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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74화 (74/120)

< 74 : 73. 뇌정벽력(Thunderer)(2) >

"그대는 천마다. 진짜 천마가 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

그 말을 뱉으며 마선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걸음걸이는 늘 그렇듯 여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심히 아니꼬웠다.

"일개 의원 따위가 진짜 천마를 결정할 권리를 가진 줄은 몰랐구나."

"그런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니 소룡 너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건 보면 될 일이다. 아무튼 그 낯짝도 꽤 반갑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니까 말이야."

마선은 나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 뒤에서 범상하지 않은 기색의 무인들이 무리 지어 걸어나왔다.

"일월신교에 들인 공이 적지 않다. 소룡, 네게 흥미는 있다만 이렇게까지 날뛰는 것은 곤란하다."

무인들은 일월신교의 문장이 새겨진 의복을 입은 자들이었다. 익숙한 복색을 아주 조금만 바꾼 형태의 활동복이었다.

천마신교의 이단 사냥꾼들의 전투복.

색감만 조금 다를 뿐이지 전체적인 만듦새는 거의 비슷했다. 원본을 아주 철저하게 표절한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천마신교의 이단이었다.

쿵!

"천마재림 만마앙복!"

무대에 차례대로 나온 무인들이 일제히 무대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동시에 장내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다.

순간적으로 분위기를 장악할 정도의 존재감.

실제로 그 무위가 상당했다.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경지는 최소 절정에서 초절정이었다.

천마신교의 이단 사냥꾼들이 그렇듯 이들 역시 교내 최고 전력인 듯했다.

정예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은 예상했는데 무대 뒤편에서 마선과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월마군이 그들을 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왔다. 나의 아이들아."

"천마님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

"변절자와 이단을 벌하겠습니다! 부디 명을!"

나는 그 광경을 보다가 고개를 슬쩍 돌려 장로들 쪽을 바라보았다. 예의 변절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사천 주교가 고개를 저었다. 회유에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이단사냥꾼은 교주 직속 부대였다. 일월신교의 광신도 중에서도 일월마군에 대한 철저한 믿음으로 미친 자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 회유가 안 통한 모양이었다. 장로놈들, 라면만 잘 먹지 쓸모가 많지 않은 작자들이었다.

한순간 전력의 우위를 가진 일월마군이 여유롭게 웃었다.

"자, 이제 어쩔 텐가? 검룡. 화경과 휘하 고수들의 숫자가 모두 밀리는군."

물론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게 단가?"

"뭐?"

"이게 전부냐고 물었다."

"……미친 거냐? 화경만 셋에 초절정이 스물이 넘는다. 얕볼 수 있는 전력은 아닐 텐데?"

"이게 다라는 뜻이군. 확인."

한번도 얕본 적은 없었다. 내 쪽에서도 많은 것을 걸고 펼치는 전투였다. 도사로서의 명예부터 목숨까지.

일월신교를 취하고 마선을 잡기 위해 대비는 할 수 있는 만큼 해둔 상태였다.

아직 철두철미만 해도 전투에 돌입하지 않는 여유 전력이 많았고, 일월신교의 정예를 대비한 전력도 따로 있었다.

당초에는 혹시나 출현할지 모르는 마선을 포위하기 위해 외부에서 진을 펼치고 있었지만, 마선이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으니 더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손목 시계를 누르고 짧게 무전했다.

"마선 발견. 오디토리엄으로 집결."

그때쯤 무대에 이단사냥꾼들이 들어오면서 악절과 교전을 끝낸 독괴가 곁으로 합류했다.

시선은 마선을 향한 채였다. 명성 높은 사천당가의 장로로서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거물이었다.

당문 무력단체의 수장이었던 사람답게 머릿속으로는 전력을 계속 비교하고 있을 것이다.

"자칭 재림천마, 혹시 지원 병력 중에 화경도 있나?"

"욕심도 많군. 알고 있는 전력이 전부다."

"하. 그렇겠지. 그럼 '저건' 어쩔 텐가. 저쪽은 예상보다 화경이 하나 늘어났는데?"

"저거? 독과 약은 한 끗 차이 아닌가? 마선은 무명소졸 대협이 맡도록."

"……미친 건가? 나보고 악절하고 마선을 동시에 상대하라고?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나는 진작 당문제철을 먹었을 거다."

"아니. 마선만."

"……마선만?"

독괴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철두철미가 장악하고 있던 출입구가 다시금 열렸다.

"개방도 출두요!"

"사형!"

"아우우우우우!"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오디토리엄 전체를 울렸다.

컨벤션 센터를 포위하고 있던 초절정 전력들과 개방도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그래. 이단사냥꾼과 균형을 맞춘 후 남는 초절정과 무명소졸 대협이 합공하여 마선을 상대한다. 절대 놓치지 말도록."

"……그럼 악절은?"

"악절과 일월마군은 내가 맡는다."

"……둘을 동시에? 진심인가?"

"진심이다."

나는 초연한 얼굴의 일월마군과 곁에서 웃고 있는 두 화경의 얼굴을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하나는 미소였고 하나는 폭소였다.

"진짜 천마라면 그 정도는 해야겠지."

"알겠다. 최대한 마선을 빨리 처리해보도록 하지."

"그럼 좋고."

기세 좋게 말은 했으나 내게도 화경 둘을 상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어쩔 수 없으니 그런 결정을 내렸을 뿐.

일월마군은 이미 파천신공의 강기를 갈무리한 상황이었다.

나와 뇌강에 대한 질답을 하며 일종의 심마를 깨트린 것 같았다. 딱히 그런 걸 바라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일월마군은 오른손은 가슴 앞에 세우고 왼손은 배 앞에 눕힌 반장(半掌)의 기수식을 취했다.

탁한 뇌기 대신에 백색의 기운이 곁을 감쌌다.

가장 잘하는 것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에게 일월마군이라는 별호를 선물해준 성명절기였다.

천마신교 비전 일월신장(日月神掌, Lunisolar light).

음기와 양기를 동시에 다루는 상승 장법이었다.

곁에 있는 악절도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절이라는 별호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합공하는 상황을 달가워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인이란 작자들은 대개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독절과의 교전에서 꺼내지 않았던 전력을 모두 드러낼 거로 생각해야 했다.

버티는데 집중할 생각이었다.

숫자에서 밀린다고 한들 승리가 아니라 대치를 목적으로 하면 버틸 자신이 있었다.

기운을 최대한 갈무리했다.

파천신공의 먹구름이 몸을 스치듯 얇게 덮었다. 뇌기는 있는 듯 없는 듯 아주 작은 형태로 먹구름을 떠돌았다.

검강을 얇게 다루는 방식이 도움되었다.

어느새 철두철미의 정예들이 뒤에 도열해 있었다. 도하나와 소걸, 먼지도 곁에 섰다.

독괴가 빠르게 인원을 배분했다. 철두철미와 이단사냥꾼들이 정면으로 대치했다.

"조속히 마선을 때려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지. 건투를 빈다."

서로 준비가 끝났다. 뒤는 없었다. 앞으로 갈 뿐이었다.

"개전(開戰)."

***

고무림 기자 제갈성혜는 얼빠진 표정으로 카메라만 쳐다보고 있었다.

일류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과연 화경 고수들의 접전이었다.

화산검룡이 뭘 하는 것 같더니 번개가 튀었고 일월마군이 어느새 튕겨 나가더니 천장이 박살 났다.

이 장면이 카메라에 제대로 담기기는 할지 의문이었지만 기도하면서 일단 찍을 뿐이었다.

제 몸값보다 비싸다는 카메라의 사양이 부족할지 모른다고 걱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이후는 더 놀라웠다.

잠깐 소강상태가 된 듯하더니 무대 뒤에서 무인들이 걸어나왔다.

그 선두에 선 자는 제갈성혜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세계 삼대 의선. 마선.

그러더니 광장에서 예상했던 대로 개방도들이 참전했다. 일월신교의 교도들과 마주 섰다.

흡사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한국에서 이만한 난리가 일어난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카메라만 무사히 들고 가면 특종 몇 편은 확실한 수준이었다.

그때쯤 철두철미 몇 명이 우르르 다가왔다.

제갈성혜는 잘못한 것도 없지만 괜히 몸을 움츠렸다. 옆에 초절정 호위가 있었지만 철두철미 여럿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갈성혜의 곁에 선 것은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자율무공학부의 학생들을 보호하는 움직임을 취했다.

제갈성혜는 귀를 쫑긋 기울였다.

"당신은 1반의……."

"지금은 백의종군하는 중입니다. 아가씨. 저희가 보호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1반. 아마 철두철미 1반을 의미하는 것일 테였다. 소위 VIP 전담반.

'그야 투희가 VIP가 아니면 누가 VIP겠어.'

백의종군이라고 하는 걸로 보아하니 독괴의 난에 참전해 처벌을 받은 인물인 모양이었다.

하긴 독괴가 저기 눈앞에 있는데 당연히 그 부하겠지.

"기자님."

"네, 녜?"

학생들에게 귀 기울이고 있는데 제갈성혜에게 다가선 철두철미 대원이 말을 걸었다.

제갈성혜는 괜히 혀까지 씹으며 화들짝 놀랐다. 호위가 긴장한 모습으로 그 앞을 막았다. 대원이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켜 드리려는 것이지요. 지금 이 광경, 잘 찍어 주십시오."

"잘 찍으라고요?"

"아, 근데 나가시기 전에 카메라에 찍힌 내용을 저희가 확인 좀 하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제갈성혜는 잠깐 머리를 굴렸다.

"검열하고 남은 건 기사로 내도 된다는 거죠?"

"이해가 빠르시네요."

철두철미 대원이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당가 측에 흠이 될 만한 것은 삭제하겠으나 이 자리에서 찍는 것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겠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일개 기자가 당가와 척을 지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기자다운 기자는 제갈성혜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죄다 일월신교 측 언론이었고, 최고급 카메라를 가져온 것은 제갈성혜가 유일했다.

당가의 검열을 거치고 남는 부스러기만 건져도 특종 독점은 확정이라는 뜻이었다.

"잘 찍어 볼게요."

"부탁합니다. 어쩌면 역사에 남을 장면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제갈성혜는 내심 동의하며 다시 카메라에 얼굴을 처박았다. 확실히 무림 현대사에 남을 만한 일이었다.

귓가에 학생들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어왔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내가 들은 게 맞나? 교수님이…… 천마라고?"

"교수님이 교주님이라고?"

"넌 이 상황에 그딴 농담하고 싶니?"

"웅. 캐치프레이즈로 좋지 않아? 나중에 먼튜브 썸네일로 써야겠다. 아니, 지금 고무림에 썰 풀어야지."

"학생. 하지 말지."

"……네."

헛짓거리를 하려는 최수아를 철두철미 경호원이 제지했다.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독괴…… 대협이랑 소걸 교수님은 또 갑자기 어떻게 온 거고."

"보이는 게 다가 아닌 느낌인걸."

학생들은 당황했다.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한 상태였다.

믿고 따랐던 교수가 사이비 종교 장로라고 해서 확인해보러 왔더니 이제는 그냥 장로가 아니고 천마란다.

그것도 화산파 도사인 데다가 역대 최연소 화경인 위인이 말이다.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계속 의견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마선 저 사람 무림공적이잖아. 교수님이 일월신교 교주랑도 대적하는 분위기고. 김산 교수님이 일월신교 장로가 된 건 내부 첩자 같은 거였던 게 아닐까?"

"하긴 화산, 개방, 당가 대 일월신교, 마선, 악절인 분위기이긴 하네."

이윽고 학생들의 의견은 김산에게 우호적인 쪽으로 결정 났다.

"내가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했잖아. 우리 교수님이 나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그럼 우리가 도와야 하지 않을까? 좀 밀려 보이는데."

"안 됩니다."

잠자코 있던 철두철미 경비가 끼어들었다. 개중 최고참으로 보이는 자였다.

"화경을 포함한 고수들이 다투는 격전지입니다. 후기지수가 끼어들 수 있는 싸움 수준이 아닙니다. 게다가 상대는 광신도들. 아가씨, 도련님들의 사정을 봐줄 거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정론이었다. 원지혜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독괴의 난 때도 느꼈지만, 아직 실력이 많이 모자랐다.

다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는 가봐도 되겠습니까?"

"야, 야……. 너 미쳤어? 어딜 가?"

"자네는……, 감히 내가 말릴 자격이 없지. 권장하지는 않네만."

"감사합니다."

"야, 가지 마!"

제갈성혜의 카메라에 무대로 향하는 해왕환생의 뒷모습이 찍혔다.

이신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남은 학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갔다 올게."

"……안가면 안 돼?"

"여기서 보고만 있으면 후회할 것 같아."

"……다치지 마. 다치면 너 죽는다."

"자신은 없지만. 응."

이신은 태연하게 웃은 후 다시 몸을 돌려 뛰어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머지 학생들은 약간의 자괴감마저 느꼈다. 자신들은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니까.

초절정. 동년배임에도 완숙의 경지에 달한 이신에 대한 열등감이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다른 학생들 역시 수련을 부족하게 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자신의 수련 부족을 탓하게 하는 뒷모습이었다. 재능이 출중한 후기지수들이었기에 더 그랬다.

김산이 살아오면서 동시대의 후기지수들에게 남긴 것과 비슷한 상처였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보면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무인의 상처는 깨달음과 각오의 원천이기 때문이었다.

김산과 함께하며 김산 시대의 후기지수들이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것처럼, 자율무공학부의 학생들은 이신을 기준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반대로 선두주자는 항상 미답지를 달려야 했다. 항상 아득했다.

그러나 아직 어린 학생들의 마음에는 아릿함이 스칠 뿐이었다. 일제히 입술을 깨물며 눈을 부릅뜨고 현장을 지켜보았다.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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