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 77. 뇌정벽력(Thunderer)(6) >
"내가 천마다."
일월마군은 호신강기를 날개처럼 두르고 그렇게 말했다.
검회색으로 일렁거리는 불온한 느낌의 강기가 일월마군의 주변을 너끈히 덮었다.
그 반경이 대충 봐도 3m는 넘어 보였다.
앞서 파천신공의 숙련도 따위를 지적했던 것은 이미 의미를 잃어버렸다.
늘 그랬듯이 충분한 힘과 속도 앞에서 기술은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건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넘치는 힘이었다.
얄팍한 기교로는 상대하기 힘든 순수하고 원초적인 파괴력.
기(氣, Ki).
그리고 더 많은 기.
단순히 영약을 많이 복용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압도적인 양의 내공이었다.
일월마군은 그 넘쳐나는 내공을 과시하듯 절제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생(生)을 갈아서.
"오오, 천마님이시다."
"드디어 우리의 천마님이 오셨다!"
웅웅─.
신비로운 소음과 멀리서도 느껴지는 폭발적인 위압감, 날개 형태의 강기까지.
평범한 교도들은 정말로 지금 이 자리에 천마가 현신했다고 믿을 만큼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방금 전까지 단전 부위를 얻어맞고 골골대던 때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일월신교의 교도들은 여기저기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시작했다.
"전능하신 천마님이시여."
"우리를 굽이 살펴 주시옵소서."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는 교도들도 있었다.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월신단, 즉, 열화핵폭단의 성능부터 그랬다.
"아악!"
"부상자는 이선으로 물러나라!"
"조심해! 광신도 놈들이 날뛰기 시작한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신교를 위하여!"
무대 위에서 개방과 철두철미와 교전 중이던 이단사냥꾼들이 거대한 검기를 휘두르며 주도권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부산 실종 사건 당시에 열화핵폭단과는 성능이 달랐다.
그때 상대했던 취견자는 화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일월신단을 복용한 자들처럼 내공을 폭발적으로 활성화하지 못했다.
이단사냥꾼 광신도들은 그 경지에 가질 수 없는 정도의 막대한 내공을 뿜어대고 있었다.
불안정한 검화를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휘두르기도 했다.
상황은 명확했다.
부산 당시보다 지금 열화핵폭단의 성능이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그러니까 성능이라는 것은 내공을 뻥튀기하는 측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절대로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저들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야 물론이고 저들 자신도 그럴 것이었다.
저 정도의 내공 활성화라면, 아마 칠음절맥인 김소원보다도 일찍 죽게 될 것이다.
화경인 일월마군은 몰라도 이단사냥꾼 수준에서는 자기 몸의 기맥을 조율할 능력이 없을 테니 그랬다.
"어떤가. 본좌의 모습이."
일월마군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월신장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파천신공을 두르고 있었다.
몸 주변을 뒤덮은 넓은 먹구름 사이로 뇌강들이 용처럼 번쩍거리며 명멸했다.
"이제야 좀 천마답군. 진작 그렇게 하지 그랬나."
나는 애써 웃었다. 일월마군도 마주 웃었다. 웃음에 아주 여유가 넘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여유롭구나. 위기 속에서도 늘 그렇게 웃는 것이냐? 아니면 지금의 나조차도 우습게 보이는가?"
"아니. 너를 상대할 자신이 전혀 없다. 지금 전략적 후퇴를 할까 고민 중이다."
일월마군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전자라는 거군. 과연 명문 정파답다."
"칭찬 고맙군. 화산에 수습 제자로라도 들어오고 싶으면 연락해도 좋다. 마교 출신은 잘 안 받아주지만 너는 특별 대우를 해주지. 한때라도 같은 꿈을 꿨던 동지로서."
"꿈? 무슨 꿈."
"우리 둘 다 천마가 되려 했잖나."
"하하, 넌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그런 말 자주 듣는 편이다."
나는 감각이 느껴지지도 않는 왼쪽 팔을 괜히 주무르며 말했다.
단전과 교환했을 때는 썩 만족스러웠는데 지금은 환불받고 싶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일월마군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냥 영약 많이 먹은 일월마군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내가 우위를 가지기는 했으나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작은 이득을 쌓아가다가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승부수로 겨우 승기를 잡았을 뿐.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일단 최소한 교착 상태는 유지해줘야 하는 무대 측 정예 고수들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얼핏 보니 아군 측이 개개인의 수준이 높고 호흡도 잘 맞추는 듯했다. 과연 오랜 세월 각 집단을 이끄는 정예 병력다웠다.
그러나 목숨을 도외시하며 승부를 걸어오는 광신도들을 상대하는 데 난항을 겪는 모양이었다.
자고로 미친 놈이 목숨 걸고 휘두르는 칼보다 무서운 것은 없는 법이었다.
악절을 상대 중인 도하나는 당연히 거의 벼랑 끝까지 몰린 상태였고, 마선 상대조에서는 암수 당호철이 죽은 이후로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거기다 제 놈이 진짜 천마라도 된 것처럼 내공을 아낌없이 흩뿌려대는 일월마군까지.
일대일로 상대하는 것도 답이 없는 수준인데 대국적으로도 크게 불리했다.
전략적 후퇴 운운한 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 아무 대책이 없었다면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하기 전에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무명소졸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 생각하긴. 물러나야지.
─천하의 독괴가 물러나자고?
─무슨 소리냐. 난 평생을 물러나면서 살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내가 윗사람을 이길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듣고 보니 그럴 만하군. 적어도 독절은 되어야 비벼보기라도 할 테니. 하긴 나도 스승님한테 많이 맞으면서 자랐다.
─잡소리는 그쯤 하면 됐다. 뭔가 방법이 있나?
─준비해둔 건 있다.
─뭔가?
─화산코리아.
그 순간 독괴 쪽에서 침이 하나 날아왔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서 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끝 부분에 독이 번들거렸다. 냄새가 알싸한 게 당문 정품의 극독이 확실했다.
"뭐지? 내분인가? 명문 정파라는 것도…… 생각보다 별거 없는 모양이군."
그 꼴을 본 일월마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환상을 깨서 미안하군."
나는 그 침을 잠깐 보다가 일월마군에게 뇌강을 실어 던졌다. 암기는 특기가 아니라 그리 강력하지는 않았다.
쿠릉!
침은 먹구름에 닿지도 못했다. 근처에 도달했을 무렵 일월마군의 먹구름에서 실한 뇌강이 한줄기 뻗어나와 통째로 태웠다.
"이게 무슨 개짓거리냐."
─개소리하지 마라. 화산코리아에서 쓸 만한 고수라고 해봐야 백무강 하나가 전부인데 여기 데려와서 뭘 어쩌자는 거냐.
일월마군과 독괴에게 동시에 개 같다는 평가를 듣게 되자 먼지에게는 미안하지만 몹시 기분이 침울해졌다.
일대일로 내공 똑같이 쓰게 하고 싸우면 별것도 아닌 것들이.
─화산코리아와 연락을 해두었다는 거다. 왜 오기 전에 모여서 인사했잖나. 마선이 등장한 이상 이런 상황도 생각은 해두었다. 우리끼리 도저히 안 되겠으면 무림맹에 즉각 연락하기로. 거기다 개방과 암왕 영감님에게까지. 판을 아주 크게 키우자는 거지.
─진작 그렇게 말하지 그랬나. 가주님께 청을 드리는 것은 내키지는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 어서 해라.
─확인.
나는 독괴와 대화를 마친 후 소걸에게도 잠시 연락했다. 개방의 연락망을 빌려 쓰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마군에게 여유롭게 말했다.
"일월마군."
"뭔가."
"확실히 너의 준비성은 꽤 대단하다. 그렇게 효과가 강력한 열화핵폭단까지 복용할 줄이야. 생을 불사르는 너의 의지 확실히 느껴졌다."
"일월신단이다."
"……그래, 일월신단. 어쨌든. 중요한 건 준비를 한 것이 너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왼쪽 손목에 찬 시계의 화면을 눌렀다.
왼쪽 팔이 안 움직여서 오른손으로 입가까지 가지고 와야 했다. 뼈도 부러졌는지 팔이 덜렁거렸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불렀다.
"산매검."
"……."
아무 반응이 없었다.
멀리서 마선과 싸우고 있는 독괴와 소걸까지 나에게 눈짓으로 재촉했다.
"……산매일검? 저기? 산매야? 사손?"
"……검룡. 병신이냐?"
참다못한 일월마군이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면 나를 병신으로 보는 건가? 개방도와 철두철미를 부를 때도 똑같은 방식을 써놓고, 내가 대비를 안 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했어?"
"당연히 했다. 오디토리엄 근처에서 무전에 이용되는 모든 주파수를 차단하는 것은 물론 교전 중에 네 왼팔에 뇌강과 음강을 꽂아넣지 않았나. 화경이 싸우는데 전자시계가 정상일 거라고 생각하나?"
힐끗 화면을 보았다. 이제 보니 먹통이었다. 시간이 고정된 채로 뻗어 있었다.
"안 되네. 이거 참. 변수인데?"
"……준비는 그게 다인가?"
나는 잠깐 머리를 굴려보았다.
무전에 이용되는 주파수를 다 차단했다고 했다. 그래봤자 초근거리에서 이뤄지는 전음은 막지 못했지만.
문제는 산매검수들이 있는 곳은 전음이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는 곳이다.
무림맹에 연락할 방법은 일단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특정 시간이 지나도 우리가 나오지 않으면 연락하라고는 했는데 지금 보기엔 그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가 골로 갈 것 같았다.
그럼 암왕 영감님한테 연락할 수단은 있을까?
현경의 감각 영역은 반경 몇 km에 달하지만 암왕 영감님이 있는 사천당가 본가는 여기서 너무 멀었다. 애초에 본가 자체가 너무 크기도 했고.
그리고 여기서 현경급의 위협이 있지 않은 이상 암왕 영감님은 상황을 알아도 굳이 나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현경의 움직임은 국제 정치의 영역이었기에 그랬다. 팔현경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현경 비보유국이 현경 보유국을 견제하는 국제 역학.
마선이 여기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린다면 몰라도 화경 간의 교전 정도로는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더 있다."
"좋다. 뭐든 꺼내봐라."
"아까 말했잖나."
"……무슨 얘기를 했었지?"
"전략적 후퇴."
"……뭐?"
나는 허리춤에서 허리띠를 풀어냈다. 팔랑거리는 연검은 기를 불어넣자 꼿꼿하게 섰다.
일월마군에게 검강을 날렸다. 가볍게 날렸는데 연검은 금이 가고 거의 부스러지기 직전이었다. 내가 이래서 연검은 잘 안 쓴다.
"후퇴!"
소리치고 오디토리엄 출구 쪽으로 뛰었다.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일월마군을 상대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애초에 일월마군은 핵폭단을 복용한 상태였다.
누구도 단전을 영원히 태울 수는 없었다. 시간을 끄는 것은 핵폭단을 상대하는 가장 정석적인 대응법이었다.
부산 때나 지리산 때처럼 구조가 시급한 피해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여기서 물러나면 새 천마 되기 프로젝트는 물 건넌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월신교 교도들을 구하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였다.
대신 얌전히 검룡패의 약속에 얽매여 일월신교의 장로로 좀 살아야겠지만 말이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교도들은 언제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스스로의 의지로 일월교도가 되기를 선택한 자들이었다.
조금 더 고통받는 것은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출구를 향해 뛰는데.
교도들의 얼굴이 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증오의 눈길로 쳐다보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 누군가는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구원해달라는 듯이.
교에 미쳐 재산을 탕진한 아비 대신에 내게 지원금을 받아간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내게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학생들과 기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도 못 했는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하, 젠장."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채 그들을 넘어가지 못했다.
나를 바라보는 자들을 등지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서 도망가면 아군이 다치는 것은 물론 추적 과정에서 관객들도 휩쓸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퇴하는 편이 더 피해가 적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선(善)은 결과만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디토리엄 중앙에 서서 강기의 날개를 두른 일월마군을 잠잠히 노려보았다.
일월마군은 도망가는 나를 미친놈처럼 보다가 내가 멈춰 서자 다시 여유롭게 웃음을 지었다.
복잡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쳤다. 행동의 이유를 이것저것 헤아렸다.
나는 일월신교의 신도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멋대로 준 희망에 몇몇 신도들은 멋대로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기도하고 기대하기 시작했으니 나는 기대에 응해야 했다.
내게는 조금 더 고통받는 것을 참으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학생들에게 어른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벌써 도망가는 것을 가르치기엔 그들은 너무 어렸다.
그리고 카메라.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죽어도 상징은 될 수 있겠구만.
그거면 됐다.
또 다시 선택의 순간이 왔다.
내가 택한 모든 행동이 내 삶을 결정한다.
그것을 업(業)이라고 부른다.
한쪽에는 도망자 혹은 전략가.
다른 한쪽에는 협객 혹은 병신이 있었다.
"마구니야, 네 말이 맞다."
"무슨 말이냐."
"나는 원래 병신이다."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인정하니 마음이 편했다.
도망가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원래 나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싸움광이었다.
뒷일은 모르겠고.
큰 그림도 잊고.
"그냥 한판 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