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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86화 (86/120)

< 86 : 85. 십만대산(十萬大山, The hundred thousand mountain)(3) >

위옥이 검룡과 여도를 데리고 떠난 교주전은 조용했다.

아직 치우지 않은 식탁에는 위천량만이 앉아 턱을 괴고 고민에 잠겨 있었다.

문득 시선을 위로 올린 위천량이 맞은편에 서 있던 철난에게 말했다.

"앉지."

"예."

철난 이원호는 고아한 동작으로 자리에 앉았다. 과연 난이라는 별호를 받을 만한 몸가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위천량은 맨손으로 식은 음식을 몇 점 주워 먹었다.

"식어도 먹을 만하군."

"그렇습니까?"

"아까부터 먹고 싶었는데 밥 먹는데 격식까지 차리려니 귀찮더라고. 그래도 명색이 천마인데 손님과 옥아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나. 나쁜 물이 들라."

으적으적.

위천량은 아까의 고상한 젓가락질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투박한 동작으로 뼈를 발라 먹었다.

"그 부분은 이미 유전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응? 뭐라고?"

"소교주님은 음, 격식을 중시하지 않는 분입니다. 교주님만큼…… 손도 잘 쓰시고요."

"이런 젠장. 괜히 격식 차렸군. 하긴 내가 누구에게 배워서 이렇게 된 건 아니었지."

"성혈(聖血)의 피는 진하니까요."

위천량이 코웃음을 치며 기름기 묻은 손을 내저었다.

"흥. 성혈은 무슨. 고귀한 피가 따로 있나. 성혈은 희다던가? 내가 경험해보니 살갗 갈라지면 붉게 흐르는 건 똥개나 천마나 다 똑같더군."

"……그 말을 원리주의자들이 들었으면 거품을 물었을 겁니다."

"하, 그 책상물림들? 내가 형제 자매들을 쳐죽일 때 그치들은 뭐하고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하군. 고귀한 피를 최대한 살려서 널리 퍼트리자고 간언했어야지."

"그랬다간 교주님이 목을 치셨겠지요."

"그래. 근데 요즘 들어 슬금슬금 기어오르고 있지 않나. 내가 우습게 보이는 건지."

위천량은 투덜거리면서 기름이 번들거리는 고기 위주로 몇 점 더 집어먹었다.

다 먹었을 때쯤 시종이 손수건을 갖다 주었다.

손을 닦은 위천량은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이원호에게 물었다.

"그는 어떻던가?"

"그 말씀이십니까."

"그래. 재림천마, 검룡, 벽력자. 명칭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내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어떤 인물인지가 중요하겠지요."

"그래. 난 맛있기만 하면 식은 음식을 맨손으로도 주워 먹는 사람이네."

45대 천마 뇌절 위천량.

그는 철저한 실리주의자였다.

천마는 철저하게 검룡의 실리적 가치를 묻고 있었다.

능력은 어떤지. 뇌정벽력에 대한 소문은 사실인지. 성정은 어떤지. 포섭할 수 있는지. 불가능하다면 제거할 수 있는지.

정사(正邪)와 나이, 신분을 불문한 객관적인 가치.

철난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옆에서 직접 본 모습부터, 세간의 평판, 현지 여론, 병문안을 온 지인 관계까지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서 정리했다.

위천량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 역시 김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유능한 수하와 시선을 비교하는 것은 위천량의 오래된 취미 중 하나였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있을 만큼 믿음직한 수하라면 더더욱 좋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위천량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대천마신교의 암각주(暗閣主)가 직접 관찰하고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가?"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인물입니다."

위천량이 턱을 한 차례 까딱였다.

"어디 얘기해보게."

"정황으로 보아 8년 전 내공을 잃은 것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복구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것만 해도 입지전적인 행보인데 복구한 무공을 쓰는 방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계속."

"공명심이 있는 듯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협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몸가짐에서 정파 엘리트 특유의 고지식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화산파를 떠나 낭인 행세를 하는 것도 그렇고, 이번 일월신교 건 역시 정상적인 정파 무인이라면 생각도 못 할 해결 방식이었습니다."

"그거야 그렇지. 명성 높은 정파 무림의 명사가 천마를 자칭할 줄이야. 난 꿈에서도 이런 장면은 못 봤네."

"한 마디로 목적은 정도(正道)를 향하면서도 방식은 정사지간에 가깝습니다. 객관적인 무력은 화경 사이에서 비할 바가 없는 수준입니다."

"나랑 비교하면?"

"소문의 뇌정벽력을 다룰 수 있는 수준까지 몸이 회복되면 교주님을 상대로 확실히 우위에 설 것입니다."

"그럼 죽여야 한다면 지금이 적기겠군."

"그렇습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이 최선입니다. 회복 속도가 경이로울 정도로 빠릅니다."

"흠."

위천량이 턱을 쓰다듬었다.

"죽이는 게 우리에게 이득일까?"

"향후 100년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놔두면 정파의 천하제일인이 될 거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위천량은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여기까지 내가 직접 부른 이상 명분이 없단 말이야. 자네도 알겠지만 보이는 게 실리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들이 있단 말이지. 뇌정벽력은 어떤가? 그거 진짜인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거짓이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현재는 내공을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보입니다. 영상에서의 뇌정벽력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단전이 과부하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긴 그래야 이치에 맞지. 안 그러면 파천신공만 30년 넘게 익힌 내가 억울해서 잠도 안 올 거 같네."

위천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러자 시종이 정리할 자를 부르러 밖으로 갔다.

"좌사."

"예, 교주님."

"자네는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죽이기는 부담스럽고 적으로 두기엔 껄끄럽습니다. 친구로 삼는 게 최선입니다."

"내 생각도 비슷하네. 친구가 되는 게 낫지."

위천량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화산검룡이 얻은 파천신공에 대한 심득은 무조건 우리가 얻어내야 해. 누가 깨우쳤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정파의 도사가 얻은 심득 역시 파천신공에 대한 심득이기 때문이다. 갖가지 심득을 모아 교조의 파천신공을 더 잘 해석하기 위해서 신공을 세간에 보급한 것이다. 그러니 그와 친구가 되어서 심득을 전수받는 것이 교리와도 맞다."

"친구가 될 방법을 찾겠습니다."

"그래. 자세히 알아보게. 아, 그 검룡패라는 건 더 구할 수 없나? 애초에 어디서 얻은 건가?"

"전대 교주님께서 화산검선에게 선물 받은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귀한 걸 일월마군에게 팔아치웠어? 대체 누가 그랬나?"

"교주님께서 중요한 건 도리가 아니라 실질적 가치라면서 직접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예."

"……그랬군. 알겠네. 이만 나가보게. 슬슬 아침 회의 시간이군."

"저도 회의에 참석합니다만."

"…….알겠으니까 좀 나갔다가 그때 다시 오라고. 바람이라도 좀 쐬고. 어?"

***

위옥을 따라 교주전을 나가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거기……."

걸어가는데 마혈을 당한 교주전 문지기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정신을 차렸구나."

"……장 대협."

문지기는 몸은 아직 점혈이 풀리지 않았는지 벽에 기댄 채 눈만 뜨고 입만 간신히 움직였다.

"……나는 당신을 인정하지 않소."

그게 무슨 예비 사위한테 호통치는 장인어른 같은 멘트야?

"뭐래? 네가 인정 안 하면 어쩌려고."

"교조님이 이렇게 무례한 정파인일 리가 없……!"

나는 시끄럽게 떠드는 문지기의 마혈을 한 번 더 푹 찔러줬다.

툭.

문지기는 다시 벽에 고개를 처박았다.

"……죽인 건 아니죠?"

"도사가 살생을 쉽게 하는 줄 아느냐."

"할아버지가 일월마군을 전기구이로 만드셨잖아요. 노릇노릇하게."

"……꼭 그렇게 표현을 섬뜩하게 해야 해? 그리고 그건 생사결이었다. 말 좀 험하게 하는 애송이와 나를 죽이려는 동격의 고수는 경우가 다르지."

"그렇군요."

우리는 위옥을 따라 천마신교 본단을 가로질렀다.

천마신교 본단에는 당연히 교주전 외에도 여러가지 건물들이 있었다. 나는 오래된 양식을 흥미롭게 구경하며 느긋하게 걸었다.

"그나저나 저자는 무슨 말을 하는 거였냐? 인정?"

"쉽게 말하자면 할아버지의 존재가 이슈가 되고 있다는 거죠."

"존재 자체가 이슈라니. 무슨 복제 인간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군."

"비슷하잖아요. 할아버지는 초대 천마를 자칭하고 있으니."

아, 그렇지. 공식적으로 나는 초대 천마의 재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복제 인간보다도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그래서 내 어떤 모습에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이 많은데?"

"일단 교도 중에서 할아버지가 재림천마라는 점을 인정하는 점은 아주 소수예요."

"역시 그런가?"

하긴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재림천마 같은 단어를 믿을 리가 없다.

오히려 소수라도 있다는 점에 놀라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파천신공에 있어 놀라운 성취를 보인 것은 사실이잖아요."

"놀랍긴 하지."

"그러니 공식적으로 성인(聖人)으로 인정해주고 회유해서 가르침을 얻자는 실리파와, 존재 자체가 교리에 어긋나니 어서 잡아 죽여야 한다는 근본파가 할아버지의 존재를 두고 대립하고 있어요."

"……뭐라고?"

"원로부터 시작해서 평신도까지 각자의 신념을 토대로 할아버지를 두고 싸우고 있죠."

"……그런 살벌한 대립이 있었다고? 음, 나는 실리파 쪽 의견이 좀 합리적인 거 같은데? 요즘 같은 시대에 구시대적 이단 사냥을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해."

"교리에 합리와 이성을 따지는 사람들은 애초에 근본파에 있지도 않죠. 교리 자체만을 준수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이단사냥꾼 같은 자들이 거기 있어요."

"난 걔들 별로더라."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파괴하기 위한 무력대라니 존재 자체가 구시대적이었다. 원래도 이미지가 별로였는데 오늘 더 나빠졌다.

"그래서 넌 둘 중 어느 쪽인데?"

"아빠와 저는 할아버지를 여기까지 데려온 장본인인데 어느 쪽이겠어요?"

"하긴."

"근데 일단 얻을 건 얻고 죽여버리자는 중도파도 있긴 해요."

"……."

"농담이에요."

위옥을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 얼굴을 마주했다.

요양을 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어쩐지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길을 따라 걸어 도착한 곳은 작은 마을에서도 구석에 있는 저택이었다.

근처에 폭포를 끼고 있었고 마당이 넓어 분위기 좋은 휴양지처럼 보였다. 아주 습했지만.

대문 앞에는 허리춤에 칼을 찬 남녀가 서 있었다. 경지는 둘 다 초절정.

"여기서 머무시면 돼요. 이분들이 당분간 호위 역할을 해주실 거예요. 웬만하면 필요한 일이 없겠지만요."

"반갑습니다."

남녀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도 만나서 반갑소. 뭐라고 부르면 되지?"

"그냥 1호, 2호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래, 1, 2호 친구들. 초면에 실례지만 내가 중요한 질문 하나 하겠네."

"예."

남녀는 동글동글한 눈동자를 맑게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은 근본파야? 아니면 실리파야? 중도파까지는 일단 괜찮으니까 제발 근본파라고는 하지는 마."

"아, 저희는……."

남녀는 수줍게 웃었다.

"일월파입니다."

"……뭔 파?"

옆을 보니 위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호위로 우리 사람을 붙이는데 그 정도도 확인하지 않았겠어요?"

"혹시 몰라서. 근데 일월파는 뭔데?"

"뭐긴 뭐예요. 아까 말했던 소수."

"소수? 아."

1호와 2호는 아주 영광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림천마의 존재를 믿는 소수 종파. 그게 일월파예요."

내 신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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