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82화 (82/120)

< 82 : 81. 천마를 보았다(Seeing chosen one)(2) >

당대 천마의 친필 편지.

나는 몹시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김 형. 진정하시오. 물론 마교주의 접촉이 갑작스럽긴 하지만……."

"……벽력자라니. 뭐냐 이거. 설마 나야?"

"……그렇소만. 화경이 단독으로 보여주는 위력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거대 기공 아니었소. 경외를 담아 별호를 붙일 만하지. 해외 언론에서도 주목……."

"숫제 폭탄마 테러리스트나 가질 법한 별호 아니냐!"

"……그쪽이 문제였소?"

"냠, 그럼?"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소걸을 뒤로 하고 도하나가 깎아 주는 사과를 받아먹었다.

도하나가 다른 잡기는 골고루 못 했지만 그래도 도수(刀手)라고 과도를 다루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당대 천마의 친필 편지를 받았잖소. 감회 같은 것은 없는 거요?"

"그게 어찌 도사에게 중요한 일이겠느냐? 천마나 일반 신도나 내게는 매한가지 일개 마교도일 뿐이다."

"……그러는 김 형도 이제 천마요. 그것도 초대(初代, The first)를 자칭하지 않았소."

"……실로 속상한 일이지."

나는 편지 봉투를 뜯었다.

"카드?"

안에는 편지지와 함께 천마신교의 상징이 황금색으로 새겨진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카드는 신용 카드였다.

"이건 뭐지?"

"나도 모르오. 내용을 읽어 보면 알겠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멋들어진 필기체로 쓰여있는 편지를 읽었다.

'친애하는 일월신교 교주'로 시작하는 두 장짜리 편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하나, 천마신교와 일월신교의 관계를 논의하고 싶다. 근데 나는 중국에서 너무 바쁘니까 그쪽이 좀 와 줬으면 좋겠다.」

「둘, 많이 다쳤다는데 파천혼원단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 필요하다면 호위도 붙여주겠다.」

「셋, 동봉한 카드는 경비용으로 쓰면 된다. 한도는 없다. 선물이다. 초대장을 겸한다. 천마신교의 모든 계열사에서 귀빈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추신. 딸아이를 잘 부탁한다.」

내용은 단순했으나 온갖 미사여구로 나를 수식하고 있었다. 가볍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띄워 주는 의도는 확실히 드러났다.

편지를 돌려본 병실 안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김 형, 이 조건들은 뭐요? 혹시 천마신교에 팔려가는 거요?"

"사형. 여기 딸 이야기는 뭐예요? 아는 사이에요?"

"……몰라. 나도 모르는 이야기다."

확실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파천혼원단은 마가(魔家)의 대환단으로 불리는 천마신교의 최고급 영약이었다.

거기에 한도가 없는 천마신교 계열사 블랙 카드와 호위를 제공하겠다는 이야기까지.

일면식도 없는 내게 그런 것을 제시한다는 것은 수상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뭔가 속셈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날 본단까지 불러서 처리해버릴 생각인가? 감히 초대 천마를 자칭한 이단을 참하겠다거나."

"……그렇게 졸렬한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것 같소만. 그래도 마가의 수장 아니요."

"하긴. 그럴 양반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소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당대 천마를 본 적 있소?"

"스승님의 장례식에 왔었다. 그러고 보니 당시 딸을 데려왔었는데……."

"딸이라면, 소천마(小天魔)? 편지에도 언급이 있던데 그때 어떤 교분이라도 나눴던 거요?"

"설마.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누구와 교분을 나눌 기분도 아니었고."

"하긴."

나는 기절한 동안 수염이 자라 까끌까끌한 턱을 쓰다듬으며 당시 기억을 떠올려봤다.

"헌데 소천마라고. 그리 보이지는 않았는데. 열댓 살도 되지 않은 여아였던 걸로 기억한다만."

"벌써 몇 년 전의 일 아니오. 생각해보니 편지를 가져다준 자가 젊은 여자였소. 일반 교도라고 생각했소만 설마?"

"원래 아이는 쑥쑥 자라기 마련이야."

문득 병실 문이 열렸다.

도하나는 과도를 등 뒤로 감춘 채 기를 둘렀다. 소걸은 양손을 할퀴듯이 몸 앞에 세웠다.

나는 그냥 앉아 있었다.

까놓고 지금 내 상태는 이 둘보다도 못한 수준이라. 둘이 뚫리면 답이 없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고 얌전히 죽을 생각은 없었지만.

열린 문 앞에 있는 것은 두 명이었다. 젊은 여자와 백발의 중년인이었다.

중년인 쪽은 흐릿한 기감으로 느끼기에도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여자가 머리에 깊게 덮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얼굴이 드러났다.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약관 근처로 보였다. 여자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모습.

소녀는 후드티 배 주머니에 꽂아넣은 양손 중 한쪽만 빼서 휘휘 흔들었다. 경망스러운 손 인사였다.

"소천마……."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소걸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할아버지."

"……할아버지? 설마 나보고 하는 말이냐?"

"응. 당연하지. 나 몰라? 당대 천마의 독녀, 대천마신교의 소교주, 거지 아저씨가 말하는 소천마. 위옥이야. 편하게 옥아(鈺兒)라고 불러도 돼."

"……난 너 같은 손녀 둔 적 없다."

"그쪽이 우리 시조라며? 그러니까 할아버지지. 아니면 뭐야. 재림했으니까 우리 버리고 따로 새살림 차리겠다는 거야?"

"……."

그건 도사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질문이었다. 종교적 논쟁거리이기도 했고.

그러고보니 재림천마가 진짜로 있으면 천마신교의 천마가는 그 직계 후손이 되는구나.

그런 세세한 부분까진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그래서 그냥 못 들은 척했다.

"이쪽은 우리 좌사 아저씨. 다들 인사해."

"광명좌사 이원호요.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오, 벽력자 공(公)."

백발의 중년인이 절도 있는 자세로 포권했다.

곧은 태도와 맑은 기운. 정종의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자였다.

일상적인 몸짓에도 오래도록 쌓아온 무리가 묻어났다.

"……철난(鐵蘭, Iron orchid)."

"부끄럽게도 유약한 심성 덕에 그렇게 불리고 있소."

천마신교 광명좌사.

철난 이원호.

내 기억에도 있는 고수였다. 천마신교의 호법이었으니 알아두는 게 당연했다.

마교도답지 않게 행동이 점잖고 덕이 있었기에 마도군자로도 불리는 화경의 권법가였다.

부드러운 성정과 달리 무공에 있어서는 고강하고 빈틈없는 중권(重拳)의 대가로 이름 높았다.

그리하여 붙은 이름이 철로 된 난초. 철난.

나는 그들의 신색을 살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와 좌호법의 조합.

무기는 들고 오지 않았다. 그러나 위옥은 몰라도 철난은 권법가였다. 화경의 권법가는 맨몸으로도 존재 자체가 무기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순진하게 생각해봐도 단순히 편지 배달부나 할 수준은 아니었다.

"반갑소만 병실까지 들어온 불청객을 환영하기는 힘들군."

"이해하오."

"싸울 거면 싸우고 아니라면 허심탄회하게 풀고 갑시다. 목적이 뭐요?"

철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 발짝 물러서며 소천마에게 자리를 양보할 뿐이었다.

소교주를 존중하는 모양새였다. 광명좌사의 자리가 소교주보다 낮지는 않을 터인데.

소천마는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섰다.

"뭐야, 아빠가 편지에 다 써놓은 거 아니었어?"

"편지는 그저 초대장이었다. 너와 철난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없었다."

정확히는 추신에 한 줄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구나. 간단해. 좌사 아저씨는 나를 지키러 왔고, 나는 할아버지를 보러 왔어."

"왜?"

내 물음에 위옥은 씩 웃더니 양손을 어깨너비로 마주 보게 벌렸다.

파지직─.

그 사이에서 가느다란 뇌기가 짧게 번쩍였다. 다섯 줄기. 손 주변으로 짙은 연기 같은 것이 아른거렸다.

파천신공이었다.

미숙하지만 나이에 비하면 제법이었다.

"나 그거 가르쳐줘. 뇌정벽력."

그제야 당대 천마가 호의적인 조건으로 나를 초대한 목적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일종의 고액 과외 의뢰였다.

천마신교의 장로였던 일월마군조차 뇌강을 쉽게 다루지 못했다. 그만큼 뇌기는 다스리기 어려운 기운이었다.

나는 그런 뇌강을 다루는 능력을 실전으로 증명했다. 동영상으로 확실하게  보여줬다.

그리하여 당대 천마는 소천마의 파천신공 교육을 담당할 사람으로 나를 지목한 것이다.

나는 위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그때 본 기생오라비를 떠올렸다.

확실히 닮았다.

그렇다면 그자는 분명히 초대 천마였으리라.

그날 본 것이 단순히 한낮의 꿈[白日夢]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 순간의 기억은 몹시 비현실적이고 흐릿했다.

어렴풋이만 남은 기억의 잔해 속에서 천마가 편린이라는 것을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다.

편린. 처음 듣는 개념이었다.

나도 당대 천마에게 궁금한 것이 꽤 많았다. 초대 천마의 이야기도 그렇고, 파천신공에 대한 것도 있었다.

마침 좋은 기회였다. 얻을 것이 많았다.

당장 내공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몸으로 요양하기에 천마신교보다 좋은 곳이 없어 보였다.

파천혼원단도 몸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거고, 소교주 과외하는 귀빈이면 잘 지켜주기도 하겠지.

나는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린 후 위옥에게 대답했다.

"안 돼."

"당연히 그래야……. 엥?"

소천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감히 거절하는 것을 예상치 못했다는 분위기였다.

"왜, 왜?!"

"첫째, 난 버릇없는 꼬맹이는 안 가르친다."

"……그럼 하, 할아버님이라고 부를까? 가르쳐 줄 거야?"

보통은 존댓말이 나오지 않나?

"둘째. 너 뇌강을 쓸 수는 있냐?"

"못 쓰는데……."

"뇌강도 못 다루면서 어떻게 뇌정벽력의 경지를 배우겠다는 말이냐. 무공이 우스워? 어?"

"……아니."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셋째."

"더 있어……?"

"내 강의는 현재 사천공대 독점 제공이다."

위옥은 멈칫하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갔다. 그러더니 철난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좌사. 사천공대가 뭐야?"

"사천당가에서 운영 중인 무공 대학교입니다."

그래봐야 다 들렸다. 안쪽이 심하게 망가진 거지 귀는 멀쩡했다.

"학교? 우리가 그거 사면 안 돼?"

"안 됩니다."

"왜? 비싸?"

"비싸기도 하겠지만 애초에 당가가 팔지 않을 겁니다. 일월신교의 영향력도 제거하는 판인데 굳이 자국 최고의 무공 대학교를 우리에게 내주지는 않겠지요."

"그렇구나."

위옥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쪼르르 이쪽으로 왔다.

"……할아버지, 그럼 초대는 거절이야?"

"아니."

"……그럼?"

"교주에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있고 일월신교의 공적인 문제도 있으니 찾아갈 생각이다."

"……뇌정벽력은?"

"은?"

"……요?"

"그건 말했다시피 무리다. 내 몸 상태도 멀쩡하지 않고, 네가 강기를 다룰 수 없는 이상 의미가 없다. 심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손발처럼 다룰 수 있어야 하는 법. 다만."

"다만?"

"파천신공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눌 수는 있겠지."

"그거면 됐어!"

"됐어?"

"……요. 헤헤!"

위옥은 손을 하늘 위로 쳐들고 좋아했다. 나이에 비해 과하게 천진했다.

말투도 그렇고 당대 천마가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게 아닌가 싶은데.

역시 천마라 한들 외동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인가.

"그럼 잘 부탁한다."

"응. 아니, 네. 그럼 언제 출발해요?"

"일단 거동은 가능할 정도로 몸은 회복되어야겠지. 가는 동안 학교에 병가도 써야 할 거고. 며칠 걸릴 거다."

위옥은 고개를 갸웃했다.

"회복은 가는 동안 하면 되잖아요."

"비행기 타는 것도 다 일이다. 사람이랑 부대끼는 환경인데 최소한의 대처를 할 몸 상태는 만들어야지.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모르지 않나."

"사람이랑 왜 부대껴요?"

"응?"

"전용기 타고 이동할 거예요. 공항에서 십만대산까지 직행으로. 올 때도 그렇게 왔는걸?"

아하. 생각해보니 이 꼬마는 일월신교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할 거대 종교의 후계자였다.

그것도 무려 45대까지 이어온 종교의 주인.

돈은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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