
위천량의 오른쪽 뒤에 서 있던 금강마군이 끼어들며 근본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러나 위천량은 금강마군이 그렇게 나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이보게, 우사. 자네도 저 친구가 초대의 계승자라는 것에는 동의했지, 아마?"
"예.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성혈의 후손과 교조의 정신적 계승자를 이어주는 것이 교리 순수주의의 입장에서 어떤지 한 번 검토해보게."
"예? 그것이……. 음. 아니, 이거 제법……."
그렇게 금강마군이 생각보다 그럴듯한 명분에 교리를 적용해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위천량은 소천마에게 물었다.
"옥아야, 네 생각은 어떠냐?"
"네? 저, 저요?"
위옥은 천마신교 정상회의에서 말석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찌그러져 있던 와중 갑자기 이름을 불리자 당황했다.
"벽력자를 데릴사위로 데려오는 것 말이다. 혈족 중에서 또래라고 할 만한 여아는 너뿐이니 네가 싫다면 진행하지 않으마."
여태까지 김산을 이성으로 본 적은 없던 위옥은 순전히 실리주의적 입장에서 사안을 따져보았다. 곧장 머릿속에 주판을 굴리며 계산을 시작했다.
'이대로 있어도 천마 후보 중에서는 내가 제일 앞서고 있으니 내가 차기 천마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러나 파천신공에 대한 재해석이 널리 퍼지고 나면 상황이 어찌 바뀔지 모르는 일. 만약 김산을 배우자로 맞으면 나나 그중 한 명이 차기 천마가 될 가능성이 근 10할. 게다가 저 정도면 외모도 나쁘지 않고 말도 꽤 통하고…….'
위옥은 순식간에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교를 위한 일이라면 본녀는 언제든 기꺼이 순응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교를 위해 희생하겠다? 나는 그건 바라지 않는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이 아니냐. 그럼 이 계획은 철회하는 걸로……."
"아빠. 난 찬성! 저 사람 마음에 들어요!"
찬성- 찬성-
위옥의 외침이 두껍게 쳐진 기막 안에서 몇 번 메아리쳤다.
천마신교 정상회의 원탁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최고위 간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위옥을 향했다.
본인이 제안을 해놓고 위천량은 딸내미가 막상 좋다니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 일단은 논검을 계속 보고 추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네."
위옥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산논검은 이어지고 있었다.
***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논검은 이어졌다.
대산종혼에 이어 두 번째로 나선 자는 실리파의 대표였다.
대산종혼과 마찬가지로 초절정의 무인이었는데 산적처럼 생겨서 박도를 사용하는 작자였다.
산적은 자신만만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딱히 묻고 싶은 건 없소. 다만 초대 천마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그 뇌정벽력의 위력이 알고 싶을 뿐이오."
"그래. 원한다면."
파직─.
"끕!"
일초지적이었다. 자신만만한 태도와는 다르게 그 깊이는 대산종혼만도 못했다.
뇌강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산적은 벼락 맞은 개구리처럼 사지를 뻗고 기절했다.
세 번째, 네 번째, 비슷한 초절정이 스쳐 지나갔다. 모조리 일수였다.
다섯 번째로 나온 것은 사제복을 입은 근본파의 노인이었다.
경지는 일류. 평생을 오로지 교리에만 충실하게 살아온 듯한 경전 연구가였다.
천마신교에는 당연히 이런 사람들도 많았다. 천마신교는 단순한 무파가 아니라 엄연히 종교단체였기 때문이다.
"이 노인은 궁리당(窮理堂)의 당주, 한희라고 하오. 편히 한 노야라고 불러주시오."
"반갑다, 한 노야. 질문하도록."
"그럼 묻겠소이다. 파천신공은 뇌기를 다루는 무공이오. 귀하께서는 뇌정벽력을 다스리는 경지에까지 올랐지. 헌데 뇌기는 다스리기 어렵고 복잡한 기운이요. 파천신공이 하필 뇌기를 목표로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그에 대한 답변은 이미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노인과 눈을 마주치며 기생오라비 천마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번개는 너희다. 날뛰는 자들. 포악하지만 생기 넘치는 것들. 구름은 그런 너희를 감싸 안으려는 그늘이다. 천둥 벼락을 다루고자 파천신공을 창안한 것이 아니다. 너희를 기리고자 하는 심상에서 자연스럽게 뇌기가 나온 것이다."
"……그것이 교조님의 말씀이오?"
"내가 듣고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그런가."
한 노야는 잠시 하늘을 보며 침묵했다. 머릿속으로 많은 것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노인은 어린 아이처럼 서럽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렇군. 그래. 그렇다면 모두 맞아떨어지는군. 아, 이제야……."
한 노야는 그 이후로도 혼잣말을 하며 한참을 더 울었다.
천산봉의 수많은 교도는 주름이 자글한 노인이 우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덕분에 교리 상의 오랜 모순을 해결할 수 있었소이다. 뇌기는 즉 우리고 우리가 무공보다 먼저였다. 참으로 옳은 말이었소. 고맙소."
"나는 들은 대로 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잘 듣고 잘 전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겠구려."
한 노야는 절도 있는 자세로 합장했다.
무인으로서의 경지는 고작 일류였으나 한평생 종교인으로서 갈고 닦아온 몸짓에는 무위와는 무관한 기품이 어려 있었다.
"궁리당주 한희와 휘하 궁리당은 공식적으로 귀하가 종조님의 계승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바요. 이후 귀하가 본교의 성인으로 시성(諡聖, canonization)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지지하겠소."
웅성웅성.
갑작스러운 선언에 논검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천산봉의 교도들이 서넛씩 모여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성지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시성. 실리파가 외부인인 나를 천마신교의 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방식이었다. 즉 나를 천마신교의 성인으로 공인하는 것.
의외로 나의 시성을 지지하겠다는 첫 선언이 실리파가 아니라 근본파에서 나온 것이다.
교도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한 노야가 지지 선언을……."
"근본파의 거두 아니신가. 특히 교리와 경전 방면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분이신데……."
"방금 벽력자께서 하신 말씀에 어떤 귀중한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는 거겠지. 나는 수행이 모자라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말일세."
"나 역시 마찬가지네."
"파천신공에 대한 연구는 원래도 쉬이 발 디디기가 힘든 면모가 있었으니."
"그러나 한 당주께서 인정하셨다면 저분이 정녕 초대 천마를 일별하신 것이 진실일지도……."
나로서도 얼떨떨한 따름이었다.
꿈결에서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준 것만으로 근본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궁리당의 인정을 얻게 되었다니 말이다.
근본파는 교리와 경전에 충실한 종파인 만큼 경전과 교리, 종교적 진리의 올바른 해석을 추구하고 연구하는 궁리당의 영향력이 아주 컸다.
사실상 한 노야의 지지 선언은 곧 근본파 과반 정도의 지지 선언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시점부터 논검에서 교리에 대한 논쟁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단순히 내 무력만을 시험하려는 자들이 계속해서 논검에 나서곤 했다.
그러기를 몇 차레.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그만."
나는 선언했다.
천산이 조용해졌다.
내공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태는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문제는 내가 아니라 논검제 참가자의 수준이었다.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논검이 우습나?"
지금까지 논검에 나선 자들은 죄다 초절정에 불과했다.
어디 부당주고 무력대 부대주고 하는 거기서 거기인 자들.
이런 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초대 천마를 만난 깨달음을 유도할 수 없었고 나의 무위를 검증할 시험대도 될 수 없었다.
이런 싸움은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할 이유가 없었다. 시간 낭비였다.
"내가 목숨을 빼앗지 않으니 논검이 유희거리로 여겨지는 것이냐? 아니면 여기 있는 모두가 나를 차륜으로 상대하여 힘을 빼기라도 하려는 건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한 노야의 선언 이후, 급변한 상황에 각 종파가 행보의 방향을 명확히 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시간 낭비는 이쯤 하지. 오늘 논검은 여기까지 하겠다."
나는 파천신공을 해제했다. 피부를 덮은 구름과 뇌강의 줄기들이 사라졌다. 비로소 피부가 볕 아래에 드러났다.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것을 똑바로 물어라. 정리할 시간을 주지. 잘 들어라. 내일부터는 초절정 이하의 하수가 단순히 내 무력을 검증하려 든다면 목숨을 받겠다. 교도들은 강자존의 교리를 준수하라."
논검의 목적 중에서는 내 무위에 대한 시험도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파천신공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파천신공의 사용자가 나와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화경의 무인이 논검에 나서야 했다. 천마신교에서도 최중요 전력이라고 할 만한 자들 말이다.
"내일도 이따위로 수준 낮은 장난이나 한다면 논검은 그대로 끝내겠다."
나는 천마신교의 최고위 간부들이 앉아있는 정자를 잠깐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쾅!
그대로 비석을 지나 벼랑 끝에서 파괴적인 진각을 밟았다. 반동을 추진력 삼아 몸을 높이 띄웠다가 그대로 몸을 아래로 날렸다.
팔을 좌우로 편 채 공기 저항에 몸을 싣고 천천히 활공했다.
그저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무공 활용이었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Chosen one's reign).
나는 파천신공 후편에 있는 보법까지 이미 그럴듯하게 익힌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