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 88. 천산논검(The rite on the rock)(1) >
그러니까 여기까지가 아주 평온했던 십만대산에서의 2주 동안의 기록이었다.
요양을 하고, 산책을 하고, 도하나와 위옥의 무공을 봐주고, 1호와 2호가 해준 음식을 먹고. 파천신공을 공부한 시간들.
사태는 내가 위천량과 파천신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지 사흘이 지났을 즈음에 발생했다.
파천신공에 대한 조언을 해준 것으로 나름 파천혼원단 값은 했다고 생각하고 슬슬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찰나였다.
산책을 갔다 위옥의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담장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1호와 2호, 즉 일월파의 무사들과 거구의 남자 하나였다.
보아하니 1호와 2호가 쩔쩔매는 표정인 것으로 보아 거구의 남자는 천마신교 내에서 상당히 지위가 있는 자인 것 같았다.
등 뒤만 봐도 느껴지는 기세가 살벌했다. 회복된 단전을 따라 예리하게 날 선 기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거구의 남자는 화경의 무인이었다.
문득 거구의 남자가 내 기척을 느낀 듯 이쪽을 바라봤다.
1호가 놀란 듯 손을 저었다.
"아, 안 됩니다!"
1호와 2호가 거구의 남자의 팔을 잡았으나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몸을 날려 이쪽으로 왔다. 일월파의 무사들은 나가떨어졌다.
매서운 기세. 덩치에 비해 쾌속했다.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실로 위협적인 속도로 다가온 남자는 내 앞에서 문득 정지했다. 반동을 완전히 갈무리하는 상승의 무리였다. 시끄러운 기척이 없었다.
바로 앞에서 보니 나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컸다. 취견자에 비할 만한 거구. 2m에 가까웠다.
얼굴을 마주하려니 고개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흔하지 않은데 말이다.
험상궂은 얼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지만 익히 알고 있던 낯짝이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군.
거구의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벽력자, 맞소?"
"그 별호는 좋아하지 않는다."
"화산검룡, 일월교주, 자칭 재림천마, 초대의 계승자인 김산이 맞느냐는 거요."
"자칭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산은 맞다."
초대의 계승자는 또 언제 붙은 별호인지 모르겠다. 그게 재림천마와 공존할 수 있긴 한 건가?
후에 알아보니 위천량이 내 공로를 치하하고 편린에 대해 공개적으로 조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별호라 했다.
물론 사람들은 내가 초대 천마와 만났다는 것을 재림천마의 환생 같은 거짓 기적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부분은 좀 억울했다. 이건 진짠데.
사소한 문제였다. 진짜 문제는 눈앞에 있는 이 남자였으니.
팡!
거구의 남자가 방패 같은 손바닥을 부딪치며 합장했다. 공기 터지는 소리가 땅바닥을 휩쓸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소인, 류청송이라고 하오."
넌 아무리 봐도 소인이 아니야. 2m짜리 소인이 어디 있나.
그러나 상대가 소인을 자처한다면 나 역시 마땅한 대응을 해야 했다.
"반갑다. 나 김산이다."
별일 아닌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누군지 아시오?"
"안다. 금강마군."
"영광이군."
금강마군(金剛魔君, Adamantine archfiend) 류청송.
천마신교의 광명우사이자 이단사냥꾼들의 우두머리. 천마신교의 질서를 책임지는 집법당의 수장.
광명좌사 철난에 버금가는 권각의 고수. 마도제일외공. 세간에서 불리기를 금강불괴에 가장 가까운 자.
경전과 교리에 매몰된 근본파의 거두.
즉, 날 잡아 죽이고 싶어하는 원리주의자들의 대표였다.
"잠깐."
나는 금강마군을 그대로 지나쳐 바닥에 쓰러진 1호와 2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들어가서 쉬시오."
"하, 하지만."
"별일 없을 거요.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오."
1호와 2호는 어벙한 얼굴이었다. 금강마군이 나를 곧장 공격이라도 할 것처럼 여겼던 모양.
외부자인 내 눈에도 보이는 교내 정치 역학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순진한 작자들이었다.
그 순진함이 지나쳐 재림천마를 믿을 정도였으니 지금은 내가 보호해주는 것이 옳았다.
그들이 물러나고서야 뒤를 돌아 금강마군을 다시 보았다.
"용건이 무엇이냐."
"낮은 자를 먼저 보살핀다. 그것이야말로 교리에도 걸맞은 행동이군. 귀하를 본 탓에 내가 잠시 흥분했소. 저들에게는 따로 사과해야겠군."
금강마군은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더니 거대한 손바닥으로 본인의 뺨을 세게 때렸다.
철썩!
섬뜩한 타격음이었다.
금강마군의 안색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입가로 피가 주룩 흘렀다. 내부는 금강불괴에 가까운 외공으로도 보호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역시 미친놈이었다.
원리주의자라는 것들은 대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꼰대들이었다. 왕조가 있던 시절의 교리를 아직 들먹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자들의 수장은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미친 작자일 것이다.
첫 대면에서 자해를 하다니. 과연 범상치 않았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인 나조차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얼굴은 왜 갈긴 것이냐?"
"아, 놀랐다면 미안하오. 교리대로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마땅한 벌을 내렸을 뿐이오."
"……스스로에게 말이냐?"
"집법에 있어 나보다 상급자가 없으니 내 스스로 해야 할 일이었소."
금강마군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경이롭긴 하지만 공감할 수 없는 세계관이었다. 본인이 교리를 어기고 본인의 뺨을 날리다니.
특히 본인에게도 엄격한 원리주의가 나에게는 어찌 적용될까 아주 두려웠다.
"……용건은?"
"교주님께 이야기를 들었소. 교조님을 직접 뵈시고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설법하셨다고 말이오. 덕분에 본교가 파천신공에 대해 내렸던 그릇된 해석을 정화할 수 있었다고 들었소."
"……그런 일이 있었지."
내가 '설법'과 '정화'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맥락은 대강 맞아떨어졌다. 어째 진짜로 종교적 기적을 행한 것 같은 미사여구가 붙긴 했지만 말이다.
"그것을 듣고 소인은 아주 감격했소."
"……뭐라고?"
"귀하가 말하는 재림천마라는 것은 결국 교조님이 직접 환생환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군. 어느 날 교조님의 계시를 받고 그 뜻을 받들어 행하는, 교조님의 정통한 계승자를 의미하는 거였던 거요. 그런 의미에서의 재림이었겠지!"
"그, 렇다고 할 수도 있지? 아마……."
"아마?"
"……거의 그런 느낌이다."
"좋소!"
금강마군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꽤 만족스러웠다. 일이 돌아가는 꼴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근본파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았다. 해석이 몹시 그들에게 유리한 방식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초대 천마와의 대면이 공식적인 기적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대로라면 실리파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천마신교의 성인이 되는 방식으로 갈등을 잘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길 떠나기만 하면 장땡이었다.
십만대산은 충분히 즐겼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다. 일월신교는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이후엔 다시 도사로서 평화로운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계시? 성인? 재림천마? 초대의 계승자? 알게 뭔가. 나는 정파의 무인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우연히 일어난 작은 사고에 불과했다.
이제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금강마군이 저런 불길한 멘트를 뱉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작은 문제가 하나 있소."
"……무어냐."
"나는 믿소. 귀하께서 교조님을 계시에서 뵈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그러나 수많은 불쌍한 중생들은 대개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법. 또한 귀하께서는 귀하의 깨달음이 말뿐이 아니라 파천행(破天行)에도 닿았다는 것을 증명하셔야겠소."
"요는?"
"이곳, 신성한 땅 천산에서 논검제를 여시오. 그리고 교조님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교도들 앞에서 증명하셨으면 좋겠소."
"한 마디로 의심 많은 근본파를 파천신공으로 혼내줘라?"
"그렇소. 천마신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증명하라는 것이오."
좋다가 말았다. 그냥 대충 말로 때우고 보내주려는 줄 알았는데 근본파 이놈들은 숫제 제대로 붙어보자고 계획을 짠 것이었다.
천마신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은 몇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심지어 당대 천마를 결정하는 것도 결국은 그 교리를 따랐다.
강자존(强者尊).
약자를 보호하라는 교리는 결국 강자가 베푸는 자비에 불과했다. 약자가 있어야 강자가 있기 때문이다.
버려진 이들 가운데서 질서를 만들었던 기둥은 결국은 힘이었다.
"그렇게 안 하면 근본파 친구들이 많이 안 좋아할 것 같나?"
"근본파로서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근본파에는 광신도들이 참으로 많소. 내가 봐도 정신 나간 교도들도 꽤 많지. 그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오."
"하겠다."
만난지 2분도 안 되어서 자기 귀싸대기를 날린 자가 정신 나갔다고 평가하는 자들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모르는 채로 살고 싶었다.
논검(論劍).
무를 겨룬다는 뜻이었다.
한 마디로 불만 있는 마교도들을 때려눕히면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 정사마의 구별이 사실상 무의미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마교도를 때려잡는 것은 여전히 도사로서 기꺼운 일이었다.
정신나간 종교쟁이들을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는 훨씬 자신 있는 방식이었다. 일월마군을 상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고.
명색이 논검이니만큼 공정한 규칙도 있을 테니 일월신교 사건 때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았다.
"과연 귀하께서는 교조님의 계승자이시오. 넓은 배포요. 소인, 크게 감명받았소."
"그건 그렇고 혹시 그쪽도 논검에 참석하나?"
"하하, 설마. 소인은 귀하를 믿는다고 하지 않았소. 큰 행사가 될 테니 소인은 규율을 유지하는 데에만 많은 힘을 쏟아야 할 거요."
금강마군은 드물게 옅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듣던 중 다행인 소리였다. 금강불괴에 가장 가까운 남자가 얼마나 단단한지 직접 두드려보고 싶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큰 행사가 될 거라니? 무슨 말이야? 내게 관심 있는 자가 그렇게 많다는 건가?
규모에 대해 물으려는데 금강마군이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가보겠소. 귀하를 뵈어 짧지만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소."
"그래. 논검제 때 보도록 하지."
간다는 인물을 잡기는 뭐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줬다. 금강마군 류청송은 다시 큰 소리로 합장을 하고는 사라졌다.
***
"논검이요? 실수한 거 같은데요."
위옥이 말했다.
나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왜?"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존재가 교내에서 화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재림천마든, 초대 할아버지의 계승자든, 뇌정벽력의 주인이든,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 한둘이겠어요?"
"응?"
"논검이라는 판이 깔리면 근본파만 달려들지는 않을 걸요. 아마 할아버지를 지지하는 실리파들도 신나서 달려들 거예요."
"……왜 그게 그렇게 되지?"
"싸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자들이 넘쳐나는 곳이니까요?"
나는 그제야 금강마군이 웃음까지 흘리며 좋아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강자존의 종교. 난폭한 자들의 쉼터. 뇌강과 같은 자들이 주어진 선 안에서 되는대로 날뛰는 곳.
무를 논한다는 의식.
논검제는 기운 넘치는 망아지들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판을 깔아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교주는 안 나오겠지?"
"에이, 체면이 있죠. 아빠는 안 나오겠죠."
나는 그날부터 파천신공을 가다듬었다.
중ㆍ후반편을 읽으며 얻은 심득을 정리하며 파천신공을 더욱 갈고 닦았다.
다시 3일이 흘렀다.
운기조식을 하다가 눈을 뜨니 오전 6시 반이었다.
천산논검이 시작하는 날의 해가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