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 87. 파천신공(The heaven breaker) >
천마신교 본단에서 요양한 지 2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지난 2주는 그야말로 내가 기대하던 평화로운 세월이었다.
위옥의 별장은 천마신교 본단에서도 안쪽 구석에 있었다.
등지고 있는 산을 기준으로 근처를 통틀어 천산(天山)이라고 불렸는데 천마신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일종의 성지(聖地)였다.
주변 건물들은 실제로 사용하는 곳이라 아니라 종교적 상징물에 가까웠다.
그러니 위옥의 별장을 오다가다 만나는 것은 대부분 건물의 관리인들이었고 그 외의 교인들은 보기 힘들었다.
가끔 성지순례를 온 교인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교인들 중에서는 나를 노려보는 자들도 있었고, 그저 물끄러미 쳐다만 보는 자들도 있었다. 나는 항상 그들이 나를 보는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와 오래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개중에 특이한 놈도 있었다. 예를 들면 교주전의 문지기라든가.
"왜, 뭐. 뭘 봐?"
"……아닙니다."
"출입 허가 명단에 나 있는지 확인해봤어?"
"……예."
"다시 봐봐. 오늘은 없는 날이면 어떡해. 교주전 제대로 안 지킬 거야?"
으드득.
"……확인했습니다. 있습니다.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뭐라고 적혀있는데? 재림천마?"
"……."
문지기가 인상을 아주 생동감 있게 구겼다. 놀리는 맛이 있는 친구였다.
이자는 몇 차례 위천량을 만나러 가면서 여러 번 만났는데 아직도 나를 보는 시선이 사나웠다.
물론 처음 본 날 이후로 대놓고 덤비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격차를 느끼고도 신념을 꿋꿋하게 드러내는 것이 나름 마음에 들었다.
물론 만약 그 신념을 실천하겠다고 칼 들고 찾아온다면 그때는 마음이 바뀌겠지만.
다행히도 아직은 근본파 원리주의자들의 직접적인 습격 같은 것은 없었다.
하긴 교주의 초대장을 받은 자가 교단 내에서 습격을 받는 것은 교주의 체면을 크게 구기는 일이었다.
일월신교만큼은 아니지만 교주의 권위를 중시하는 천마신교에서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날 리는 없었다.
물론 아직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들 마음을 아주 편하게 먹을 수는 없었다.
화경을 상대로 충분한 저항을 할 수 있을 만큼 몸 상태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요양을 하면서 하루의 절반은 운기조식을 했다.
지금에 와서는 단전이 거의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내기의 순환 속도가 느리고 거대 기공을 사용하는 것은 부담스러웠지만, 28년분의 내공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재밌는 건 뇌기를 다루기가 아주 쉬워졌다는 것이다.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에서 뇌강에 대한 심득을 얻은 것이 영향인 것 같았다.
원래 내가 가장 잘 다루는 것은 검기였는데 뇌기의 통제가 거의 그에 비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파즈즈─.
손바닥 위에 뇌강을 아주 얇게 띄웠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 특기인 검강에 비할 만큼 얇게 펼 수 있었다.
형과 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는 경지였다.
검신합일을 이루는 데 수년이 걸렸는데 뇌신합일은 벼락치기 한 방에 가능해졌다. 일월마군이 알면 배 아파할 일이었다.
운기조식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주로 산책을 하거나 도하나의 무공을 봐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늘 유난히 도가 무겁고도 빠르구나.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이냐?"
"지금 수준으로 사형 따라다니다가는 제 명에 못 죽겠다 싶어서요."
"아주 훌륭한 깨달음이다. 때로는 필요가 성취를 낳기도 하지. 지금은 내 목숨도 함께 걸려 있으니 계속 정진하도록."
파앙!
도하나는 대답 없이 도를 허공에 그었다. 도기가 볕과 부딪혀 반짝였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혹여 내가 얄밉더라도 근본파에 귀의하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며칠에 걸쳐 도하나가 익힌 도법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단전이 그럭저럭 회복되고는 수차례 대련도 했다. 확실히 도법이 날카로워진 것이 눈에 보였다.
소걸과 마찬가지로 도하나 역시 최근 계속해서 강적과의 실전을 겪어왔다.
무공에 진전이 있을 만했다. 다만 심득을 온전히 갈무리할 수 있을지는 오로지 본인의 운과 노력에 달린 법이다.
산책도 즐거웠다. 처음엔 덥고 습하기만 했으나 십만대산 주변의 경관을 보다 보니 나름의 맛이 있었다.
단전이 회복되기 전에는 근처만 산책했지만 내공을 다룰 수 있게 되고는 인근 산이나 도시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물론 너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눈치가 보여 몇 번 나가지는 않았다.
가끔은 집주인의 파천신공을 봐주기도 했다. 일단은 그러기로 했으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파천신공의 나머지 부분도 읽어볼 수 있었다.
"이거 내가 봐도 되는 거 맞아? 나중에 책임지라고 하는 거 아니지?"
"직접 쓰신 거 아니었어요?"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공식적으로는 외인이지 않나."
"푸흡. 읽어봐요. 아마 기대하던 내용은 아닐 거예요."
위옥이 그 나이대 소녀답게 웃었다. 소천마라고 하기엔 참으로 천진한 성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관심은 세간에 공개되지 않는 상승 무공에 쏠려 있었다. 어딜 가서 이런 걸 접하겠나. 설렜다.
나는 위옥의 개인 서재에서 파천신공 중반편과 후반편을 건네받았다. 앉은 자리에서 완독했다.
"……음."
외부에 공개된 초반편까지 받아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어때요?"
"난잡하군."
그랬다. 파천신공은 몹시 난잡한 책이었다.
음기와 뇌기를 다루는 법으로 시작한 무서는 이윽고 수많은 신도를 다스리는 제왕학을 다루더니 뜬금없이 경공과 검술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천마 본인의 인간관에 대해 설파하다가 다시 뇌기 이야기로 넘어왔다.
어찌보면 그 뜻이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가도 아무런 흐름이 없는 것도 같았다.
분명 대단한 무공은 맞았다.
그야말로 시대를 풍미한 무공의 천재가 써내려간 신공 절학이었다.
전반부만으로는 그리 특출나지 않았던 재기(才器)와 영감이 중반부와 후반부에서는 장마다 넘쳐흘렀다.
문장은 심유했고 담고 있는 내용은 지고한 상승 무리(武理)였다.
접한 것만으로도 갖가지 심득이 신기루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문제는 흐름을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로 구성이 난해한 데다가, 문맥상 현재와는 뜻을 달리하는 것이 분명한 고어(古語)들이 풀이를 방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위씨들은 다들 이걸 익히는 건가?"
"성혈위가(聖血魏家)를 이야기하는 거라면, 그렇죠."
"언제부터 익히지?"
"보통 삼재공을 좀 트면 바로 익히기 시작하죠. 무재가 있으면 삼재공을 생략하기도 하고요. 저는 8살에 입공했어요."
"가능하다면 최대한 어릴 때부터 익힌다?"
"그쵸. 파천신공을 대성하면 차기 천마가 되는 건 따놓은 당상인데 조금이라도 어릴 때부터 익혀야 가능성이 생기지 않겠어요?"
"그럼 다른 무공은 익히지 않는 건가?"
"삼재공은 기본으로 익히는 거고, 보통 외가의 무공을 함께 배우기도 하지만 주로 노력을 쏟는 것은 파천신공이죠."
"흠."
나는 잠시 다른 무공에 대한 확실한 기반 없이 파천신공을 익히는 경우를 상상해보았다.
상상이 잘 안 되었다. 나는 기본기부터 착실히 익힌 삼재종합공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 다시 파천신공을 일독했다. 최대한 다른 무공의 기반이 없다고 상상하면서.
"……말이 안 되는데."
"뭐가요?"
"이건 8살짜리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아니, 익히면 안 되는 무공이다."
"제가 천재라서 그런 거 아니에요?"
"천재와 둔재를 불문하고 그렇다. 그 나이에 여태 절정인 것을 천재라고 불러주기 뭐한 것은 별개로 하고."
위옥은 입을 열다가 다시 닫았다. 말은 않았으나 입술이 삐쭉 튀어나왔다.
뭐 어쩌겠나. 위옥 또래에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자가 내 주변에만 이신과 도하나 두 명이 있었다. 위옥의 눈앞에는 소년화경이 있었고.
"파천신공은 그냥 상승 무공이 아니다. 초상승 무공이지."
"초상승. 좋은 거 아니에요? 과연 파천신공. 원래 대단한 건 알았지만 인정받으니 또 기분이 좋네요."
"물론 좋은 거지. 대단한 거고."
나는 파천신공의 흐름과 내용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난해한 구성 속에서 이어지는 맥을 파악하려 했다. 전체적인 가닥이 잡힐 듯 말듯 아른거렸다.
"이미 완성된 무인이 익힌다면 말이다."
"네?"
"초상승의 무공이란 초상승의 무인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마땅한 기반이 없는 채로 익혀봐야 오색 빛깔 모래로 지은 성이 될 뿐이다. 겉으로는 반짝이나 실속이 없는 것이지."
"……네?"
"빠른 길이 가장 멀리 가는 길은 아니다. 파천신공부터 익히고도 화경이 된 역대 천마들이 경이로울 지경이군."
위옥은 입을 떡 벌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마침내 파천신공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정리했다.
폭포수처럼 끊임없이 쏟아지는 상승 무리. 거기다 뇌기라는 제어 난이도가 극악한 기운을 다루는 무공이었다.
다른 무공으로 기초를 쌓지 않고 익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좋지 못한 영향을 줄 터.
그리고 사이사이에 엮인 초대 천마의 인간관과 그가 그렸던 올바른 제왕의 상, 그리고 편린을 통해 내게 전했던 말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파천신공은 천마가 되기 위한 지망생들을 위한 무공이 아니다. 차라리 당대의 마교주를 위해 준비된 천마 교본에 가깝다."
***
"다시 한번 말해보게. 뭐라고?"
위천량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고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2주간 알게 된 것은 위천량이 체면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허례허식을 멀리하는 실리파의 수장다웠다.
덕분에 나도 해야 할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파천신공을 익히는 건 멍청한 짓이랬소."
위천량은 표정없는 얼굴로 목을 좌우로 꺾더니 자세를 바로 했다.
"난 자네가 좋아."
"그렇군. 미안하지만 난 남자는 별로요."
"……그런 말이 아니네. 젠장. 설령 진짜로 그렇다 한들 딸내미 앞에서 아비가 대놓고 그런 말을 하겠는가?"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 줄로 알았지. 실리파잖소. 빠르고 간결한 고백……."
"그쯤하고 닥치게."
"알겠소."
"김산이라는 인간 자체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만, 방금 발언은 그냥 넘어갈 수 없네. 검을 잡을 때부터 파천신공을 익히기 시작한 역대 천마들을 모조리 모욕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설명할 수 있소."
"그래야지. 그러지 못하면 죽을 테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없었다면 위옥에게만 말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파천신공은 익히기가 어려운 무공이오."
"알고 있네."
"뇌기 자체가 다스리기 어려운 기운일뿐더러 뇌공을 포함해 검공과 보법에 담겨 있는 일절의 무리 역시 경이로울 정도로 복잡하고 섬세하오."
"계속."
"헌데 그 무리를 설명하기 위해 나오는 표현들을 모두 만들어냈겠소? 그렇지 않소. 당시의 상승 무공들에 있던 경지와 단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소. 즉, 상승 무공을 이미 익힌 자들을 위해 준비된 무공이라는 것이오. 고어라서 알아보기는 힘들었겠지만."
"……뭐라고?"
"그런데 고어로 된 그 표현들을 지금 쓰는 말로 치환하면 뜻하는 바를 알기가 어렵지 않지."
"……왜지?"
"예전에는 무공의 입문이 어려웠소. 아무나 익힐 수도 없었고. 기를 느끼기 위해 몇 주에서 몇 달을 투자해야 했고, 내공을 모으고 실제로 사용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소. 그간 이론과 기반을 준비할 수 있었지. 파천신공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오. 그런데 한 천재가 나타났소. 그리고 세상을 바꿔버렸지."
"……천재?"
"그렇소. 듣자하니 현대에 들어서 딩대 천마와 지망생들의 파천신공 성취가 급격하게 떨어졌다는군.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쯤이오?"
"전후(戰後)다."
불현듯 맥락을 깨달은 위천량의 동공이 커졌다.
"……검신(劍神, God of sword)."
"그렇소. 삼재종합공이 등장하면서 틀이 채 갖춰지기도 전에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되었소. 그리고 위씨들은 충분한 준비를 하지도 못한 채 파천신공을 익히기 시작했겠지. 더하기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이가 고등 수학을 익히듯이."
"무공 입문이 너무 쉬워졌기에 상승 무공에 대한 이해가 오히려 어려워졌다?"
"그렇소. 물론 파천신공 자체가 난해한 무공인 것도 한몫했겠지만 말이오."
위천량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에 잠겼다.
"파천신공에 적합한 인재를 찾기 위해 무공을 공개했다지. 누구나 익힐 수 있도록 했고 말이오.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아주 멍청한 짓이었소."
"그럼 파천신공은……."
"사실상 당대의 천마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봐야겠지. 그래야 무공이 아닌 부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소. 그러니 어린아이가 뜻을 구결과 흐름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지."
"……그렇군."
위천량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나를 향해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이와 같은 사실을 단번에 알았지? 고작 2주 정도 여기 있지 않았나."
"나는 무공광(武功狂)이오. 굳이 말을 붙인다면 무학자(武學子)라고 할 수도 있겠지. 수많은 무공을 접하고 분석해왔소. 무인으로서도 경지에 오른 유일한 무학자라고 해도 좋소. 그럼에도 파천신공의 맥락을 읽는 것은 아주 어려웠지."
"그럼 어떻게?"
"저번에 말했지 않소. 초대 천마를 만났다고. 그 경험이 없었으면 나도 파천신공의 의의를 파악하기 힘들었을 거요."
위천량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공식적인 이야기 아니었나?"
"비공식적인 이야기요. 편린, 알아봤소?"
위천량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대로 알아보시오."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