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 76. 뇌정벽력(Thunderer)(5) >
일월마군을 상대로 주도권을 잡았다.
작은 이득들을 일방적으로 쌓아갔다.
빠지지직─.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뇌강이 끊임없이 명멸했다. 내공을 안배하지 않고 몰아쳤다.
일월마군 몸 곳곳에 번개 스친 자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살 타들어 가는 냄새가 극쾌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난 강풍 사이로 퍼졌다.
몸의 말단 부위보다 몸통에 타격을 허용하는 경우가 늘었다.
팔, 다리, 발, 어깨, 손등, 허벅지, 옆구리, 옆구리, 옆구리.
강기는 강기로 상쇄되었으나 육신 본연의 위력만으로 손해를 누적시켰다.
일월마군의 방어 초식에는 틈이 점점 많아졌다.
얼굴색은 태연했으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응 속도가 조금이나마 느려졌다.
충격이 쌓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순식간에 몇십 수를 교환했다.
대부분은 서로 막고 피했으나 간혹 때리는 것은 늘 내 쪽이었다.
일월마군은 내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팍팍팍팍팍!
그저 피하고 흘리고 때렸다. 일월마군의 전신을 두드렸다.
내가 유리한 건 딱 두 가지였다.
속도와 기술.
일월마군의 내공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장강이 시야를 가리다시피 쏟아졌다. 상하좌우에서 거의 동시에 쏟아졌다.
그러나 완전히 동시는 아니었다.
피했다.
아주 미세한 속도 차이를 이용해 하나하나 흘렸다. 스치듯 가까웠으나 닿지 않았다.
도달하지 않는 이상 힘과 내공의 격차는 의미가 없었다.
강기가 등 뒤를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일월마군의 몸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퍼억!
유효타였다. 느낌이 왔다.
일월마군의 입가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이대로만 가면 머지않아 일월마군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몇십 수면 충분했다.
그러나, 승기를 확실히 잡기 전에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큿!"
변수가 발생한 것은 마선 상대조 쪽에서였다.
일월마군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는 와중에 온전히 기척으로만 상황을 읽었다.
철두철미 암수의 팔 하나가 공중에서 날아가는 중이었다.
마선의 대침이 암수의 팔을 가르고 벽에 꽂혀 흔들리고 있었다.
대신 마선에 왼손에서도 살점 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독공에 피해를 입은 것 같았다.
내게도 쓰게 느껴지는 향. 극독이었다.
마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다, 독괴. 과소평가했던 것을 인정하겠다."
"피해라! 당호철!"
소리치는 독괴의 목소리보다 마선의 침이 빨랐다.
주로 쓰는 팔이 날아간 암수는 반쪽짜리였다.
철두철미의 초절정 암수 당호철은 팔이 잘린 고통을 무시하고 전투를 계속할 의지는 갖췄다.
곧장 반대쪽 팔로 허리춤에서 예비용 비수를 뽑아 마선의 공격에 대응했다.
그러나 그 강철 같은 의지가 강기에 대응할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강기는 강철을 찢는다. 그건 상식이었다.
푸슉.
"아."
그게 당호철의 유언이었다.
한 호흡 전에 팔을 잃은 암수는 강기를 받아칠 능력이 없었다.
강기가 서린 대침은 당호철의 비수를 그대로 꿰뚫고 지나가 정수리를 지나 벽에 박혔다.
철두철미 정예의 허망한 최후였다.
마선이 당호철의 목숨을 취하는 틈에 소걸이 뒤에서부터 마선을 노렸다.
보이지 않는 여의주를 쥔 것처럼 날카롭게 세운 손바닥으로부터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며 마선의 등을 찢었다. 형(形)만을 간신히 갖춘 항룡장이었다.
마선의 옷이 크게 찢어졌다. 어깨와 등에 커다란 절창(切創)이 몇 줄기 그어졌다. 마치 용이 할퀸 듯한 자국이었다. 피가 줄줄 흘렀다.
마선의 상처는 곧장 아물기 시작했다. 초인의 경지에 다른 자연 치유였다. 그러나 아까 이신이 입힌 것에 비해서는 훨씬 큰 성과였다.
아무리 화경이라 한들 몸의 내구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흘린 피도 주워담을 수 없었다. 분명 마선의 신체에 손상이 쌓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마선의 상처는 빠르게 낫는 중이었고 죽음은 비가역적이었다.
마선에게 상처를 꾸준히 누적시키고는 있으나 당호철이 죽으면서 포위망이 다소 느슨해졌다.
갑자기 생긴 공간감.
화경 하나에 초절정 넷이 이루었던 검진에 구멍이 생겼다.
마선의 시선이 이신을 향했다.
"다음."
"……."
마선은 돌아가는 방식을 택했다.
가장 위협적인 자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자부터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그쪽이 정답에 가까웠다.
다수에게 공격받는 사냥감이 순식간에 약자를 노리는 사냥꾼이 되는 길이었다.
물론 그게 마선 상대조에게 무조건 불리한 방식은 아니었다.
결정타를 내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일격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제대로 된 일격은 펼치는 데에는 더 많은 자원을 요구했다.
더 큰 동작, 더 많은 내공, 더 긴 행동 시간. 그건 더욱 치명적인 틈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아주 미세한 차이에 불과했으나 초고수들의 격전에서는 의미가 있었다.
나와 일월마군의 속도 차이 역시 아주 미세했다. 그러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그 한 끗 차이였다.
허공을 지나는 칼이 한 치만 더 길어도 목을 벨 수도 있다.
더구나 마선은 독괴라는 동급의 고수를 상대하는 와중에 하수를 노리는 전략이었다. 극히 위험한 줄타기나 다름없었다.
당장 방금도 마선은 당호철을 제거하는 대가로 소걸의 일격을 맞았다.
마선 상대조도 그 장단점을 확실하게 파악한 듯했다.
초절정들은 즉각적으로 간격을 조절했다.
마선의 공격에 공포를 느끼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명이 비었으니 그래야 했다. 넷이 상대하던 자리를 셋이 맡아야 했다.
위험했으나, 마선이 틈을 보였을 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거리였다.
결국 다들 비슷한 선택을 하는 거였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승리하는 길을 여는 것.
즉, 승부수였다.
목숨을 거는 것.
무인이 칼로 밥을 벌어먹는 이유였다.
"굿 솔루션이야. 닥터."
마선 쪽을 잠시 보던 악절이 싱글벙글하며 몸을 아예 도하나 쪽으로 틀었다.
도하나를 제치고 일월마군을 돕는 것이 아니라 도하나부터 확실하게 상대하려는 듯했다.
그 광경에서 일부러 눈을 돌렸다. 일월마군에게 집중했다.
눈앞에 있는 일월마군을 두고 악절을 막을 수는 없었다. 끌려가는 것은 대개 하책이었다.
대신 내공 순환계를 다시 한 번 조율했다. 좀 더 빠르게.
기맥을 질주하는 내기를 더 거칠게 몰아붙였다.
나 역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도하나가 악절을 오랫동안 데리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화경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하다고 해봐야 한계는 명확했다.
지금이 일월마군과의 일대일 구도를 확실하게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자하신공의 속도와 적명신공 뇌기로의 전환까지 눈 깜빡할 사이에 조정했다.
그 바로 다음 호흡. 일월마군이 양손으로 태극을 그리며 다가왔다. 손끝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거대한 강기를 하얗게 이끌며 다가오는 일월마군의 왼손을 걷어냈다. 팔을 올려쳐 방향을 틀었다. 차가웠다.
남은 것은 오른손 공격.
막지 않았다.
왼쪽 어깨를 세워 그대로 받았다. 오히려 앞으로 나가 타격점을 흩트렸다.
남은 충격은 먹구름에 맡겼다. 그게 호신강기 본연의 역할이니. 잘 통하길 바랄 뿐이었다.
일월신장의 뜨거운 강기가 먹구름의 음기를 증발시키며 다가왔다.
수증기가 시야를 가렸다.
그러나 나와 일월마군 모두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았다.
나는 오른 주먹에 뇌강을 담아 빠르게 찔렀다. 일월마군의 배를 향해서였다. 직전에 일월마군의 왼손을 쳐낸 팔이라 예비 동작이 크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촌경(寸勁, One inch punch). 그러나 뇌강을 가득 담고 있었다.
뿌연 수증기 사이로 일월마군의 커진 동공이 보였다. 의도를 늦게나마 파악한 모양. 그러나 이미 내 주먹은 일월마군의 팔을 지나친 위치였다.
이형환위(移形換位)라도 사용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화경의 기 신경망은 생각하는 즉시 행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간격을 극한까지 줄인다.
그러나 행동 자체를 무한히 빠르게 하는 마법 같은 것은 아니었다.
생각과 행동의 간격이 아무리 짧아도, 생각이 늦으면 결국은 늦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일월마군의 사고가 늦었다.
일월마군이 딱히 방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종일관 빠른 흐름을 가져가던 내가 한 호흡을 그대로 내어주었다. 여차하면 팔을 희생할 각오였다.
일월마군의 공격이 적중했다. 일월마군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 덕에 대응이 늦었다. 그마저도 길지 않았다.
그야말로 찰나였다.
그러나 화경 간의 싸움에서는 모든 찰나가 승부의 분기점인 법이다.
이 찰나는 내 것이었다.
쩌적.
뇌강을 여러 겹 두른 주먹이 일월마군의 단전 부위를 정확히 찔렀다.
일월마군의 장법 역시 내 상박을 그대로 후려쳤다. 장강이 파천신공의 먹구름을 가르고 도달해 근육을 뭉갰다.
"크흡."
일월마군은 한 번 더 피를 토했으나 즉각적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마치 아무 반동도 없는 것처럼 한 발 다가오며 손을 좌우로 빠르게 모았다.
파앙!
나는 발끝만으로 몸을 물려 피했다. 눕듯이 거리를 벌렸다. 일월마군의 손끝이 뺨을 스쳤다. 허공을 가격한 박수 소리가 오디토리엄을 터트릴 듯 울렸다.
닿지 않았으나 살갗이 벗겨지는 것 같이 따끔했다. 찢어진 피부에 피가 묻어났다.
일월마군의 손바닥 끝에는 여전히 강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빗나갔을 리는 없는데.
순간적으로 허리를 뒤틀고 단전의 위치를 조정해 치명상은 피한 것 같았다.
그러나 장강은 분명 이전보다 작고 흐릿했다. 점점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단전에 타격을 받은 것은 확실했다. 내공 축기량의 상당량을 날려버린 모양이었다.
내 경우에는 어깨가 얼얼했다. 그 아래로는 감각이 없었다. 왼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근육이 찢어지고 신경이 괴사한 듯했다. 기 신경망을 당장 복구할 수는 없었다. 운기조식을 통해 시간을 들여야 했다. 이번 싸움에는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이득인 교환이었다.
무인에게 단전보다 중요한 장기는 없다.
결국 내공을 가동하는 기관은 단전이기 때문이다.
내공을 다루는데 문제가 생긴 무인은 반쪽짜리다.
확실하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내공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진원진기부터 내기까지 모조리.
어쨌든 중요한 것은 승부수가 통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단전을 파괴하지는 못한 것 같으나 최소한 흔드는 데는 성공했다.
단전에 충격을 받은 일월마군이 온전한 무력을 유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 화경 치고는 쥐꼬리만 한 내공을 다루는 내 수준까지 일월마군을 끌어내린 셈이었다.
원래 나는 늘 동급 출력에서 항상 최강이었다.
일월마군은 해치운 거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까 다른 변수가 없었다면 말이다.
일월마군은 자기 얼굴 앞에 손바닥을 대고 천천히 흔들었다. 어느새 작아진 강기를 무심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단전이 흔들린 모양이군."
"그래. 이제 끝이다."
"오늘 이런 꼴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일월마군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허나 언젠가는 비슷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지."
"……뭐?"
"설마 너를 상대하는데 쓸 줄은 몰랐으나…… 대비는 진작부터 해두었다."
"무슨 소리냐?"
"내 의지가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검룡."
쿵.
일월마군이 발을 한번 굴렀다.
"교도 전원."
일월마군의 나직한 부름에 전투 중이던 일월신교 이단사냥꾼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눈앞에 칼날을 들이민 철두철미와 개방도까지 도외시하고서. 소름이 돋는 광경이었다.
"일월신단을 복용하라."
"……존명!"
광신도들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그들은 일제히 품 안에서 단약을 하나 꺼내 복용했다.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그 광신도들의 교주 역시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작은 약 상자를 열자 하얀 단약이 하나 있었다. 그 외관이 꽤 익숙했다.
"……그거 뭔데?"
"일월신단."
"일월신단이라고? 돈으로 영약을 사는 네놈들이 신단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있었다.
일월신교에 천하제일연단술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신단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이런 미친."
"누구도 나를 부정할 수 없다."
어느새 약을 복용한 일월마군은 피곤한 눈으로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힘을 가늠하듯이.
다음 순간, 거대한 호신강기를 전신으로 뿜어내며 일월마군이 말했다.
"내가 천마다."
일월신단. 그건 열화핵폭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