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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76화 (76/120)

< 76 : 75. 뇌정벽력(Thunderer)(4) >

이신의 합류는 갑작스러웠다.

가뭄에 단비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중앙 구역에서 교전 중이던 모든 인원이 멈칫할 정도였다.

서로가 동시에 시선을 교환했다. 눈치를 봤다.

교착 상태에서 초절정 하나는 그 정도 영향력을 가졌다.

균형이 맞는 저울은 가벼운 무게추 하나에도 기우는 법이다.

물론 이신은 후기지수에 불과했다. 초절정이라 한들 아직 어린 학생이었다.

도움을 받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햇병아리의 날개라도 빌려야 할 처지였다.

나는 즉시 독괴에게 전음했다.

─그쪽으로 보내줄까?

─아니. 포위 역할은 지금도 남아도는 상황이다. 공간이 부족해. 어린 검수 하나 추가된다고 상황이 바뀔 것 같지는 않군.

─그 어린 검수가 화경을 맞상대하게 두는 것보다는 낫잖나.

─그것도 그렇군. 그럼 대신 이쪽에서 한 명을 데려가라.

─나쁘지 않군.

─누굴 보내줄까?

데려올 수 있는 것은 딱 한 명.

나는 마선과 대치하고 있는 초절정의 명단을 쓱 훑었다.

소걸, 도하나, 먼지. 거기에 철두철미의 암수 하나가 있었다.

두드러지는 한 사람이 없었다. 각자 장단점이 있었다. 지금 상황에 가장 적합한 고수를 데려와야 했다.

가장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것은 도하나였고, 상승 장법을 상대하는 데에 익숙한 것은 항룡장을 배운 소걸이었다.

맷집이 가장 좋은 것은 먼지였고, 후방 교란 및 견제 측면에서는 암수가 가장 쓸모 있었다.

그냥 이신을 보조로 쓰는 방법도 있었다. 당장 나와 가까운 것이 장점이었다. 지금은 일 초가 아까운 상황이었으니.

그러나 완성하지 못한 청룡검법이 일월마군과 악절에게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잘 벼린 살인기술도 급이 맞아야 통하는 법이었다.

또 경지에 오른 지 오래된 화경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애송이보다는 비교적 완숙한 초절정이어야 비벼볼 수라도 있었다.

그러니 일단 이신은 제외.

결정을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눈 두어 번 깜빡할 시간이 전부였다.

극히 짧은 사고의 순간에도 세 명의 상대 측 화경은 각자 최선의 위치를 잡고 있었다.

모든 걸음이 위협적이었다.

상대는 무투의 대가인 장법 고수와 원거리 견제에 능한 음공의 고수 조합.

모든 간격에서 까다롭고 특별한 약점이 없었다. 무난한 조합이었다.

화경이 무난한 조합을 이루었다는 것은 틈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둘이 여태 호흡을 맞춰본 적이 없었겠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싯적에 화경을 이룩한 무공 귀신들이었다. 짧은 교전 동안 이미 서로의 무공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이미 상당한 수준의 합격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저런 조건들을 따져봤을 때 가장 적합한 사람은──.

──딱히 없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이 그나마 나았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내 목숨줄을 맡길 수 있는 사람.

─도하나 보내줘.

─광녀(狂女)? 알았다. 하긴 그날 단독으로 나를 막아서려 한 계집이니 지금 상황에도 적절하겠군.

─……광녀라니?

─미안하다. 실수로 당가 내에서만 유행하는 별호를 사용해버렸군.

─당가엔 그런 별호가 통용된다는 말이냐? 어이. 대답.

답장은 없었다.

마선 상대 조에서도 전음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숨을 짧게 내뱉으며 이신에게 전음했다.

─틈이 생길 거다. 곧장 마선 쪽으로 합류해라.

─예.

이신이 흐릿한 전음으로 답했다. 별다른 반문 없이 마선 쪽으로 뛰었다. 등 뒤에서 뽑아든 장검에 검화를 피워올린 채였다.

마선을 둘러싼 초절정들 역시 병장기에 일제히 화기를 피워올리고 마선을 압박했다. 각 방위에서 한꺼번에 몰아쳤다.

동시에 정면에서는 독괴가 독강으로 만든 륜을 교차하며 좌우로 그었다.

마선의 대응도 빨랐다.

쾅!

초절정들이 발경하는 순간에 맞춰 발을 굴러 땅을 울렸다. 가까운 바닥이 부서지며 오디토리엄이 흔들렸다.

초절정들의 공격은 힘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채 마선이 두른 연황색 호신강기에 부딪치고 흩어졌다. 힘을 온전히 싣지 못한 여파였다. 위력이 모자랐다.

그 사이 마선은 발 굴림으로 발생한 힘을 그대로 팔로 전달해 독괴의 공격을 받아쳤다.

황금빛 강기를 두른 대침과 독강의 륜이 맞닿아 있었다.

끼기기긱!

어느 한 쪽도 쉽게 밀리지 않았다. 잠시간의 교착 상태. 접촉한 강기가 부서지듯 흩날렸다.

그거면 충분했다.

도하나는 마선에게 도화를 날린 직후 반탄력을 이용해 이쪽으로 튕겨져 왔다. 악절이 있는 쪽이었다.

그리고 도하나의 빈자리에 이신이 들어가며 장검을 앞으로 찔렀다.

출수 거리가 멀었기에 발경 시점이 마선의 발 굴림보다 빨랐던 일격이었다. 흔들림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발경력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픽!

이신의 검화가 얕게나마 마선의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갔다.

마선의 등쪽 옷감이 갈라졌다.

퉁!

이신은 마선의 호신강기가 회복되는 순간 반탄력에 의해 멀리 튕겨져 나왔다.

흐트러진 자세로 세우고 있는 검 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아주 적은 양이었지만 그래도 피였다.

"출혈……."

소걸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확인한 초절정들의 눈이 일제히 빛났다.

마선이 오늘 초절정에게 입은 첫 상처였다.

물론 마선의 출혈은 순식간에 멎었다.

절단된 근육의 움직임마저 조절할 수 있는 수준의 고수였다. 얕은 자상은 큰 의미가 없었다.

상처는 분명 의미가 없었지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초절정의 공격이 마선에게 미친다는 사실.

마침내 확인했다.

말벌의 침이 잠재적 위협에서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마선은 느릿하게 손을 털어 고개를 돌렸다. 마선의 금빛 강기와 독괴의 독강륜이 일제히 흩어졌다.

독괴는 그 순간 한발 앞으로 내딛으려다가 태연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마선의 왼손이 침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너를 안다. 어린 검수. 오성이 제법이다. 소룡은 물론이고 여기 인공 영물보다도 못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교수님은 그렇다 쳐도 먼지가?"

"어린 개가 약관의 인간과 같은 격을 이루었으니 당연한 평가다."

"……말은 맞는데 어째 기분이 이상한데요."

"휘둘리지 마라, 이신. 칼에 집중해."

소걸이 봉을 허리춤에 찔러놓고 장법을 준비하며 이신에게 조언했다.

이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장검을 높이 세웠다.

초절정들의 눈에 의지가 깃들었다. 가능성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기색이었다. 화기가 휘몰아치며 공기를 데웠다.

"침착함을 유지해라. 조급해질 필요 없다. 해온 것처럼만 하도록."

오히려 독괴가 한 번 말릴 정도였다.

초절정들이 서서히 기세를 가라앉혔다.

옳은 판단이었다.

마선은 의지만 앞선다고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삼대 의선. 침과 독과 약의 고수. 화경. 천하제일연단술사.

한 번 쏘였다고 쉽게 무너지는 인간이 아니었다.

여전히 승부의 향방은 독괴와 마선의 손에 달려 있었다. 초절정은 거들 뿐.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만 압박을 계속하면 된다. 그거면 충분했다. 실수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아무 기색 없이 독괴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초절정들이 바로 발을 맞췄다.

전체적인 상황이 분명 미세하게나마 기울었다. 우리 쪽 저울추가 더 무거웠다.

마선을 한 번 상처를 입힌 것도 의미 있었지만 나를 돕는 보조가 생긴 것도 컸다.

마선이 감히 나와 개를 비견하던 순간에, 이미 도하나는 악절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일종의 기습이었으나 악절은 고개를 반만 돌려 여유롭게 날아오는 도를 응시했다.

"제이드 글로우(Jade glow)? 영걸(Young girl), 유 화산 출신이야?"

"뭐래. 나 백두산 출신."

도하나가 짧게 대답하며 도를 마저 휘둘렀다. 옥빛 도기가 도의 궤적을 따라 굽이쳤다. 옥녀신공이었다.

악절은 기타 줄을 한 번 튕겨 음탄으로 공격을 가볍게 쳐내었다.

도하나는 도를 바닥에 긁으며 주욱 밀려갔다.

그 정도 격차였다. 강기를 담지도 않은 음탄에 전신이 밀려날 정도. 악기를 들고 있는 악절은 역시 위험했다.

역시 도하나는 보조로만 써야겠군. 잠깐 시간과 시선을 끄는 정도.

"블레이드 다루는 게 스킬풀한걸."

"나 영어 몰라."

"당신의 옥녀신공 몹시 훌륭하다."

"땡큐."

대답하며 도하나는 도화를 피워올렸다.

별 다른 소통 없이도 도하나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화경 고수 두엇을 상대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동유럽 내전을 포함한 몇몇 상황에도 도하나는 오늘 같은 보조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 상대한 자들은 화경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낭인 고수들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오늘처럼 완숙한 화경을 여럿 상대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미 닥친 일인데.

─잠깐만 잘 버텨봐라, 하나야.

─네, 사형.

또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7년 분량의 내공으로 단기 결전 승부를 봐야 했던 때와 달리, 지금은 거대 기공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 총량은 갖추었다.

도하나가 벌어준 아주 잠깐의 틈.

그 잠깐 동안 나는 일월마군과의 일대일 구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지금 이득을 봐야 했다.

뇌강을 양손에 두르고 일월마군을 후려쳤다. 일월마군은 양손을 번갈아가며 대응했다.

뜨겁고 차가운 장강이 뇌강과 어우러졌다. 연속적으로 부딪치며 태우고 증발시키고 섞이고 나뉘었다.

전신이 무기인 박투가와의 교전이었다. 눈 깜박할 새도 없이 팔과 다리를 뻗고 지르고 휘둘렀다.

극쾌에 달한 주먹이 소리를 뒤에 남겼다. 소리가 찢어지고 터지며 따라붙었다.

쾅쾅쾅쾅쾅쾅!

피육이 부딪히는 곳에서 폭발음이 연속적으로 들렸다. 강기끼리 부딪쳐 터지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많은 내공을 쏟아냈으나 나와 달리 일월마군은 아직 여유가 넘쳐 보였다.

하긴 신도들에게 뜯은 돈으로 영약을 물처럼 들이켰겠지. 빌어먹을 사이비 교주 같으니라고.

나는 내색하지 않고 일월마군의 공격을 피하고 받아쳤다. 서서히 피하는 비중을 올렸다. 어쩔 수 없었다.

팍!

주먹으로 옆구리를 한 대 갈겼다. 마주 뻗어오는 일월마군의 팔은 옆으로 밀었다. 차가운 장강이 내 허리를 닿을 듯이 지나갔다.

내가 더 빨랐다.

다시 같은 곳을 한 번 더 후려쳤다.

뇌강은 일월마군의 호신강기를 뚫는 과정에서 대부분 상쇄되었다. 옆구리에 도달한 것은 거의 기가 실리지 않은 주먹에 가까웠다.

그러나 화경은 육신 자체가 전투 병기였다. 빠르고 무거운 주먹은 일월마군의 내장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크지 않은 타격들을 순식간에 쌓아갔다.

일월마군의 수가 눈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보였다. 이해의 과정이었다. 밀도 높은 교전 중에 일월신장의 이치를 체득해가고 있었다.

동시에 뇌강을 다루는 것에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없이 튀어 오르는 반발력과 방향. 슬슬 감이 잡혔다.

지피지기였다.

질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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