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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79화 (79/120)

< 79 : 78. 뇌정벽력(Thunderer)(7) >

그러고 보니 스승님이 살아계실 적에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산아."

"예, 스승님. 제자 부르셨습니까."

"산아, 너는 내가 협객이라고 생각하느냐."

"물론이죠. 스승님이 협객이 아니면 누가 협객이겠어요. 나쁜 놈들도 자주 물리치고, TV에도 나오시잖아요. '이 시대 마지막 협객'이라고요."

"이놈아. TV는 또 언제 보았느냐. 그런 것에 낭비할 시간이 있으면 검에 더 힘쓰라 하지 않았느냐."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 아미파의 봄이가 나왔다고 해서 잠깐 봤어요. 아시죠? 그때 문파 교류할 때 왔던."

"너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여아 말이냐?"

"네. 아미파는 TV에 나오고 그런 걸 권장한대요. 그런 게 미래의 힘이라나 뭐라나. 봄이는 벌써 유명해졌어요."

"왜, 산아. 너도 유명해지고 싶으냐?"

"그야 유명해지면 좋잖아요. 스승님도 엄청나게 유명하시고요. 전 스승님처럼 되고 싶어요. 고수가 되어서 나쁜 놈들을 물리치고 협객이 될 거예요."

스승님은 허허롭게 웃으셨다.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거다. 분명 훌륭한 협객이 될 거다."

그러다 스승님은 불현듯 진중한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허나 나는 제대로 된 협객이 아니다. 산아."

"예? 스승님이요? 왜요?"

"흠. 한번 생각해 보아라. 네가 생각하는 협객은 어떤 사람이더냐."

"그야 나쁜 놈을 물리치는 사람이죠!"

"그럼 나쁜 놈을 물리치는 나쁜 놈은 협객이더냐?"

"……그건 아니죠."

"그럼?"

"나쁜 사람을 물리치는 착한 사람이요."

"허, 이놈. 말은 맞는 말이렷다. 또?"

"착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해요."

"그것도 맞다. 종합하면 착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나쁜 사람들을 물리치는 착한 사람이로구나."

"그런 거 같아요."

스승님은 말을 고르며 수염을 쓰다듬으셨다.

"그러니 협객이 되기 힘든 것이다. 세상에 악한 자는 셀 수 없이 많은데 그들로부터 선한 자를 돕는 것이 어찌 고되고 힘든 일이 아니겠느냐. 협객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자가 아니고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자다. 무공의 강함과 약함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럼요?"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는지가 훨씬 중요하지."

"그럼 약한 협객은 어떡해요?"

"죽거나 다칠 것이다."

"스승님은 잘 안 다치시잖아요."

"그러니 나는 진짜 협객이 아니라는 거다. 부끄럽게도 이 스승은 타고난 약간의 재주가 있을 뿐 분수에 맞는 일만 행해왔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문제를 알고도 하지 않았으니 진짜 협객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럼 다쳐야 진짜 협객인 거예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협행에서의 상처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했다는 증거이니. 산아, 협객이라는 인간들은 착하고 선한 인간들이라 쉽게 다친다. 약자를 도와 악자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그때 아주 진중했던 스승님의 눈이 아직도 기억난다. 덕분에 나도 자세를 바로 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좋은 협객은 다 죽기 마련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한 우리 모두는 준회원일 뿐이란다."

"준회원이요? 어디서요?"

"나와 내 친우들은 '죽은 협객의 사회'라고 부른단다. 그냥 농담 삼아 부르는 늙은이들 모임이지."

"백두의선 영감님이나 크리스 아저씨 같은 사람들요?"

"그래. 그리고 잊힌 수많은 진짜 협객들도 있었지. 세상은 잊어도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저도 모임의 회원이 되고 싶어요!"

"산이, 이놈. 어린 게 스승 앞에서 죽겠다는 이야기냐?"

"아니, 그럼, 음, 준회원요……. 어디서 가입할 수 있어요?"

"간단하다. 스스로 협객으로 살겠다고 마음을 먹고, 그렇게 살면 된단다."

"마음을 먹고 그렇게 살면 된다. 그게 끝이에요?"

"그래, 끝이다."

"엄청 쉽잖아요! 저도 오늘부터 스승님처럼 준회원이에요. 마음은 먹었고, 그렇게 살 거거든요!"

"허허, 녀석. 어디 한번 해보거라."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콰아앙!

일월마군의 뇌강이 정강이 옆을 한 치 간격을 두고 지나갔다. 뇌강이 땅을 휩쓴 자국을 힐끔 바라보았다.

튼튼한 돌로 된 땅바닥이 갈리고 녹아 있었다. 이미 바닥 마감재는 다 깨지고 날아간 지 오래였다.

굵기는 또 얼마나 굵은지 용이 한 마리 지나간 흔적 같았다.

갑자기 머리를 스친 과거사가 혹시 주마등이었나? 오늘 준회원에서 회원으로 승급하는 날이야?

화경이 되고는 땀을 흘린 적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식은땀이라도 날 것 같았다. 물론 진짜 나지는 않았다.

격차가 아득했다.

물론 일월마군이 내공이 넘쳐난다고 해서 다루지 못했던 뇌강을 여러 줄기 다루지는 못했다.

대신 한 줄기 한 줄기가 크고 강력했다.

단도진입적으로 말해서 내가 앞서 팔에 두르고 썼던 뇌정벽력이랑 위력에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유는 뻔했다.

나는 총합 28년분의 내공을 모으고 쪼개고 아껴가면서 무공을 운용하고 아주 가끔씩이나 거대 기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

반면 일월마군은 매 순간 사용하는 내공이 28년은 넘는 것 같았다. 그냥 땅바닥에 버리듯이 퍼붓고 소모하고 사용했다.

더럽게 비효율적인 파천신공과 어우러졌다. 그 모습 하나는 천마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상황도 최악이었다.

기세 좋게 덤비긴 했지만 나는 일월마군을 상대로 살아남는 데 급급했다.

그리고 출구 쪽에서 일월신교의 추가 병력이 도착해 철두철미와 잔여 병력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도망가기도 힘들었다는 것이다. 가능은 했겠으나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무대 쪽과 도하나 쪽이었다.

무대 쪽 아군은 새로이 검진을 구축하고 슬슬 사태에 적응한 모양이었으나 계속해서 부상자가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능동적인 방식의 차륜 변환검진으로 피로도 소모를 최소화하고 있었으나 부상자가 더 발생하면 한계가 올 것이다.

도하나 쪽은 더 엉망이었다. 전신에 음탄을 쏘인 도하나는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레이디. 이제 그만 하는 게 어때? 더 하면 진짜 유 다이. 만약에 레이디 죽으면 버디가 나랑 진심으로 싸우게 될 거 같은데. 내가 원하는 상황 아니야."

"뭐래. 나 영어 몰라. 덤벼."

"방금은 영어 몰라도 충분히 알아들을 만하지 않았나? 크레이지 걸. 이젠 좀 무서워."

"사형한테 못 가. 가고 싶으면 나 죽이고 가."

도하나는 피를 철철 쏟으면서도 여전히 웃는 채 말했다. 태연하게 어깨에 도를 걸쳤다.

악절이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음탄을 날렸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졌을 때 도하나의 출혈량은 이미 위험한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악절과 일월마군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일월마군 하나로도 겨우겨우 피하고 도망치면서 버티는 상황.

악절이 가담하는 순간 바로 오늘이 내 정회원 승급 기념일이 될 것이다.

좌우로 날아오는 뇌강을 차례대로 쳐냈다. 역으로 자하신검의 보랏빛 강기를 날렸으나 일월마군의 먹구름을 뚫지 못했다.

이미 진품 자하신검을 뽑고 가장 익숙한 형태로 싸우고 있었음에도 따라잡을 수 없는 간격이 느껴졌다.

아마 일월마군이 일월신단을 복용한 이후 장내의 교도들이 일월마군을 진정한 천마로 모시게 된 영향도 있는 것 같았다.

업과 격이 한 차례 더 상승한 느낌이었다. 현경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으나 보통의 화경은 넘어선 것 같은 그런 느낌.

결국은 일월마군도 모든 행동에 이유를 담았다는 이야기였다. 모든 수에 업이 서려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사이비 종교 교주로 신도들을 착취하고 열화핵폭단을 먹고 생명을 태워서까지 천마가 되고 싶은 이유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 격을 위하여 행하는 일월마군의 의지는 진짜였다.

그리고 내게도 태울 생이 있었다.

힐끗 오디토리엄 전체를 보았다. 전반적으로 불리했다.

그나마 유리한 마선 상대조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마선을 처리하는 게 가장 최선이었지만 기대대로 잘 되지 않았다. 이젠 기다릴 수도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하긴 힘들었다.

더 늦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더 다치기 전에.

도하나가 죽기 전에.

지금.

당장.

이곳부터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월마군."

"또 뭐냐. 힘이 드나?"

일월마군은 내공이 부족한 내 상태를 눈치채고 있는 듯했으나 말을 걸자 공격을 느릿하게 했다.

아예 멈추지는 않았다. 내 내공 소모량은 유지하려는 전략인 듯했다.

"어. 힘들기도 한데. 하나 궁금한 게 생겨서."

"뭐냐."

"신도들을 착취하고 네 목숨까지 태워가면서 이러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

"뻔한 걸 묻는군. 천마가 되고 싶으니까. 그뿐이다."

"그렇게까지 할 만큼 가치 있는 격이라는 것이냐? 천마라는 것이?"

"그래."

"그렇군. 일월마군. 나는 천마라는 건 잘 모른다. 하지만 아마 너는 천마 부적격일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 격이라는 것은 그렇게 발버둥치면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한다는 말이냐. 누가 천마 자리를 점지한다는 거냐? 혈통이 중요하다고?"

"간단하다."

나는 자하신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왼손이 맛이 갔기 때문에 검을 든 채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냥 되기로 마음먹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모르겠다면 보여주마.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을."

주요 혈도와 기경팔맥을 점했다.

몸 전체를 내공을 순환하는 단순한 기계처럼 만들었다.

내공이 질주하는 속도를 극한까지 올렸다. 화경의 신체로도 감당하기 힘든 영역까지.

기혈을 찢고 넓히며 질주하는 내공은 일순할수록 점점 빨라지며 단전을 흔들었다.

이윽고.

업과 격을 속이고.

마침내 단전까지 속여.

오랫동안 비축해온 내공의 둑[堤, Dam]를 열었다.

내공은 격랑처럼 흘렀다.

쿠쿠쿵─.

7년분을 가지고 있을 때도 목숨을 걸고서만 했던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애초에 방식을 알 수 없었을 일.

28년분의 내공으로는 어떤 문제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부작용, 차이점. 다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콰득─.

신체 내부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환골탈태를 거친 몸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어떤 본연의 고통 같은 것이 모든 혈맥을 할퀴었다.

그러나 지금 전신을 흐르고 있는 막대한 내공은 분명 내 통제하에 있었다.

순간 의식을 잃었다.

포근하면서도 아득했고, 편안하면서도 공허했다.

잠 혹은 죽음 같은 것을 힘겹게 뒤로하고 가까스로 눈을 떴다.

눈앞에 거대한 뇌강이 닥쳐있었다.

시간이 느릿하게 흘렀다.

검을 뽑아들려다가 말았다.

오랜 시간 무공을 익혀온 직감 혹은 천살성의 재능이 분명 말하고 있었다.

지금 필요한 건 검이 아니라고.

해금해봐야 세갑자 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월마군과의 내공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더구나 나의 내공은 철저하게 28년분의 회복에 맞춰져 있었다.

한번 소모하면 다시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도 한 호흡 한 호흡이 고통스러웠고 전신의 관절은 삐걱거렸고 혈도는 불탔다. 모든 기맥은 강기의 바늘로 찌르는 듯 저렸다.

한정된 내공. 최악의 몸 상태. 아주 잠깐만 허락된 시간.

정면 승부는 불가능했다. 힘은 대강 맞췄을 뿐 기교로 승부를 봐야 했다.

"……네놈."

파지지지지직─.

"쉽…잖…아…."

파천신공의 먹구름을 전신에 둘렀다.

짙은 먹구름은 두텁고 진했다. 그 내부가 거의 불투명할 정도였다.

일월마군이 쏘아낸 뇌강은 자연스럽게 내 먹구름을 떠돌고 있었다. 내가 다스렸다.

뇌강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 내 통제하에 있었다.

"아까…… 뭐랬더라. 아…."

나는 억지로 웃었다. 너무 아파서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 그래도 웃었다. 일월마군의 표정이 찌그러지는 게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내가…… 천마다……."

나는 뇌강을 일월마군에게 돌려줬다. 용과 같이 굵은 뇌강을 중심으로 가느다란 뇌강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오디토리엄 중앙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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