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 84. 십만대산(十萬大山, The hundred thousand mountain)(2) >
제45대 천마 위천량.
세간의 평가를 빌리자면 '화경 위의 화경'으로 불리는 자.
당대 천마의 업과 격을 두르고 영약과 신공으로 쌓아올린 방대한 내공을 숨 쉬는 것처럼 쉽게 다룬다 하였다.
근 백 년 안에서는 파천신공으로 최고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얻은 별호가 '뇌절(雷絶, Ace of thunder).'
뇌강을 수족처럼 다루는 자였다.
내공을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여기 있는 게 맹수 앞에 맨몸으로 서 있는 거나 다를 게 없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위험은 감안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으니까.
칼로 밥벌이하는 이라면 언제나 마음속에 유서를 품고 사는 법이다.
위천량으로부터 뻗어오는 찌릿하고 강대한 기세를 느끼면서도 나는 대응하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고개를 돌려 교주전을 한 번 훑고 마지막으로 위천량을 다시 보았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라……."
위천량은 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제 딸내미와 똑 닮은 미소였다.
기생오라비 천마까지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피가 참 진한 집안이었다.
펄럭.
위천량이 기세를 더 강하게 일으키자 그가 입고 있는 긴 장포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명백한 위협이었다.
"그건 내 선조로서 하는 말인가? 검선의 제자로서 하는 말인가?"
재림한 초대 천마로서 교주전에 돌아온 소회를 말하는 것인지, 스승님의 장례식에서 스쳐 지나간 상주와 객으로 인사하는 것인지를 묻는 말이었다.
물론 내가 할 답은 정해져 있었다.
"흠. 그거 공식적인 질문이오?"
"……."
잠시 대화가 멈췄다.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만 교주전에 가득 찼다.
"풉!"
적막을 깨트린 것은 소녀의 웃음소리였다.
소리가 난 곳을 보니 슬쩍 위옥이 토끼 눈을 한 채 입을 가리고 있었다.
시선이 몰리자 위옥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왜요?"
"입꼬리가 아직 꿈틀거리고 있다."
"아, 씨."
위천량이 대화를 잠시 지켜보더니 돌아가는 꼴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딸아이가 이미 비슷한 질문을 했던 모양이군."
"그렇소."
"그럼 질문의 대답도 대충 들은 것 같군."
"예상하는 대로일 거요."
그제야 교주전을 가득 메운 천마의 기세가 잠잠해졌다.
위천량이 히죽 웃었다. 그리고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천마신교에 온 것을 환영하네, 벽력자."
"반갑소. 교주."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헌데 그 별호는 좀 별로군."
"왜지? 강호인이라는 것들은 늘 새로운 별호에 목말라하는 종자들 아니었던가? 불러주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무슨 폭탄마 항공기 테러리스트 같은 별호잖소."
위천량을 고개를 주억거렸다.
"걱정하지 말게. 항공사 직원들과 고객들은 진짜 폭탄마 테러리스트보다도 자네를 더 두려워할 테니.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내가 괜히 전용기를 타고 다니겠나? 사람들이 나랑 한 비행기 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
뇌절의 경험담을 들으며 잠시 내가 여객기를 탔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봤다. 물론 몸 상태가 회복되었을 때를 기준으로 말이다.
"……."
솔직히 여객기 하나 추락시키는 거야 마음만 먹으면 검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전기를 다루는 게 좀 더 와 닿을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난 별로요. 벽력이라니. 사납고 거칠지 않소. 도가의 수행자가 가질 법한 별호는 아니오."
"재림천마보다는 그럴듯한 편 아닌가?"
"……입담으로 천마가 되셨소?"
"도움이 된 걸 부정하지는 않겠네. 형제자매들 중에서 내가 제일 뛰어났지. 입담뿐만 아니라 수담(手談)까지 말일세."
수담은 보통 바둑 솜씨를 이야기하는 단어였지만 지금 위천량이 말하는 것은 칼 솜씨인 듯했다. 아니면 주먹이거나 아무튼.
"그나저나 배가 고프다 했나? 바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나누자고."
"그게 여기까지 들렸소? 나이에 비해 귀가 밝은 편이신가 보군."
"달린 것에 비하면 귀가 많은 편일세."
위천량은 귓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천마의 사람이 아주 많다는 뜻이었다. 하긴 이곳은 십만대산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위천량이 손짓을 하자 구석에서 뭔가를 쓰고 있던 교도 하나가 다가왔다.
다른 사람을 다 물리고도 유일하게 남아 있던 자.
시종을 겸하는 교주전의 사관(史官)으로 보였다. 기세가 은밀해서 느끼기 힘들었으나 경지가 최소 초절정은 되는 것 같았다.
"객에게 대접할 식사를 내오거라."
"예, 교주님."
시종은 쪼르르 사라지더니 이윽고 교주전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음식을 차례차례 들여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음식을 가져온 자들은 곧장 사라지고 처음부터 있던 시종 하나만 교주전에 남았다.
"들지."
"잘 먹겠소."
나는 바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몸을 온전히 회복한 이상 도하나도 더는 나를 말릴 수 없었다.
휠체어에 의지하던 그때의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음식 종류가 이것저것 많았다. 보아하니 전용기에서 도하나가 먹던 것과 비슷한 것들도 꽤 있었다.
그 친구들이 맞다면 참 오밤중부터 새벽까지 고생이 많다.
위옥도 곧 내 곁에 앉았다. 도하나는 내 뒤에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철난이 서 있었다.
이윽고 교주가 내 맞은편에 앉더니 도하나를 보며 물었다.
"여도(女道)는 들지 않는가?"
"저는 괜찮아요. 이미 식사를 했거든요."
물론 도하나라면 음식을 더 먹으려면 먹을 수야 있었겠으나 내 호위를 할 겸 철난과 위치를 맞춘 것이었다.
"그런가? 아주 잘 먹는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는 아닌가 보군."
위천량은 약간 소름 끼치는 말을 하고는 젓가락은 고상하게 움직여 고기를 몇 점 먹었다.
"일단은 여기까지 와준 것에 대해 재림천마이자 일월신교 교주이자 벽력자인 화산검룡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네."
"보약 좀 챙겨준다길래 왔지."
"파천혼원단 말인가? 하나 내어주도록 하지."
위천량은 다시 사관을 불러 파천혼원단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사관은 밖으로 나가더니 오래지 않아 단약이 담긴 조그마한 약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상자를 열기도 전에 안에서부터 생기(生氣)가 느껴졌다.
위천량은 상자째로 내게 툭 건넸다.
"……이렇게 쉽게 줘도 되는 거요?"
"천마까지 되어서 객을 부르는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나. 자네로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온 것인데 마땅한 대가는 치러야지."
"뭐 기왕 받은 거 잘 쓰겠소."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몇 가지 이야기를 좀 하고 싶군."
위천량은 음식을 몇 점 들지도 않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딱히 기세를 피워올리지 않아도 눈빛이 형형했다.
내공이 넘쳐나는 화경. 먹지 않아도 생을 이어갈 수 있는 경지였다. 도락(道樂)이 아니라면 음식을 먹을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먹는 걸 좋아했다.
내공 호흡으로 연명할 수 있다고 해도 음식으로 열량을 얻는 방식은 여전히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만찬을 골고루 먹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어디 말해보시오."
"일단 일월마군 관련해서는 사과를 하고 싶군. 존재를 몰랐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겠지만 일월신교가 그만큼이나 규모를 키워나가고 있을 줄은 몰랐네. 알다시피 한국은 천마신교의 영향력이 적은 국가이니 말이야."
"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소."
"그것도 그렇군. 물론 일월신교의 피해자들을 돕는 일은 교에서 최대한 지원할걸세. 허나 자네에게도 사과할 이유가 있네. 검룡패는 원래 교의 보고에 있던 물건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일월신교가 패를 얻어온 것이 천마신교 본단의 비고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그랬었지. 그게 어떻게 일월신교까지 넘어간 거요?"
"원래 보물은 비싼 값을 치르는 자에게 팔리는 걸세. 비고에 먼지 쌓이게 둘 수만은 없는 일이지 않나. 일월마군은 반쪽짜리 화경 하나를 고용할 수 있는 패를 얻기 위해 몹시 비싼 값을 치렀고."
위천량은 어느새 시종이 들고 온 차를 마시고 있었다. 향은 옅었으나 은은하고 달았다. 철관음이었다.
"물론 자네가 뇌정벽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인 줄 알았다면 결코 검룡패를 내어주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그랬다면 내가 파천신공을 익힐 일도 없었지 않겠소?"
"그래. 그래서 세상사가 재밌는 것이지. 일월마군은 아주 값싸게 자네를 고용했는데 그 결과가 자신의 파멸이었으니. 결국을 익힐 일도 없었던 파천신공을 익힌 도사만 남아있으니."
"본론이 뭐요?"
"일월신교의 교주에게 묻고 싶네. 앞으로 일월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얼떨결에 교주가 되었지만 그에 대해선 나도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나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일단 커피 좀 주시오. 콜드 브루로."
"그런 건 없네. 있는 건 동양 차뿐이네."
"……음식은 일식, 양식, 한식 다 있으면서 왜 차는 중식뿐이오?"
"단순히 내 취향이네. 차(茶)가 교의 주요 사업이기도 하고 말이야.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 동네에서 꽤 괜찮은 찻잎을 생산하고 있지.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물건이 교주전으로 온다네."
"……괜찮은 걸로 아무거나 내어주시오."
"용정은 어떤가?"
용정은 어쩐지 꺼림칙해서 별로였다. 이제는 그냥 용정을 먹어도 독을 마시는 기분이란 말이지.
"……그냥 교주께서 드시고 있는 것과 같은 철관음으로 주시오."
"보기보다 입맛이 까다롭군."
나는 곧바로 시종에게 차를 받았다. 실제로 받아보니 생각보다 향이 더 좋았다.
"괜찮군."
"괜찮아야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비싼 찻잎인데 말이야."
"……."
그 말에 나는 기침을 할 뻔하다가 간신히 삼켰다.
"천마신교가 돈이 많긴 많은가 보군."
"부럽나? 그래서 일월신교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나는 차를 내려놓고 천마의 질문에 답했다.
"헌금은 완전히 자율적으로 내게 할 거고, 모인 돈은 가난한 자를 위해 쓸 거요. 힘든 이들을 도울 거고 그 과정에서 쓰레기들이 욕심을 낸다면 쳐내겠소."
"믿음을 팔아 돈 긁어모으기는 글렀군."
"글렀지."
"종교를 유지할 수가 없는 구조야. 일월신교는 몇 년이 지나면 사라지겠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돈 욕심은 없나?"
"없진 않은데 그 정도 채울 만큼은 벌고 있소."
"진짜 교조가 재림했어도 자네와 비슷하게 답했을 거 같긴 하군. 이건 공식적인 답변인가 비공식적인 답변인가?"
"둘 다요."
"멋지군. 일월마군이 자네 같았으면 좀 무서웠겠어. 곧 소멸할 종교의 교주라니 친구가 될 수 있겠군."
위천량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일월마군을 잘 아시오?"
"한때 동고동락했었지. 끝은 좋지 않았지만."
그러더니 위천량은 시계를 잠깐 보고는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묻고 싶은 건 그게 다요?"
"아니. 할 말은 끝이 없지. 하지만 오늘 쓸 수 있는 시간은 끝났네. 워낙 바쁜 몸이거든. 장로들 눈치도 많이 봐야 되고. 지금도 아침 식사 시간을 땡겨 쓴 거지. 다음에 또 자리를 마련하겠네. 편히 요양하게."
천마의 축객령. 다음 만남에 기약이 없었는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나도 질문이 하나 있소."
시종이 나를 밖으로 인도하려 했으나 위천량이 손으로 제지했다.
"뭔가?"
"초대 천마를 본 적 있소?"
"……무슨 말이지? 지금 자네가 보이냐는 뜻인가? 지금 예의 그…… 공식적인 상태인가?"
"아니, 비공식적으로 묻는 거요. 어느 날 꿈에서 초대 천마를 보았다던가, 그 편린을 보았다던가. 경험이 없다면 그런 기록 같은 것은 없소?"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없네. 좀…… 당황스럽군."
"……그런가. 알겠소."
모른다면 확실히 이해하기 힘든 질문이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천마신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도 모른다면 어디에 물어봐야 한다는 말인가.
"기록은 있다면 찾아보도록 하지. 나중에 자리를 마련하지."
위천량의 축객령을 뒤로 하고 우리는 교주전을 나섰다.
철난은 교주전에 남았다.
위옥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우리를 밖으로 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