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81화 (81/120)

< 81 : 80. 천마를 보았다(Seeing chosen one)(1) >

눈을 떴다.

"아."

빛이 눈 부셨다. 본능에 따라 바로 눈을 감았다.

눈부심이라니. 화경이 된 이후로는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신선하군.

말 그대로 '기가 허했다'.

아팠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을 정도였다. 전신에 생살을 칼로 저미는 것 같은 통증이 있었다.

몸 상태를 관조했다. 엉망이었다. 살아 있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모든 기맥이 뒤틀려 있었고 주요 혈도는 찌그러져 있었다.

그래도 외상은 의원이 어떻게 처치를 잘해준 것 같았다. 근육과 뼈가 제대로 붙어 있었다. 내장도 다 제자리에 있었다.

단전은 거의 망가진 상태였다. 기가 정상적으로 통행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소한의 흐름은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긴 이 정도도 안 됐으면 그냥 그대로 죽었겠지.

내상과 외상 모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미 한 번 환골탈태를 경험한 몸이었다. 나는 그 최적의 몸 상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차피 반쯤은 기로 구성된 신체였다.

내공만 운용할 수 있다면,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단전을 제외한 부분은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었다.

늘 그랬듯 단전이 문제였을 뿐이다.

진원진기의 대부분은 다시 묶인 상태였다. 그 분량에 해당하는 내공은 여전히 내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사형?"

"어, 하나냐……?"

"네, 사형! 저예요! 저기요! 의사 선생님! 사형이 눈을 떴어요!"

드르륵!

도하나가 문을 박차고 의사 부르러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야, 넌 나 지켜야지. 어디가.

나는 꼼짝도 못한 채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작은 동작조차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있다는 실감이 났다.

나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준회원으로.

***

의사를 필두로 여러 사람이 병실에 들이닥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기절한 채 2주가 흘렀다고?"

"그렇소."

"그럼 학교 수업은 어떡해?"

"지금 입에서 수업 이야기를 할 때요?"

"받은 만큼은 일해야지."

교수 임용 역시 검룡패를 받고 맺은 계약이니 말이다. 쉽사리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승님의 명예로 이루어진 격과 업이었기에 그랬다.

"사형 수업은 제가 땜빵으로 뛰었어요."

"훌륭하다, 도 조교. 역시 믿음직한 화산파의 동량이야."

"그쵸."

"참고로 나도 했소."

"허허, 거지놈을 학교에 꽂아줬더니 이제 학부장 자리까지 노리는구나."

"……어디 한 번 제대로 노려볼까? 초절정 거지한테 맞아 죽은 화경으로 역사에 남고 싶소?"

"미안. 고맙다, 소걸."

내가 깨어난 소식을 듣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처음은 당연히 교대로 내 호위를 서고 있던 도하나와 소걸이었다.

그 다음으로 온 건 이신을 비롯한 자율무공학부의 학생들이었다.

"교수님, 정말 대단하셨어요."

"맞아요. 그때 쓰러졌을 때는 죽은 줄 알고 깜짝 놀랐었는데. 대체 그 번개 같은 건 뭐였어요?"

"먼지도 교수님이 걱정되는지 요즘 밥을 10인분밖에 안 먹어요."

음료수와 다과 따위를 잔뜩 사 와서 떠들다가 돌아갔다. 놀랍게도 자기네들이 가져온 선물 대부분을 직접 먹어치우고 떠났다. 왜 가져왔는데.

학생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접 당초아도 왔다.

"김 교수님. 이야기는 들었어요.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요."

"예, 뭐. 이사장님. 그간 학교 못 나가게 된 건 미안합니다."

"푸흡.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요? 교수님 덕에 학교 명성이 더 드높아졌으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세요."

"명성이요?"

"아, 아직 모르시겠구나. 기대하세요. 재밌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당초아는 눈웃음을 치며 돌아갔다. 그 외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음에 온 것은 백무강 사형을 필두로 한 화산파의 후기지수들이었다.

"멀쩡하군. 다행이다."

"이게 멀쩡해 보이십니까?"

"미라처럼 붕대를 온몸에 감고 드러누운 게 한두 번은 아니잖아."

"지금은 속이 아픕니다. 속이."

"면목이 없습니다. 사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서."

"아니. 너희는 해야 할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일을 은밀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잠복하라 했던 것은 나였으니. 화산파의 절도를 확인했다. 잘했다."

"크윽!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격스럽습니다!"

화산파 산매검수들은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병원 측에서 클레임이 들어올까 싶을 정도였다.

독괴는 오지 않았다. 대신 철두철미 간부가 예쁜 녹색 장미 한 송이를 보냈다.

"오, 머리와 꼬리는 물론 심장까지 철로 되어 있을 것 같은 양반이 웬일로 이런 걸?"

"호신용 독장미입니다. 비상시에 꺾으면 주변에 마비산을 살포합니다. 가시에는 수면독이 있고 줄기 부분은 비도로 쓸 수 있습니다. 꽃잎 부분은 먹으면 해약 작용을 합니다."

"……그럼 그렇지. 거기 창가 꽃병에 꽂아두세요. 애들 손 안 닿는 곳에."

"아, 그리고 이건 가주님께서 보내시는 겁니다."

철두철미 간부는 품에서 꺼낸 최고급 용정차를 두고 갔다.

"……."

지금 마시면 정말 죽을 것 같았기에 나는 포장을 뜯지도 않았다.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고무림 기자 제갈성혜였다.

"안녕하세요. 김 대협."

"오, 제갈 기자. 무사했군. 다행이오. 어때. 재밌었소? 잘 찍었고?"

"예, 물론. '사천시 천마재림'에 대한 특종을 독점하는 중이에요. 그 덕에 성과금도 잔뜩 받았어요."

"사천시……. 뭐라고?"

"사천시 천마재림이요. 그 김산 대협이 본인 입으로 그러셨잖아요. 본인이 천마라고. 지상파 3사에도 특종으로 다 나갔는걸요."

"아니, 난……. 진심으로 그랬던 것은 아닌데……."

"에이, 파천신공을 그렇게 잘 다루는 걸 보여주셔 놓고 겸손도 참. 김 대협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건 이제 전 국민이 다 알아요. '뇌정벽력' 영상은 해외에서도 난리예요. 천마신교 본단에서도 지금 난리가 났대요."

"……맙소사."

"그럼 다음에 또 좋은 소식 가지고 올게요! 대협!"

저녁에는 일월신교의 간부들도 찾아왔다.

"그, 교주님……?"

"……정말 듣기 싫은 명칭이로군."

"……그럼 재림천마시여?"

"……그냥 교주로 하게."

"……저희 일월신교 원로회의는 교주님의 회복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일월신교 간부들은 영약을 보따리로 가져와 남기고 돌아갔다.

그 외에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잔뜩 했다.

일월신교에 착취 구조는 전적으로 일월마군의 잘못이라는 주장을 시작이었다.

강제 헌금을 폐지하고 가난한 신도들에게 받을 것은 돌려주는 중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끝에는 앞으로 일월신교는 '신재림천마'인 나를 필두로 청렴한 종교로 거듭날 것이라고 열변을 토해냈다.

신재림천마는 뭔데. 천마는 재림을 여러 번 할 수도 있는 거냐?

원래는 일월마군을 정리한 후에는 정리하려 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만약 저들이 말하는 대로 청렴하게 교를 운영하고 있다면 한번 기회를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는 과이지만 그것을 극복할 만한 공을 쌓을 수 있다면 기다려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다시 타락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들을 그때 비로소 일월마군을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온 것은 소녀였다.

일월신교 광신도를 아비로 둔 소녀.

"아저씨. 아니, 천마님, 고마워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정말 멍청한 짓을 했습니다. 가짜 천마를 믿고요. 뭐라도 씌었던 것처럼……."

아비는 그때보다는 맑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일월마군에게 당하고도 나를 믿겠다는 걸 보니 아직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아비와 소녀와 손을 잡고 웃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이 근본도 없는 종교를 믿는 중이었고,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소녀와 가족이 당장 웃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오늘 받은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한 병문안 선물이었다.

비로소 내가 흘린 피의 대가를 다 받았다.

"이제 다 돌아갔군."

지쳤다.

온전치 못한 몸 상태로 온종일 병문안 손님을 맞이했다.

도하나가 거르고 걸렀음에도 이 정도 인원이었다.

그 외에도 각종 정ㆍ재계 인사, 사천공대의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 자칭 협객인 동네 깡패들, 일월신교의 교도 등등 수많은 자가 찾아왔다고 했다.

"자, 이제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지."

나는 종일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 정도 회복한 몸을 일으켰다. 외상은 거의 완벽하게 다스렸다.

병문안을 온 사람들 앞에서는 일부로 꼼짝도 못 하는 척을 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내부는 아직 엉망이었다. 까놓고 말해 일류 고수에게도 칼침 맞고 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호위가 필요한 것이다.

당문병원의 VIP 1인실에는 이제 소걸과 도하나만 앉아 있었다.

소걸이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김 형이 궁금한 것만 말해주자면, 마선은 놓쳤소."

"역시 그런가."

"마지막에 김 형이 뇌정벽력을 일으킨 순간 빠져나간 것 같소."

"역시 그때 죽였어야 했나? 당시엔 경황이 없어서 선을 잘 긋지 못했다."

"선? 무슨 선을 말하는 거요?"

"그런 게 있다."

"뭐, 알겠소. 아무튼 마선도 몸 성한 채로 나가지는 못했소. 왼팔 전체와 오른쪽 눈을 두고 갔지. 등과 옆구리에도 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건 살아있다면 아마 회복했을 거요."

"그런데도 추적을 못 했나?"

"개방 한국 지부의 주요 전력은 모두 컨벤션 센터에 모인 채였소. 일단 그곳을 빠져나간 이상 더 쫓는 것은 힘들었소. 중상을 입었다 한들 화경이었으니 말이오."

"그렇군."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했다. 마선을 놓친 것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괴에 초절정 넷을 끼고도 제압하지 못했던 자였다. 거기다가 아직 숨겨둔 한 수도 있었을 터.

마음먹고 도망치기로 작정한 화경을 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일월마군은?"

"일월마군 사공태랑은 그 자리에서 앉은 채 죽었소. 무처법에 따라서 정당비무방위로 인정되어 특별히 후속 조사를 따로 하지는 않을 거요."

"죽었나."

"현장에서 뇌강을 몸으로 받아낸 유일한 사람이지 않소."

"그도 그렇군. 알겠다. 악절은?"

"릴 드레이크는 미국으로 귀국했소. 비록 이번에는 실패했으나 일월신교 교주를 지키는 계약은 유효하니 나중에 필요할 때 불러달라더군."

그 교주란 나를 일컫는 말일 터였다. 전대 교주 살해자. 본인이 임무 실패한 원인에게 붙을 생각을 했다는 거다. 어느 의미로는 대단한 놈이었다.

"그자도 어지간히 미친 작자로군."

"김 형 보고 버디라던데. 역시 당대의 칠룡칠봉은 다 맛이 갔구나 싶었소."

"뭐라고?"

"실수. 방금 건 못 들은 척해주시오. 지금은 내가 김 형보다 강한 몇 안 되는 순간이니 말이오."

"그래야겠군. 일월마군도 제끼고 항룡소개에게 맞아 죽을 수는 없으니 말이야."

"바람직한 태도요. 그리고 사건 종결 이후 이야기를 하자면, 김 형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좋소. 일월신교 장로직 발표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 아니 오히려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하오. 일월신교 자체가 공개적으로 반성하고 선행을 베풀고 있는 것도 한몫한 것 같고. 아직 일월신교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부정적이지만 말이오."

"그거야 서서히 바꿔나가면 될 일이지."

"잘 해보시오. 아참, 늦었지만 교주가 된 것 축하하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할 게 있소."

소걸은 드물게 뜸을 들였다.

"뭔데?"

"뇌정벽력. 영상으로 드물게 남은 화경 극한급 상승 무공의 근접 촬영물 아니오. 그것도 천마신교 파천신공의 거대 기공이지. 당연히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됐소."

"뭐 들었다. 명성이 조금 부풀려졌다지. 그건 지금은 때려죽여도 재현할 수 없는 힘이다. 다룰 수 없는 능력에 일희일비할 생각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소걸은 품에서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요즘 세상에 편지라니. 또 누가 이런 구시대적인 짓거리를 하는 거지? 고마우면 기프티콘이나 보낼 것이지.

"천마신교에서 공식적으로 초대장을 보내왔소. 김 형이 기절한 동안은 내가 보관하고 있었지."

<친애하는 일월신교 교주이자 재림천마인 검룡 벽력자(霹靂子, The bolt) 김산에게 ─ 제45대 천마 위천량>

편지를 보낸 사람은 진짜 구시대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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