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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67화 (67/120)

< 67 : 66. 내부자들(Insiders)(3) >

다른 사람은 몰라도 광명우사가 포함된 것은 의외였다.

나이도 지긋하게 먹었고 수염을 신선처럼 기른 외관에 장로 회의에서 가장 먼저 나섰던 모습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충심이 강한 자인 줄로 알았는데.

게다가 광명우사라고 하면 일월신교가 천마신교의 제도를 가져왔다고 했을 때 못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리였다.

일월마군과 생사를 함께할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그 우정 혹은 충성심이 목숨을 걸 정도로 굳건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그 외의 장로들도 비슷한 처지긴 했다.

장로들 대부분은 일월마군이 재림천마를 자칭하며 천마신교를 나올 때 함께 교를 나온 오랜 지기들이었다.

목숨이 걸린 게 아니었다면 쉽게 배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수들에게 미치는 무형지독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군. 일월신교의 창립자들 아닌가."

장로들도 염치는 있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가장 앞에 있던 광명우사는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미 한 번 배교한 몸인데 두 번 못할 것이 어딨겠소."

"그것도 그렇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참으로 타당한 논리였다.

하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오랫동안 믿어온 종교를 배신하고 나와 사이비 단체를 만든 인간들이었다.

이번에 저울에 걸려있는 것은 본인들의 목숨이었으니 선택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뭐든지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쉽다. 배신도 그렇다.

이쯤 되면 재림천마를 지지하는 나머지 장로들이 의리 있다고 해줘야 할 판이었다. 사이비 천마에게 의리를 지키는 것을 신심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연락을 한 자 중에서 안 온 사람은 없소?"

"없습니다. 고르고 고른…… 인원들이니까요."

사천 주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일월마군의 최측근이었던 자가 내게 숙이는 꼴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다행이군. 손을 쓸 일이 줄었으니."

"……손을."

장로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장로들의 죽음이 나와 관련 있다는 정보가 퍼져도 상관은 없었지만 일월마군에게 알려지는 시기는 늦을수록 좋았다.

그러니 정보를 듣고 빠진 자가 없다는 것은 내게 좋은 일이었다.

애초에 이자들은 자기들끼리 굴러먹는 방식을 알 만큼 아는 사이일 것이다.

사이비 종교의 장로로 살아오며 욕망을 숨기지 않았을 테니 서로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협박을 듣고도 교주 편에 설 것 같은 자에게는 애초부터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어쩌면 그중에서도 넘어올 만한 자도 있었겠지만 지금 온 자들만으로도 계획을 실행하기는 충분했다.

아무튼 행동이 가벼운 자들이었다.

나 역시 이들과 신뢰 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었지만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많은 죄를 저지른 자들을 그냥 둘 생각도 없었지만.

"저……, 그럼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 그래야지. 일단 들어오시오."

주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연구실로 장로들을 안내했다.

연구실이 넓긴 했으나 여섯 명을 한 번에 앉힐 공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선 채로 내버려둔 채 나만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장로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혹은 주화입마 때문에 다들 불안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하오."

"예. 그런데 살고 싶냐고 하셨던 게 대체 어떤 의미인지……."

"내가 했소."

"……예?"

"당신네가 내게 과자에 독을 발라 칠보산산을 먹인 그 순간. 나도 당신들에게 하독했소."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로 하나가 소리쳤다. 이름도 모르는 자였다.

"마선도 있었던 자리요. 김 장로가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 할지언정 일개 검수에 불과한데 어찌 우리 모두에게 하독한다는 말이오! 설령 독괴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마선까지 속이지는 못했을 것이오!"

"그럼 뭐."

나는 그 이름도 모를 장로와 눈을 마주쳤다.

"시험해보시겠소?"

"……."

장로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여유롭게 웃었다. 애초에 그들이 공포심에 질려 이 자리에 온 순간부터 주도권은 내게 있었다.

실제로 나에게 무형지독을 발동시킬 능력은 없었다. 그들의 단전에 자리를 잡은 무형지독의 음기는 정종 영약과 접촉해야 활동을 시작하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상대가 믿는다면 내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따로 증명이 필요한 사람 있소?"

장로들은 아무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애초에 내게는 칠보산산이 통하지 않았지. 그런데 보시오. 진짜 내통자가 있었나? 내게 미리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여기 있소?"

장로들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서로 살폈다.

나서는 자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부터 내통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독에 있어 그 순간 내가 마선보다 뛰어났다. 그뿐인 이야기요."

"그럼 내통자가 없었다는 것이군."

광명우사가 불쑥 물었다.

"그렇소."

"……당신 때문에 난."

그는 신선 같은 얼굴을 하고 이를 갈았다.

"나 때문에? 왜. 뭐."

"……빌어먹을 천마는 진짜 누군가가 내통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오. 나도 그 의심 선상에 있었고."

"아하. 왜 여기 오셨나 했더니."

일월마군은 내통자의 존재를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장로들을 의심하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겠지.

하긴 칠보산산 같은 산공독은 미리 준비하지 않고서야 대처하기가 힘든 물건이었다.

일월마군이 의심이 타당했다. 나 역시 의도한 바였고.

일월신교의 최고위 권력자인 광명우사마저 이 자리에 오게 된 데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다.

사이비 종교인 이상 교주와 척을 지면 우사마저도 파리 목숨에 불과했다. 일월신교는 교주를 현세강림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뭐 일이 그렇게 된 걸 어쩌겠소? 받아들이시오."

"이……!"

광명우사는 인상을 구기며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벌렸으나 이내 그냥 다물었다. 뒤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말이다.

"대답."

"……알겠소."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똑바로 알아야 했다.

목숨이 아까워 교주 몰래 여기 온 이상, 그들은 나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내게 목숨을 구걸하며 기어야 했다.

"슬슬 여러분을 여기까지 부른 목적을 이야기하려고 하오."

"말씀하시지요."

주교가 비서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우사와 주교는 장로 중에서도 원로 위치였으니 이곳에 온 장로들 전체를 대변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일월신교가 재림천마를 모시는 종교이지 않소?"

"……그렇습니다만. 그것이 왜……?"

"교주가 재림천마가 확실하오?"

"그거야……."

주교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긴 그놈이 천마가 아닌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장로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속은 것은 하급 신도들뿐이었다.

일월마군은 천마신교 한국지부의 간판고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감히 스스로를 천마라 자칭할 깜냥은 아니었다. 지금에야 성공한 사이비 교주로서 어느 정도 업과 격을 이루었지만 말이다.

"만약에 스스로를 재림천마라 주장하는 사람이 또 나온다면 어떻게 되오? 관련 교리가 있소?"

"물론 그런 교리는 없습니다만. 그게 왜 궁금하신지……. ……설마?"

"그렇소. 여러분들에게만 미리 밝히겠소."

장로들의 표정을 보니 숫제 완전히 미친놈을 보는 표정이었다.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건만 앞으로 나올 말을 대강 짐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머리가 나쁜 자들은 아니었다. 원래 사기꾼들이 그렇다.

"본인은 근래 본인이 천마신교 초대 천마의 환생이라는 것을 깨달았소."

"……."

"그, 저기, 명나라 건국 당시의 일화들도 막 떠오르고, 천마신교를 처음 건립한 일, 수련동에서 수련한 기억들도 막 떠오르고 그렇소."

너희들 왜 그런 표정으로 날 보니? 미친 놈 처음 봐?

검룡패로 나를 영입한 것이 너희라는 것은 잊지 않아 줬으면 한다.

"그러니까 본인은 재림천마로서, 스스로를 재림천마라 자칭하는 가짜 천마를 징벌하고자 하는데."

"……."

"우리 장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일월신교는 재림천마를 모시는 종교였다. 그래서 일월신교 안에서 일월마군은 현세에 내려온 신 취급이었다.

그러나 그 일월마군이 진짜 천마가 아니라면? 재림천마가 따로 있다면?

물론 나도 그놈도 재림천마는 아니지만 일월신교 내부의 권력을 얻기 위해 끼어들 논리로는 충분했다.

일월신교의 주인은 일월마군이 아니었다. 재림천마라는 존재였지. 내가 일월마군이 될 수는 없었지만 재림천마가 될 수는 있었다.

재림천마라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않는 일반 신도들이야 어차피 승자를 따를 뿐일 것이다.

진짜 재림천마가 가짜 선지자를 벌한다.

참으로 그럴듯한 내용이었다.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일월신교 경전 신약의 시작으로 쓸 수도 있을 정도였다.

가장 먼저 굴복한 것은 예상한 대로 사천 주교였다.

"천마님을 뵙습니다."

맨땅에 무릎을 꿇어가며 큰절을 하며 외쳤다. 이놈도 이거 범상한 인간이 아니었다.

할 때 확실히 하는 놈이었다. 배신도 잘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배교도 먼저 하는 게 유리했다. 과연 초절정 언저리의 실력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교구인 사천시의 주교 자리를 먹은 인간다운 판단력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다른 장로들도 앞다투어 내게 절했다.

"천마님을 뵙습니다!"

물론 이들도 내가 진짜 천마라고 믿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불리며 절을 받고 있으니 마음이 무척 심란했다.

도사인 내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게다가 몇백 년 전에 죽은 인물의 환생이라는 설정이라니.

지금은 괜찮지만 일이 잘 끝난다고 하면 일반 신도들에게도 천마 소리를 들을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일월마군 그놈도 보통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정상인이 사이비 종교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곧 있을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 그곳에서 가짜 천마의 악행을 밝히고 그를 몰아낼 생각이오."

"그것이……."

"장로들. 확실히 정하는 게 좋을 거요. 일월마군이요, 나요?"

"음……."

"물론 천마님이지요. 제게 일월마군의 악행을 정리한 장부가 있습니다."

다른 장로들은 침음을 흘리는 사이 사천 주교가 나섰다.

"신도들에게 받은 헌금을 멋대로 유용한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아무래도 일월마군의 숙청을 대비한 자료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실은 저도……."

"나도 있소. 천마신교에 몰래 상납한 기록이오."

일월마군의 옆에서 신도들에 대한 수탈을 도왔던 장로들답게 일월마군의 약점을 잘 꿰고 있었다.

교주 독재 체제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목숨줄을 하나씩 준비한 모양인데 사천 주교가 먼저 털어놓자 차례로 꺼내는 듯했다.

물론 장로들이 자료를 이 자리에서 단숨에 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있다는 것을 털어놓은 것만으로 족했다.

"좋소.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각자 자료를 취합해서 보고하도록 하시오."

"예, 천마님. 헌데……."

"뭐요?"

"그, 저기가 중독된 것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아."

사실 무형지독을 어떻게 해독할 방법은 없었다. 그들 말마따나 나는 검수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설령 해독할 수 있다 한들 지금 해주는 것은 상책이 아니었다. 믿을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믿을 생각도 없었다.

"일단은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까지 한번 지켜보겠소. 그동안 영약, 영양제, 의약의 섭취를 금하고 정해준 음식만 먹도록 하시오."

"그, 저는 지병이 있어서 약을 먹어야 합니다만……."

"그런 경우는 개인적으로 물어보도록 하시오."

"정해준 음식이라 함은……?"

"라면."

"……예?"

영약만 섭취하지 말라는 것은 사실상 무형지독의 트리거를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괜히 조건을 까다롭게 정했다.

"라면만 드시오."

"……몇 주 내내 라면만 먹으라는 거요?"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분명 경고했소. 살고 싶으면 말이오"

살 뒤룩뒤룩 찐 장로들이 표정을 구겼다. 그들도 신도들의 삶을 체험할 필요가 있었다. 라면 하나로 연명하는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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