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87화 (87/120)

< 87 : 86. 파천혼원단(Cosmos breaker pill) >

"……일월파. 그러니까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지? 일월신교 교도가 아니라 천마신교 본단의 무인인데."

"예. 벽력자시여."

이제는 별호에 대해 말하기도 입이 아플 지경이라 그냥 넘어갔다. 그들이 나를 부를 명칭이 애매하기도 했고.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이 정도면 다른 종파 수준이 아니고 그냥 이단 아닌가?"

"본래라면 그렇게 처리되었겠지만 말했다시피 현재 일월신교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는 중이니까요. 물론 일월파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교내에서 겉도는 중이기는 해요."

"저희는 견딜 수 있습니다. 벽력자시여."

"아, 그렇소……. 그, 참으로 고맙소."

1호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보아온바, 독한 종교인들은 어쩐지 고난과 박해를 꽤 즐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근본파를 호위로 세우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걱정은 마세요."

"혹시 몰라서 물어본 거다. 초절정 둘이 코앞에 있는데 그 정도는 확인해야지."

"저희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벽력자 대협의 안위를 지키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2호가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감 있게 외쳤다.

근데 진짜로 나를 담그려는 사람이 있으면 최소 화경이 찾아오지 않을까? 아니면 초절정 이단 사냥꾼들이 개떼처럼 몰려들 수도 있고.

그래도 일단 마음은 고마웠다.

"그래, 앞으로 잘들 부탁하겠소."

"저희야말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요리부터 호위까지 다 맡겨주십시오!"

아, 이 사람들이 요리까지 하는구나.

하긴 호위가 일월파면 뭐하겠나. 요리사가 근본파면 식사 시간에 골로 가는 가지.

물론 내가 천마의 초대장을 받고 이곳에 온 이상 함부로 수를 쓰지는 않겠으나 광신도들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럼 슬슬 들어갑시다."

"……네?"

"호위가 여기를 지켜서 뭐하겠소. 암살자가 대문으로 들어올 것도 아니고. 저택도 넓어 보이는데 대문 잠그고 안에 있읍시다. 안 그래도 덥고 볕도 따가운 동네인데. 안에 에어컨은 되나?"

"그래도 됩니까?"

"물론."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정말 인물은 인물이군요."

우리는 얼떨떨한 일월파 두 명을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넓고 쾌적했다. 3층으로 구성된 저택이었는데 1층엔 거실과 부엌이 있었다. 위는 침실인 듯했다. 이미 시원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할아버지는 어차피 한서불침이시잖아요."

"한서불침이면 찝찝한 공기가 안 찝찝해진대? 화경 나부랭이가 대기 중 습도까지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잖아."

위옥은 대답도 않고 질색이라는 얼굴로 도하나에게 말했다.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전 괜찮아요."

도하나는 하하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넌 여기까지 왜 온 거야?"

"네?"

나는 위옥의 눈을 보았다. 중도파인지 실리파인지 모르는 파천신공의 후계자.

"소천마의 꿈이 천마신교 본단 가이드는 아닐 거고. 안내를 계속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아, 뭐. 그렇죠. 처음에 얘기한 거랑 같아요. 나 파천신공 좀 가르쳐줘요."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몸을 회복하고 날짜를 따로 잡도록 하지."

"그래요. 천천히 기다리죠."

그리 말하면서 위옥을 캐리어를 구석에 내려두었다.

"그럼 전 좀 쉬러 갈게요. 점심시간에 봐요."

그러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2층으로 가고 있었다.

"잠깐. 정지."

"네? 왜요?"

"……왜 그리로 가는 건데?"

"아, 말 안 했나? 저도 여기서 살 건데요? 제가 3층 쓸 테니까 할아버지랑 도사님은 2층 쓰세요."

"……방년의 천마신교 소교주가 외간남자 집에서 살겠다고?"

"외간남자 집이라뇨. 여기 내 집인데."

"……뭐?"

"여기 혈족 전용 게스트 하우스예요. 성혈의 피를 이은 사람이라곤 아빠하고 나밖에 없으니까 사실상 내 집이죠. 아, 이제 할아버지가 추가됐지만. 아니, 그래도 할아버지는 혈족이라고 하긴 좀 애매한가. 공식적으로는 정신적인 피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까."

"어."

나는 순간 벙쪘다.

"그리고 여도사님도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아무튼 저는 좀 쉬러 갈게요. 한국까지 당일치기로 갔다 오니 좀 피곤해서."

"편히 쉬십시오!"

"그래. 너희도 고생해."

우렁찬 1, 2호의 인사를 들으며 위옥은 계단 위로 사라졌다.

근데 외간남자가 소교주의 집에 오나 소교주가 외간남자 집에 가나 거기서 거기인 문제 아닌가?

"……우리도 이만 올라가자."

"네, 사형!"

호위들을 두고 2층으로 올라가니 객실이 4개 정도 되었다. 나는 구석 방을 쓰고 도하나는 그 옆방을 쓰기로 했다.

원한 있는 사람들을 피해 천마신교까지 왔지만 막상 와보니 내 생각보다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는데 나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교리에 따라 나를 미워하는 자들.

나도 도교의 수행자이지만 종교라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원래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요한 건 늘 그렇듯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였다.

단전을 최대한 빨리 회복해야 했다.

도하나에 1호와 2호가 추가되었지만 그래 봤자 초절정 셋에 불과했다.

손을 놓고 느긋하게 요양할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았다.

"호위를 부탁해."

"네, 사형."

도하나가 도를 패용한 채 방문 앞에 섰다.

나는 위천량에게 받은 약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보라색으로 빛나는 단약이 보였다.

파천혼원단.

파천(破天)은 하늘을 부수겠다는 의미이고 혼원(混元)은 우주 또는 천지를 의미한다. 한 마디로 하늘이고 우주고 다 부수겠다는 뜻이었다.

단약의 이름으로는 실로 과격했다.

그만큼 방대한 양의 양기를 머금고 있는 천마신교 특제 영약이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정파 3대 영약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 바로 아랫급으로 평가받는 물건. 귀한 만큼 효과가 뛰어났다.

주니까 먹기는 하겠는데 부담이 되긴 했다. 받은 만큼은 돌려줘야 할 것 아닌가.

기분이 내키면 공짜 점심은 있을 수 있지만 세상에 공짜 영약은 없는 법이다.

그래도 어긋난 단전을 재구성하는데 이 막대한 양기만큼 적당한 것이 없었다. 빚 좀 지면 어떤가. 따서 갚으면 되는 거지.

나는 눈을 감고 파천혼원단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알싸하고 쓴맛이 혀를 괴롭혔으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온 영약의 기운은 위장에 닿는 순간 녹아 흩어지기 시작했다.

곧장 막대한 자연지기가 기맥을 타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과연. 어떻게 역대 천마들이 뇌강을 팡팡 쏘아대고 다녔는지 알았다. 이런 영약을 필요한 만큼 먹을 수 있으니 내공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이 자연지기를 내기로 흡수할 공간도 능력도 없었다.

영약의 효과로 내공의 양을 늘리는 건 방법도 없었고 내 목적도 아니었다.

목표는 오직 단전의 재구성.

자연지기가 전신혈도를 일주천하는 동안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곧바로 자하신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자연지기가 자하신공의 구결에 따라 도인되었다.

많은 양의 양기가 용암처럼 흐르면서 기맥을 청소하면서 지나갔다. 찌그러진 혈도를 다시 펴고 뒤틀린 세맥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꽤 쓰라린 과정이었으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로운 일이었다. 망가진 부분은 차라리 도려내고 회복하는 게 더 빨랐다.

그러나 이조차 겸사겸사 얻은 부작용에 불과했다.

전신을 질주하는 양기는 나아갈 곳을 찾아 전신 세맥을 구석구석 떠돌다가 결국에는 단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뜨거웠다. 한서불침을 침범할 정도의 양기였다.

전신을 불태울 듯 달구는 양기를 단전에 모았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내공을 대신해 단전을 돌리기 시작했다.

단전이 어긋난 방향의 반대쪽으로. 즉, 역주행이었다.

속도는 느렸고 고통은 컸다. 내 것이 아닌 기운으로 단전을 헤집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기운이 잠시라도 통제에서 벗어나는 순간 주화입마가 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상황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기가 움직였다.

자하신공이 완벽하게 자연지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몸 안에서 뇌기가 꿈틀대며 끼어들었다.

그 양이 많지는 않았다. 나는 그 양을 고려해서 계산을 조정했다. 곧 흐름을 다시 통제하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조금씩 단전의 방향을 되돌렸다.

뚜둑.

이윽고 단전이 제자리를 찾았을 때.

"쿠웩!"

나는 피를 한 사발 토했다.

벌컥!

"사형!"

도하나가 기겁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달려왔다.

"괜찮아요?"

"……걱정 마라. 잘 된 거니까."

자연지기로 전신기맥을 찌르고 쑤시고 때리고 단전을 비틀고 돌렸는데 몸이 멀쩡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였다.

피 한 사발쯤 토한 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 시꺼먼 죽은 피를 토해내긴 했지만 아무튼 괜찮다.

몸을 회복하는 건 금방이니까. 단전을 회복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쉬운 일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내부를 관조했다. 이제야 단전으로부터 정상적으로 전신혈도를 통행하는 내공의 흐름을 확인했다.

며칠만 지나면 내공을 약간은 사용해도 괜찮을 것이다.

원래라면 최소 두어 달은 걸렸을 것을 단숨에 줄인 것이다.

아직 막 태어난 신생아처럼 유약한 상태였지만 자연적인 회복에 필요한 시간을 극단적으로 당긴 것을 감안하면 만족스러웠다.

"사형……?"

"왜. 잘 됐다니까."

"그게 아니고 머리 위에 꽃이……."

나는 앉은 채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했다. 내 정수리로부터 하얀색 기류가 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서서히 희미해지는 중이었다.

"왜, 뭐. 꽃 처음 봐?"

"……처음 보죠."

"너도 나중에 보게 될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는 처음이 아니었다. 화경이 될 때도 보았으니까.

삼화취정(三花聚?). 양기가 상단전까지 온전히 닿으면서 더 드높은 곳으로 뻗어 나가려고 하는 증거였다.

단전을 정상 상태로 돌리는 과정에서 신체가 처음 화경이 되었을 때와 비슷한 상태가 된 듯했다.

딱히 좋아할 것도 없었다. 28년분의 내공 이외엔 묶여있는 것은 똑같았으니까.

"무슨 일이에요!"

위층에서 위옥이 다다다다 달려왔다.

"왜, 뭐. 별일 없다."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아래층에 불이라도 난 줄 알고 달려왔잖아요. ……헐, 저거 뭐야? 머리 위에. 삼화취정?"

"너도 처음 보냐?"

"그럼 당연히 처음 보죠. 볼 일이 얼마나 있다고요. 대박 신기해."

그러간 말거나 나는 바닥에 쏟은 검은 피를 닦을 생각에 귀찮을 뿐이었다.

젠장, 옷에도 묻었네. 여기 올 때 몇 벌 챙겨오지도 않았는데.

"됐으니까 다 나가. 옷 갈아입게."

"네네."

여자애들을 쫓아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손을 펼쳤다.

뇌기가 찌릿거리고 있었다.

마음을 먹는 순간 움직였다. 이상할 정도로 쉽게 다스려졌다.

"이게 왜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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