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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68화 (68/120)

< 68 : 67. 천마재림(The second coming of the chosen one)(1) >

장로들에게 마선에 대한 정보도 추궁했지만 그에 대해선 들을 수 없었다.

"워낙 행적을 철저하게 숨기시는 분이라……."

"천마님, 아니, 일월마군을 제외하면 교내에 연락하는 자가 따로 없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하긴 무림공적으로 취급되는 자가 자취를 쉽게 남기고 다닐 리가 없었다. 문제가 터지면 일월신교마저도 버리고 날라버릴 인간이었다.

만약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일월마군을 처리하기 전에 연락 수단을 얻어내는 것이 최선으로 보였다.

역시 장로 회의 당일 어떻게든 족쳐야 했나?

일월마군까지 동시에 상대하는 것도 감수해야 했을까?

잠깐 생각해봤으나 아무래도 그건 무리였다.

일월마군의 경지가 내 생각보다 훨씬 위였고 마선의 존재는 예상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미리 알았다면 맹에 도움을 요청하고 자하신검 진본을 챙겨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무림공적과 협력했다는 것만으로 일월신교까지 한 번에 쓸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지만 과거의 일이었다. 앞으로 남은 것을 잘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계절학기가 끝나고 잠깐의 방학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검을 휘두르는 하루를 반복했다.

그러던 사이 2학기가 개강했다. 학생들과는 이전보다 서먹했지만 수업에는 지장이 없었다.

사이비 종교의 장로를 꺼리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 기꺼웠다. 이제는 실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정파의 동량들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원지혜를 필두로 한 몇몇은 대놓고 나를 어려워했다, 때문에 나와 여전히 친하게 지내려는 아이들과 사이가 멀어질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원지혜를 위시한 학생들의 친밀도와 단합력이 자율무공학부의 장점이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등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은 직업 무인을 꿈꾸는 아이들이었다. 공과 사는 별개여야 한다.

나 혼자 도맡던 1학기 초에 비하면 과에 다른 교수들이 많아진 것도 도움이 되었다.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겼다.

삼재공의 경우에는 먼지 사건 때 알게 되었던 이정은 교수가 나눠 맡았고, 정교수로 단기부임한 소걸 역시 비무 과목을 맡았다.

나는 계속해서 일월신교에 개입할 준비를 했다.

이쪽으로 돌아선 장로들에게 일월마군과 일월신교에 대한 정보를 듣고 향후 방침을 정했다.

무력적 준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소 두 명의 화경쯤은 생각해야 했다. 그 외에도 고수들이 많이 참석할 것이다.

일월신교에서 신경을 많이 쓰는 행사였다. 우리도 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아무래도 사이비 교주 자리에 도전하는 만큼 무림맹에 직접적으로 병력을 요청하기는 힘들었다.

마선이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는 것은 하책이었다. 정보가 샐 수도 있었고, 만약 마선이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 그냥 무림맹원들 앞에서 화산파 도사가 천마가 되는 꼴만 직관시켜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믿을 만한 자들만 추렸다. 그래봤자 화산파를 제하면 개방과 당가가 전부였지만.

하오문의 도움은 받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소속원이 정예가 아닌 이상 정보 유출의 가능성이 컸다.

개방은 오랫동안 나와 손잡아오며 목표를 함께했기에 믿을 만했다.

당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일월신교를 용납할 생각이 없는 한국의 독재자였다. 적의 적은 아군이기에 오히려 믿을 수 있었다.

병력과 고수를 지원받았다.

가장 먼저, 개방의 소걸 및 절정 수준의 무력개(武力匃)들.

"김 형. 믿겠소. 가는 걸음이 진흙탕이라도 길 끝에는 협이 있어야 하오."

"안다. 진흙탕을 함께 걸어줄 방도들에게도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겠소."

개방도들은 소리 없는 포권으로 내 인사를 받았다.

다음으로, 화산코리아의 무력 단체, 산매(山梅)의 검수들.

초절정 몇에 대부분은 절정이었다. 화산코리아에서 2군 역할을 맡은 무력 단체였는데 경험도 쌓을 겸 도와주러 보낸 모양이었다.

백무강 사형은 아쉽게도 오지 못했다.

하긴 백 사형이 이런 데 낄 짬은 아니었다. 내가 재림천마를 주장하는데 화산파가 공식적으로 지지하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었다.

화산파 문도들은 내 정확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으나 나를 아주 존경하는 낌새였다.

"사조! 뭐든 명하십시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겠습니다!"

"……어,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산매검수들은 검룡 사조의 검이 될 것입니다! 저희를 믿어주시고 불러주신 것에 대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그, 그래. 고맙다. 잘하자."

"넵! 저 산매일검 휘하 산매들의 활약을 기대해주십시오!"

의욕이 넘쳐 보이니 다행이었다. 내가 일월신교를 불법 사이비 단체를 벌하기 위해 이중첩자로 들어간 거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비슷하긴 한데 그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른 방향일 것이기에 조금 긴장이 되었다. 갑자기 칼침 놓지는 않겠지?

그 외 일월신교의 장로들과 몇 없는 휘하 병력들도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라면만 먹을 일은 없을 거요."

"……잘 부탁하겠습니다."

장로들이 초췌한 얼굴로 답했다. 평소에 얼마나 잘 먹고 다녔는지 겨우 몇 주간 라면 좀 먹게 했다고 살이 빠진 자들이었다.

딱히 믿음을 주지는 않았다. 회의장 내에서 입만 적당히 잘 털어주고 발목만 안 잡으면 다행인 자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당가의 비공개 전력들이 있었다.

사실은 이쪽이 오늘의 주요 전력이었다.

모종의 사건으로 직위 해제된 당가의 죄인들.

다수의 초절정 및 절정 고수.

그리고 화경 한 명.

한국에서의 독보적인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지원을 많이 해준 느낌이었다.

하긴 사사건건 까다롭게 굴 것이 뻔한 사이비 종교 교주에게 무인협회장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당가가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설마 당신이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당가에 할 일 없는 고수는 나 정도이니 말이다. 생각보다 일찍 백의종군을 하게 됐군. 고마워해야 하나?"

"고마워할 필요까지는 없고. 싸우다 말고 등에 독침을 놓지 않으면 충분하다."

"내가 왜 그러겠나? 지난 일 때문에? 네가 나보다 뛰어났을 뿐이다. 딱히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당초아가 당수련과 비견할 만한 세력을 얻었으니 내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가? 다행이군. 어쨌든 환영한다. 와줘서 고맙다."

당가의 선두에 있는 남자는 익히 아는 자였다.

큰 키. 독공 특유의 녹빛으로 번들거리는 동공. 한여름에도 끼고 있는 새하얀 면장갑까지. 모두 익숙했다.

사천이괴라 불리는 독공 고수.

독괴 당천갈이었다.

그리고 휘하 독과의 난 사건으로 직위 해제된 철두철미의 간부 및 사천당가 직계파 50여 명.

당가의 문양도 철두철미의 휘장도 달지 못하고 쿠데타의 대가를 치르기 위하여 백의종군하는 이들.

이번 일월신교를 뒤집기 위해 당가로부터 지원을 받은 인원이었다.

명백하게 이번 일에 있어 아군 최대 전력이었다.

"고마워할 것은 없다. 일월신교 같은 사이비가 당가의 자리를 넘본다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나던 참이었으니."

"그래. 동의한다. 착취하더라도 초국적 문파에서 대놓고 하는 게 상대하기 편하지. 이런 경우는 나도 질색이다."

"당가는 착취를 하지 않는다만? 항상 정당한 대가를 치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걸로 하지."

참고로 당가놈들은 극한의 실리주의를 추구한다. 도의나 도덕 같은 것은 그들이 고려하는 요소가 아니다. 그저 결과만이 중요할 뿐.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정당한 대가는 을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가격을 의미한다. 후려칠 만큼 후려친 조건.

그걸 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 냄새 대신 쇠 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게 당가의 정체성이니 뭐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준비는 할 만큼 했다.

나는 자하신검 진본과 레플리카 두 자루를 챙겼다.

"장로들은 이만 같이 들어가지. 나머지는 신호하면 들어오도록."

"……알겠소. 김 장로."

"김 형, 건투를 빌겠소."

"사조님! 신호를 기다리겠습니다!"

"좀 이따 보도록 하지."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가 이뤄지는 장소는 사천 컨벤션 센터였다.

지원 병력은 근처 당가 소유의 건물에 대기시켜둔 채 나와 장로들만 각자 자동차를 타고 센터로 이동했다. 나는 도하나의 스포츠카를 타고 이동했다.

센터 앞부터 화려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카메라와 기자들이 가득했다. 대부분은 일월신교에 친화적인 매체에서 온 자들이었다. 소수지만 정상적인 방송사에서 온 자들도 있기는 했다.

나야 이름을 잘 몰랐지만 지나가다 방송에서 본 것 같은 연예인들도 꽤 있었다. 하여튼 돈은 썩어 넘치는 재단이었다.

도하나가 먼저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사형, 가요."

"그래."

나는 옷매무새를 한번 정리하고 차를 나섰다. 자하신검 진본은 왼쪽 허리춤에 매고 레플리카 두 자루는 각각 등 뒤와 오른쪽 허리춤에 매었다.

순간 커다란 환호성이 들렸다.

"와아아아아아!"

"화산검룡이다!"

"장로님이라고 불러야지!"

근처에 있던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눈이 반짝이고 입과 눈의 곡선이 맑았다.

대부분은 호감과 존경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애초에 일월마군이 이런 그림을 예상하고 나를 영입한 것이겠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니 기분이 묘했다.

여기 멀쩡해 보이는 자들 대부분이 사이비 신도라는 것. 그리고 누군가는 나를 보고 새롭게 사이비 신도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뭐 곧 끝낼 수 있는 문제였다.

"반갑습니다, 화산검룡 장로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평화일보 최상훈 기자입니다! 한 말씀 부탁해도 될까요?"

신도들과 기자들이 주변으로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내게 말을 붙이는 아이돌인지 연예인인지도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도하나가 말없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자들을 밀쳐냈다.

"일월신교 교주가 무인협회장 보궐선거에 출마한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잠깐."

여기자 하나가 인파를 뚫고 내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주변의 살벌한 시선에도 꿋꿋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고무림의 제갈성혜 기자입니다."

고무림. 당가와 일월신교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을 세력이었다. 인터뷰를 할 만했다.

"짧게 말하겠소. 일월신교 교주가 무인협회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소문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나는 그를 지지하겠소."

"일월신마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겁니까?"

나는 그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았다.

그냥 컨벤션 센터로 뻗은 길을 다시 걸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일월신교 교주는 일월마군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늘 일월신교의 교주가 바뀔 예정이었다.

일월신교라는 종교의 근본이 흔들릴 일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돈과 권력이 탐나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제갈 기자."

"네, 네? 저기 놔봐요!"

주변 경호원에게 끌려가던 제갈 기자가 멈춰 섰다. 내가 말을 걸자 경호원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오늘 컨퍼런스에 꼭 참석하시오. 재밌는 일이 있을 테니까 말이오."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무림이라면 확실히 파급력이 있는 국제 언론이었다.

사이비 재림천마가 바뀌었다는 것을 널릴 알릴 수 있는 언론.

내가 따로 여론몰이를 하는 것보다 그냥 특종을 쓸 수 있는 기자 하나를 넣어두는 것이 편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걸었다.

컨벤션 센터로 입장했다.

아직 더위가 끝나지 않은 9월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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