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 89. 천산논검(The rite on the rock)(2) >
천산은 십만대산에서도 가장 신성한 땅이었다. 천마신교 본단을 등지고 있는 영산(靈山).
약속의 날, 논검제가 열리는 장소로 향한 나는 익숙한 광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긴……."
"멋진 경관이죠? 천산봉에서 이렇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속이 탁 트여요. 모든 인간사와 갈등이 다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래."
위옥의 말대로 천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자연이 세월로 조각한 예술품이었다.
광활한 십만대산과 천마신교의 정경이 멀리에 작은 조각품들처럼 끊임없이 늘어져 있었다.
하늘산[天山]이라는 이름처럼 드높은 곳이었다.
"평소에는 성혈의 피를 이은 혈족들만 드나들 수 있는 금지(禁地)지만 오늘처럼 성스러운 의식(Sacred rite)이 있는 날에는 일반 교도들에게도 개방되곤 해요."
천마의 혈족들에게만 허락된 장소.
그야말로 천마신교의 성소였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
그러나 나는 이 광경을 보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빠도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색에 잠기고는 해요."
"그래. 네 말대로 천마가 아주 좋아할 만한 장소로군."
천산은 바로 내가 백일몽에서 초대 천마를 만난 장소였다.
바람 부는 산과 벌판. 나무는 바뀌었고 산세는 닳았으나 전체적인 형태는 어렴풋한 기억에 남은 그대로였다.
등선하고도 이 자리에서 후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인가.
재밌는 일이었다. 초대 천마를 만난 것에 대한 증명이 바로 이 자리에서 치러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떤 종교적 계시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물론 나는 그리 착실하지는 않아도 명색이 도교도(道敎徒)였다. 그 어떤 신비를 겪어도 천마를 신으로 추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필연과도 같은 우연에서 느껴지는 경이로움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할아버지. 준비는 다 됐어요?"
"그래."
나는 아래에서 시선을 돌리고는 꿈속에서 초대 천마와 대화를 나눴던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아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벼랑 끝.
강풍 부는 산에서도 가장 위태로운 자리.
초대 천마가 고고히 서 있던 꿈에서와 달리 지금 그곳에는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천마비(天魔碑)]
광오한 필체로 단출하게 적힌 세 글자는 오래전 절대자가 이 땅에 다녀간 흔적을 증거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내가 그곳으로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천산이 서서히 조용해졌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망아지들이 목소리를 죽였다.
뚝.
이윽고 천마비를 바로 앞에 두고 나는 멈춰 섰다.
천산은 이제 완벽히 고요했다.
문득 세차게 불던 바람마저 멎었다.
수많은 무인과 광신도가 천산 봉우리의 벌판을 메우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조용했다. 보지 않아도 등 뒤로 느껴지던 기척마저 사그라졌다.
그러나 몸을 멈춘다고 비무를 앞두고 들끓는 무인의 마음까지 어찌 감출 수 있으랴.
정중동(靜中動).
나는 적막한 가운데에서도 각자 내면에 무수한 소란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전이 아니라 심장으로 느꼈다.
휙.
나는 발뒤꿈치를 축으로 몸을 돌렸다.
천마비를 등졌다.
등 뒤에는 오로지 벼랑과 천마비만이 있었다.
내가 천마비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이었다.
사람들이 천산의 봉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를 보는 눈빛에 의심과 적개심이 가득한 자들을 보았다. 천마신교의 근본파라 불리는 원리주의자들이었다.
호감을 눈동자에 품고 은은한 미소를 흘리면서도 호승심을 드러내는 자들이 있었다. 실리파라고 불리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본질은 무인이었다. 나를 성인으로 만들어 실리를 취하려 들면서도 결국 신진 강자와 싸울 기회를 놓치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신(神)을 믿는 무인은 아무리 현실적으로 살려 한들 속에 낭만을 품은 법이다. 짐승은 고기 맛을 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절을 하거나 기도하는 소수가 보였다.
순박하고 보잘것없는 자들. 그들 중 최고수라고 해봐야 1호와 2호였다.
일월파라고 불리며 천마신교를 겉도는 자들이었다. 내 어이없는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
그들이 내 거짓말에 속은 만큼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이유가 있었다. 때문에 지난 2주간 그들 앞에서 재림천마 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오늘 내가 행하는 것과 말하는 것은 일월마군에서 비롯된 거짓에 근거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초대 천마로부터 심득을 얻었다는 진실이 내 행보의 바탕이 될 것이다. 그 옛날 천마의 파천행처럼 오늘 여기 깊은 발자국을 남기려 한다.
쿵─.
나는 진각을 밟았다.
천산이 무겁게 울렸다.
화악─.
신호라도 받은 듯 마교도들의 기세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선배에게 가르침을 얻었으면 마땅히 후배에게 전해주는 것이 강호의 도리인 법.
내가 초대 천마에게 배운 것들을 그의 아득한 후손들에게 대신 전해주어야 할 차례였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침을 주겠다."
"어떤 가르침을 주겠다는 거요?"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물었다. 근본파 쪽인가? 아니면 실리파인가? 이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오늘 내 설법을 듣는 제자들이었으니.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너희가 원하는 가르침."
파지직─.
중반편과 후반편을 이해하면서 한층 더 자연스러워진 파천신공을 일으켰다.
한없이 어두운 먹구름이 피부를 덮듯 얇게 몸을 감쌌고 그 사이를 실뱀같이 작고 얇은 뇌강이 먹이를 찾듯 일렁거렸다.
이제는 뇌강의 발현 자체에만 치중한 적명신공은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결국 무공의 의(意)를 배제한 반쪽짜리였기 때문이다.
초대 천마의 뜻과 흔적을 읽고 이해한 지금 나는 의형을 온전히 갖춘 파천신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
오디토리엄 전체를 장악할 만큼 거대한 뇌정벽력은 사용할 수 없겠지만, 기운을 다스리는 능력만큼은 그때보다 낫다고 자신할 수 있다.
"너희가 묻는 대로 답하리라."
그러니 나는 자신만만하게 선언할 수 있었다.
천마로부터 받은 깨달음이 궁금하면 깨달음을 전할 것이고.
교리를 물으면 내가 해석한 교리로 답할 것이며.
검을 논하면 그저 검으로 대답하리라.
나는 칼과 주먹을 세운 수많은 마교도를 눈앞에 두고도 기세를 낮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렬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진짜 초대 천마라도 된 것처럼 오연하게 읊조렸다.
"오라."
비로소 제전의 시작이었다.
천산논검(天山論劍) 제1일차.
개막.
***
내가 오라고 선언했음에도 교도들은 쉽게 달려들지 않았다.
서로 순서를 가늠하며 눈치를 보는 중인 듯했다.
천산논검제의 규칙은 간단했다.
누구든 초대의 계승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와서 원하는 주제를 논하면 된다.
한 번에 한 사람씩.
그게 전부였다.
정해진 방식도, 시간도, 기간도 없었다.
당연히 천마신교의 교도들도 내가 무한정 겨룰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한정 차륜전을 계속하면 당연히 나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내가 아니라 이 자리에 현경이 와도 천마신교 전체와 겨루어 이기는 것은 힘들었다. 천마신교는 그만큼 규모가 컸기에 그랬다. 명색이 마도제일단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러니 이번 논검의 첫 번째 목적은 나를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었다.
교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얻었다고 주장하는 초대 천마의 깨달음을 검증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내가 초대 천마의 계승자를 자칭할 만큼의 강자인지 확인하는 것.
때문에 교도들은 최대한 적은 기회에 많은 것을 살피기 위해 서로 순서를 정하고 있었다.
내가 하루에 상대할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초대의 계승자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그 질문자에게도 마땅한 자격이 있어야 했다.
근본파와 실리파 각각의 무리 내부에서 잠깐 소란이 있었다. 대표를 뽑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무리에서 대표로 뽑힌 둘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 중 먼저 앞으로 나온 자는 근본파의 인물이었다.
"문지기 장대명!"
"철혼단의 부단주!"
"대산종혼(大山終?)!"
교도들이 나선 자를 알아본 듯 환호하며 소리쳤다.
대산종혼. 즉 십만대산의 마지막 문지기라는 뜻이었다.
낯설지 않은 인물이었다.
"또 너냐?"
십만대산에 문지기는 많지만 마지막 문지기라면 가리키는 인물은 정해져 있었다.
십만대산에서 가장 심처를 지키는 자.
교주가 교주전에 있는 한 주야를 막론하고 그 앞을 지키는 문지기.
"정식으로 인사하겠습니다. 장대명입니다."
"그래, 나는 네가 아는 그 사람이다. 반갑다. 나도 반갑지만."
힘의 논리에 부서지지 않는 신념을 좋게 보고 있던 인물이었으나 오늘은 나도 살살할 생각이 없었다.
대산종혼 장대명은 기껏해야 완성된 초절정에 불과했다.
외공만으로도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
단전을 거의 회복한 현재에는 삼초지적(Reeling under the third blows)도 되지 못했다.
"화경이 아니라면 좀 약하지 않은가 싶구나."
나는 손바닥으로부터 얇은 뇌강을 뽑아 올렸다.
얼핏 선으로 보일 만큼 얇았다. 안력이 뛰어나지 않다면 대낮인 지금은 존재 자체를 인식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장대명은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들었다. 뇌강으로부터 위협을 느낄 정도의 능력은 있는 무인이었다.
일수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듯 만전의 태세로 기세를 피워올렸다.
몇 번을 재차 부딪쳐도 닿을 수 없다면서 재차 시도하는 바보 같은 용기.
내가 좋아하는 무도(武道, Martial arts)의 자세였다.
원래 벽은 두드리는 자만이 무너뜨릴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오늘은 무너질 예정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정녕 당신이 교조님의 계시를 받았다면,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당신의 교리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독실한 교도들 대신 당신이 선택받은 이유."
나는 질문을 듣고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실한 천마신교의 교도라면 응당 가질 법한 질문이었다.
답하기 위해 나는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절체절명의 순간. 늘어나는 뇌강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주하기 직전에 꿈결처럼 마주했던 초대 천마.
정답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내가 그곳에 순간이나마 닿은 연유는 등선한 초대 천마조차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현경을 아득히 초월하고 탈마한 초대 천마도 모르는 것을 일개 화경 나부랭이가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굳이 내가 그 정답을 생각하자면.
"그것이 필요했고 내가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건 교조님의 말씀이요?"
"아니, 그냥 내 생각이다.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런 잡담이나 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고."
"……그렇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다. 나 역시 모든 것을 듣지는 못했으니. 이제 덤벼라."
장대명은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고쳐잡았다.
찌르기에 특화된 자세를 잡고는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실전을 통해 다듬어진 일수.
초절정의 한계에 다다른 쾌검이었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교주전을 지키는 마지막 비수가 되고자 하는 대산종혼의 의지가 엿보였다.
콰릉!
그러나 쾌검이 번개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얇은 뇌강은 장대명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높은 하늘을 가린 구름을 찢어발겼다.
장대명은 멀리 날아갔다.
그러나 강기가 몸을 뚫고 지났음에도 장대명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저 쓰러진 채 하늘을 보며 입을 열어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뇌정벽력."
뇌강이 내 마음을 온전히 따르고 있었다.
강기가 피륙을 그대로 지나치고도 사람을 해하지 않았다.
"질문에 대한 답은 들었는가?"
"잘 들었소."
"충분했나?"
"적어도 내게는 그랬소."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내가 초대 천마의 계승자라고 생각하나?"
"……그건 나 같은 일개 교도가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오."
고개를 젓다가 장대명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교조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당신을 신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신비한 경험이로군."
그건 근본파의 교도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인정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장대명은 정신을 잃었다.
적막 가운데 근본파 무리에서 한 사람이 나와 장대명을 챙기고 들어갔다.
나는 다시 벌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수한 천마신교 교도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저들은 아직 듣고 싶은 답을 다 듣지 못했다. 눈빛이 뜨거웠다.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말했다.
"다음."
대답을 해주면 될 일이었다.
힘이 넘쳤다. 아직 해가 높았다.
논검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