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 82. 천마를 보았다(Seeing chosen one)(3) >
태연하게 전용기를 언급하는 소천마 꼬맹이에게 물었다.
"그 전용기는 지금 어딨는데?"
"김해 공항에 있죠. 승무원들까지 다 우리 사람이니까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어요."
우리라 함은 아마 천마신교의 교도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지금 당장에라도."
위옥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간다면 지금 당장 출발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병가는 짧게 쓸수록 상사에게 눈치가 덜 보이는 법이니까.
요양 자체는 피치 못할 문제였다. 기왕 파천혼원단을 받는 거라면 빨리 취할수록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좋다. 내가 의식을 차린 소식도 슬슬 알려졌을 거니 내일부턴 여기도 시끄럽겠지. 그렇다면 마냥 편하게 쉬지도 못할 거고. 지금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럼? 지금 바로 비행기 대기시켜요?"
"그래."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곱씹어보니 참으로 대단한 재력이었다.
화산파도 가난하지는 않았다. 구대문파라고 불리는 동양의 최대 문파 중 하나였으니.
그러나 전용기를 운용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위옥이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동안 나는 당초아에게 잠시 요양을 갔다 오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잠시 중국에서 몸조리 좀 하고 오겠습니다」
밤에는 업무 연락을 안 하는 것이 예의지만 떠나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당초아 역시 바로 답을 해주었다.
하긴 아직 잘 시간은 아니지. 원래 재벌의 일원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법이다.
「아, 대륙이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당가에서도 잘 챙겨 드릴 수 있는데. 가신다고 결정하셨으면 제가 말릴 수는 없죠. 학교는 걱정하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감사합니다. 돌아올 때 선물 사올게요」
「ㅋㅋㅋ 기대할게요」
실제로 십만대산에는 유명한 특산품들이 꽤 있다.
그 중 당초아가 좋아할 만한 게 있을 것이다. 십만대산에서만 나는 독초라든지, 천마신교 자체 제작 암기쯤?
물론 당초아쯤 되는 인물이 원한다면 그런 물건을 못 구하지는 않겠으나 선물은 원래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닌가.
"참, 그러고 보니 동행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여기 있는 자들은 데리고 가도 되나?"
"전 무조건 갈 거예요."
도하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애초에 두고 갈 생각도 안 했다만."
도하나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은 물가에 어린 애를 두고 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어린아이가 위험한 게 아니고 물가에 놀러 온 다른 사람들이 위험한.
위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일단 초대를 받은 건 할아버지뿐이지만 몇 명 정도는 객으로 데려올 수 있을 거예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최상급 귀빈 대우이니까요."
"최상급 귀빈 대우? 굳이 말하자면 어느 정도인데?"
"구파일방의 수장급?"
"난 안 갈 거요."
그때 소걸이 끼어들었다. 결심한 표정이었다.
"음?"
"취견자에 이어 당가 내란도 끝났고 일월신교까지 정리했지 않소. 더는 김 형 주변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졌소. 그럴 여유도 없고."
"……그런가. 하긴."
후개는 원래 아주 바쁘고 다사다난한 자리였다.
개방은 후계자를 아주 철저하게 굴렸다. 온갖 환경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도록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후개. 개방용결.
개방의 미래라는 이름값을 감당하기 위해서 마땅히 가시밭길을 거닐어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 한 나라에 근 1년간 붙어있던 것 자체가 용한 일이었다.
소걸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 본업에 충실할 때가 온 거지."
"본업이라니. 거지 생활이 그립더냐?"
"바로 그거요. 몸에도 안 맞는 교수 생활에 진저리가 다 날 지경이오. 난 길거리가 체질이란 말이오."
진저리가 나기는. 교수 업무를 너무 잘 소화해서 천직인 줄 알 정도였다.
소걸은 여러 가지 의미로 어디를 가도 굶을 놈이 아니었다.
"역마살이 그간 학교에 붙어있느라 고생했다."
"아무렴. 그래도 당분간은 학교에 있을 거요. 김 형의 빈자리는 메꿔야 하지 않겠소."
"부탁하지."
소걸이 떠나는 것은 몹시 아쉬웠으나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나나 소걸이나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삐걱거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이주일 동안간 누워있었던 탓인지 화경의 신체조차 정상이 아니었다.
왼팔은 신경이 이상하게 붙은 것 같았는데 시간을 들여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느릿하게. 그러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똑바로 섰다.
예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척!
말을 잘 안 듣는 왼팔을 간신히 움직여 포권을 했다.
"지금껏 도와준 개방과 개방용결 후개에게 감사드리오. 필요한 순간에 늘 큰 힘이 되었소."
사실 취견자에게 당한 내상을 치유한 이후에 소걸이 남아준 것은 실리보다는 의리에 가까웠다.
자소곡차와 자율무공학부의 가치 역시 적지 않았으나, 한국지부의 장로쯤이면 몰라도 개방 후개를 구속할 정도는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방의 후계자.
모든 행보가 가벼울 리가 없었다.
내 곁에 머무르는 것은 아마 소걸에게도 꽤 부담이었을 것이다.
일월신교 사건이 이렇게 크게 터지지 않았다면 개방 내부에서 질책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러 번 큰 도움을 받았다.
중요한 순간 완숙한 초절정 고수의 역할 외에도 후개로서의 정보력 역시 긴요했다.
그래서 나는 소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소걸도 마주 포권했다.
"거지놈의 하찮은 손이 협을 행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그저 기쁜 일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자세를 잡았는데 진이 빠졌다. 침상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
"물론. 이번에 사건들을 거치며 보고 배운 것이 많소. 다음에는 이름뿐만이 아니라 진짜 항룡소개가 되어 있을 거요."
소걸이 자신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웃었다.
"그건 좀 기대되는군."
그 말은 화경이 되겠다고 천명한 것이었다.
그간 사건들을 거치며 깨달은 심득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화경의 벽을 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천마신교에서는 사고 치지 말고 몸조리 잘하시오. 거기서 벌어지는 일은 맹에서 쉽게 도와줄 수도 없으니 말이오."
"……말이 이상한데, 내가 언제 사고를 치고 다녔던가?"
"김 형은 사고가 없으면 직접 찾아다니는 사람이잖소. 직업병인지 뭔지."
"그럼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냐."
"그건 기대도 안 하오. 정사대전이 일어날 만한 큰일이 아니길 바랄 뿐이오."
"참나. 악담이냐 덕담이냐. 슬슬 가라. 나도 이제 쉬어야겠다."
"그러지. 이만 가보겠소. 안 그래도 밀린 업무가 많은지라."
"그래. 잘 가라. 벗이여."
벗.
그 말이 아주 적당했다.
소걸은 내가 벗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무력에 휘둘리지 않았고 서로의 성취를 질투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집단에서 다른 목표를 위해 일했으나 때로는 신념의 방향이 겹쳐 같은 곳을 보고 걸었다.
병실 문을 나서는 소걸의 등을 보며 나는 문득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소걸."
"왜 부르시오."
"한국을 떠나면 어디로 갈 거냐."
"동유럽 부근에서 기이한 소문이 들리더군. 한번 가볼까 하오."
그 말을 끝으로 소걸은 떠났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우리는 도사였고 거지였으나 그 정체성은 언제나 결국 낭인(浪人, Vagabond)이었다.
떠나야 할 때 떠나는 것을 주저한 적은 없었다.
거지가 떠난 병실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럼 우리도 이만 갈까요?"
말없이 우리를 지켜보던 위옥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퇴원 수속 밟고 휠체어 좀 하나 챙겨오거라. 걸으려니 삭신이 쑤신다."
"그래요."
위옥은 곧바로 간호사를 호출해 퇴원 절차를 밟았다. 얼마 걸리지 않았다.
도하나가 휠체어를 밀었다. 이제 혼자 내 호위 역할을 해야 했으니 가장 중요한 위치를 맡은 거였다.
물론 공항까지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할 거고 이후에는 비행기를 탈 테니 휠체어는 얼마 쓰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내릴 때쯤엔 내 발로 걸을 수 있을 것이고.
병원을 나서는데 병원 앞에 있는 작은 공원 한쪽에 화환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해가 저문 지 제법이었는데도 그곳은 낮처럼 밝았다.
사람들이 촛불을 밝히고 끊임없이 절을 하고 있었다.
"저건 뭐야? 희한한 광경이군. 무슨 사이비 교주라도 온 건가?"
"아, 저건……."
위옥이 말끝을 흐렸다. 아는 눈치였다.
"왜. 뭔데?"
위옥은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버릇없기는.
나는 리무진을 타고 병원을 나서며 그쪽에 적혀 있는 플래카드 따위를 곁눈질로 읽었다.
스쳐 지나가듯 짧게 보았으나 모조리 읽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재림천마 김산 쾌유기원 삼천배>
<벽력자 검룡 천마의 2차 재림 기도회>
"……사이비 교주가 온 게 맞네."
그 사이비 교주가 나인 건 몰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2차 재림은 뭔데. 누가 보면 내가 죽은 줄 알겠네.
나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리무진은 조용히 밤거리를 질주했다.
김해 공항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곧장 간단한 수속을 밟은 후 천마신교의 전용기로 향했다.
"맙소사."
"어때요? 멋있죠? 안은 더 멋있어요. 얼른 들어가 봐요!"
"전용기라길래 무슨 경비행기 수준인 줄 알았는데……."
천마신교의 전용기는 몹시 컸다. 내 예상보다 훨씬.
그냥 대형 여객기 크기였다. 그러니까 사람 수백 명이 탈 수 있는 여객기 말이다.
기체 옆에는 천마신교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크기가 워낙 커서 밤중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물론 내 밤눈이 밝은 덕도 있었다.
"에이. 천마 전용기를 뭐로 보고."
"……천마 전용기? 천마는 한국 안 왔잖아. 설마 안에 타고 있는 건가?"
"에이, 설마요. 대신 할아버지가 타고 있잖아요. 재림천마. 나도 소천마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천마 전용기를 대령해야죠."
"……."
나는 도하나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올랐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비행기에 들어왔는데 계단이 있었다.
실내는 2층으로 되어 있었고 여러 개의 방으로 구역이 구분되어 있었다.
"식당과 침실은 물론이고 당구장, 영화관 등의 유희 시설도 다양하게 있어요. 오늘은 몇 시간 안 탈 거니까 다 써보지는 못하겠지만요."
위옥은 우리에게 객실 하나를 내주었다. 여러 개의 객실 중에서 가장 좋은 방이라고 했다.
"잠깐 쉬시다 보면 도착할 거예요. 출출하시면 식당에 가면 직원분들이 언제든지 요리를 해줄 거예요. 다 교단 소속의 호텔에서 일하는 분들이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그런 사람들이 대체 왜 여기 있는데?
위옥은 그 말을 하고 잠시 수면을 취하겠다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무튼 꽤 출출했기에 우리는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이 주일간 아무것도 안 먹은 몸이었고, 도하나는 원래 주면 늘 먹는 편이었다.
넓은 식당 구역에 가니 자연스럽게 자리로 안내하는 식사 시종들이 있었다. 나를 보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소교주님의 객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도 반갑소."
소교주의 객. 아마 내 정체가 알려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긴 알려져서 좋을 것도 없다.
시종 중 한 명이 메뉴판을 내주었다. 슬쩍 보니 중식부터 시작해서 일식, 양식 등등 카테고리가 다양했다.
천마 전용기가 이런 거라면 천마, 괜찮을지도.
"특별히 원하시는 음식이 있다면 메뉴에 없더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최대한 만들어보겠습니다."
메뉴판만 봐도 맛있어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보고 있으니 군침이 돌았다.
기의 순환만으로도 반평생을 살 수 있는 몸이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통한 열량 섭취는 늘 기분 좋은 일이다. 설렜다.
"오, 여기 메뉴판에 있는 건 다 되는 건가?"
"물론입니다."
"그럼 나는 여기 소고기……."
"사형은 흰죽 드셔야죠."
도하나가 옆에서 말했다.
고개를 힐끔 돌리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응?"
"오랜만에 먹는 음식이니까 위에 자극적인 건 피해야죠. 그쵸?"
"……그야 그렇지만. 나 정도 되는 고수가 위장 걱정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닐까? 이럴 땐 오히려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줘야 재림천마다운 위엄이 살지 않을까?"
"사형을 완벽하게 호위하는 게 제 임무라서요.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겨서 회복이 늦어지는 일은 방지해야겠죠?"
"……응."
나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왜 이런 날에 맞는 말을 하는 거지? 몹시 섭섭한 일이군.
도하나는 메뉴판을 아주 제가 든 채 시종에게 재잘거렸다.
"저는 여기부터 여기까지 주시고요."
"……이것들 전부 말씀이십니까?"
"네. 그리고 사형은 여기 건강죽 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 후 나는 코스 요리처럼 차근차근 차려지는 호화로운 음식들을 보며 허여멀건한 죽이나 떠먹어야 했다.
맛없었다. 맛이 나쁜 게 아니고 그냥 맛 자체가 아예 없었다.
사실 나름대로 고소하긴 했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음식들의 향이 너무 강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맛있냐?"
"네, 사형."
"……그래. 많이 먹어라."
"그래야죠. 무슨 일이 생기면 저만 믿으세요. 제가 어떻게든 사형 지켜 드릴게요."
도하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식을 계속 쑤셔 넣으면서.
그래. 호위라고 있는 것은 이제 단 하나.
화경도 아닌데 싸우려면 먹어야지. 아무렴. 많이 먹어라.
그렇게 몇 시간을 식당에서 보내다 객실로 돌아와 좀 쉬었다.
머지 않아 안내방송이 들렸다.
─우리는 곧 십만대산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소교주님과 손님분들은 내리실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커다란 비행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산이 안개를 끼고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주변 평야에는 도시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었다.
마침내 도착했다.
중국령 천마신교 자치구.
십만대산(十萬大山, The hundred thousand mount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