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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65화 (65/120)

< 65 : 64. 내부자들(Insiders)(1) >

기본적으로 환골탈태를 거쳐 완벽해진 화경의 육신은 독에 대한 내성이 높다.

암왕 영감님은 무형지독이 화경에게는 치명적이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기껏해야 배를 앓게 할 정도일 거라고.

일월마군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마선의 경우에는 나보다 독에 대한 저항력이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형지독은 화경을 제외한 나머지에게만 효과가 있을 거다. 암왕 영감님이 당가의 후계자들을 구속했을 때처럼 말이다.

암왕 영감님으로부터 만독불침에 이르게 할 정도의 무형지독을 받으며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들었다.

초인에 이르지 못한 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으니 취급에 주의할 것.

복용 즉시 효력이 발휘되지는 않지만 몸에 장기간 남아 다른 물질과 접촉 시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 즉, 트리거가 존재하는 것.

말로는 주의사항이었지만 사실은 무형지독의 사용법을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암왕 영감님이 당가인들에게 무형지독을 먹인 것을 모른 척해준 것에 대한 입막음인 셈.

─그래서 그 트리거가 뭔데요?

─영업 비밀을 다 빼갈 셈이냐?

─아니, 미리 알아둬야 그걸 제가 피할 것 아닙니까?

─네 몸 안에서는 이미 분해되는 중이다. 하수의 경우에나 몸에 쌓이게 되지.

─저 강아지 기르는데 강아지가 어쩌다 한 입 먹으면 어떡합니까.

─꼬마야, 한낱 미물의 목숨이 내 독에 대한 정보보다 귀할 것 같으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암왕 영감님은 트리거가 뭔지 알려주었다.

─정종 기반의 영약이다.

─영약이요?

─몸에 막대한 양기가 들어오면서 단전에 쌓여있던 무형의 음기가 활동을 시작하는 식이지. 외기를 내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전신 혈도를 파괴할 것이다. 독기는 영약의 기운과 합쳐진 터라 흔적도 남지 않겠지.

─어떻게 그렇게 악랄한 수를 생각하셨습니까?

─무형이라는 작품성에 집중했을 뿐이다.

─치명률은요?

─면역력이 낮은 자들은 죽을 수도 있다. 아니라도 내공을 다스리는데 심대한 타격을 입겠지.

과연.

정종 기반의 영약. 정파, 특히 구파(九派, The nine clans)에서 제작하는 영약들을 의미한다. 대개는 양(陽)의 자연지기를 정제한 단약이다.

너무 자주 접하지도 않되 필요할 때 구하기가 까다롭지도 않은 물건이었다.

사실상 인질 상태인 당가의 후계자들에게 무형지독의 효력을 언제든지 발동시키기에 제격이었다.

당가 후계자들이 굳이 당가 내부에서 생산하는 영약 대신 정종의 영약을 복용할 일은 잘 없겠지만 발동이 필요할 때 접촉시키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독이 아니라 약과 합쳐져서 발동되는 식. 발상이 천재적이었다.

무색무취무흔에 집착한 암왕 영감님의 걸작이다.

언젠가 화경 에디션이 발매될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괜히 영약 먹기가 꺼려질 것 같을 정도였다.

대환단 같은 것을 준다면 물론 냉큼 먹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다시 상황으로 돌아와.

일월신교의 장로들은 모두 무형지독을 복용한 상황이었다.

처음 주교가 내게 접촉했을 때 정사마의 영약을 무더기로 준 적이 있었다.

교단에 재력이 많은 만큼 영약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이 많고 욕심 많은 인간쓰레기 종교인들이 머지않아 알아서 무형지독을 발동시키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솔직히 독을 사용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암매화로 활동하던 시절마저도 그랬다. 나는 검수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감을 말하자면 너무 편리했기에 두려울 정도였다. 사천당가가 박투 능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초국적 문파인 이유가 실감이 났다.

물론 무형지독의 존재 자체가 너무 사기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긴 했다.

웬만한 용독술로는 절정에서 화경이 모두 존재하는 상황에서 다수에게 들키지 않고 하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마선 같은 걸출한 의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나는 장로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가 죽기를 바라고 무형지독을 복용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차라리 그들이 칼과 주먹에 맞아 죽기를 원하지 독으로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무형지독에 중독된 이상 죽는 이들이 나오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마음이 쓰이지는 않았다. 저지른 죄가 작지 않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모조리 독으로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장로들이지만 나를 지지해줄 자들이 필요했다. 재림천마를 주장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그러기 위해 독을 먹였다. 잠독으로써 기능하는 무형지독의 특성이 상황에 맞아떨어졌다.

협객다운 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재림천마가 되기로 했을 때부터, 아니, 오래전에 암매화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과정까지 정의로울 수는 없었다.

다만 최소한 결과는 의롭기를 바랄 뿐이었다.

장로 중 몇 명이 불시에 죽거나 내공을 잃고 공포심에 젖어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남은 자들과 접촉할 생각이었다.

나는 극독이 발려있는 과자를 부드럽게 씹어먹었다. 어디서 공수해왔는지는 몰라도 맛은 달고 좋았다. 내가 가져온 용정과 잘 어울렸다.

내가 과자를 삼키는 순간 장로 몇몇은 순간적으로 안심하는 표정마저 지었다. 심리전 측면에서도 하수였다.

마선은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뭐. 왜. 뭘 봐?"

"여전히 사납구나."

장로들은 황급하게 눈을 깔았으나 마선은 나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여유가 열 받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게 된 것은 몇 년 만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몸 안에 들어온 독 기운은 즉시 손끝으로 모았다. 몸 앞으로 낮게 깍지를 끼어 시선을 가리며 빈 찻잔으로 배출했다.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방울이 떨어졌다. 짙은 검은색이었다.

짧은 순간 최소한의 혈도를 타고 왔음에도 감각이 미세하게 둔해진 부분이 있었다. 곧 회복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정확히는 몰라도 마비, 마취, 산공(散功) 등의 효력이 있는 독인 듯했다. 내공 사용 민감도를 떨어트리는 종류.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고 싶었던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김 장로."

"왜 부르시오."

"사실은 김 장로가 복용한 과자에 독이 있소."

"알고 있소. 맛이 꽤 좋더군."

"알고 있다고?"

일월마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소. 누가 말해주더군."

"……누가 말해줬다?"

일월마군은 원탁에 앉은 자들을 쭉 둘러보았다. 장로들이 눈을 깔았다. 고개를 떳떳하게 들고 있는 자는 마선 뿐이었다.

그래서 난 마선을 향해 턱짓했다.

"저 친구가."

마선은 재밌다는 듯 살짝 웃을 뿐이었다.

"……농담하는 게 아니오. 내 수하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끝내 산공독을 썼다는군. 진심으로 미안하오."

"알겠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확실하게 약속을 받고 싶군. 우리도 안전장치가 필요하니. 원망하지 마시……."

"근데 하지 말라는데 굳이 했다는 수하가 누구요?"

"……그건 말할 수 없소. 경고하는데 다시는 내 말을 끊지 마시오."

"그렇다면 나도 누가 알려줬는지 말해주지 않겠소."

"……정말 누가 알려줬다는 건가?"

그때 자리에서 광명좌사가 벌떡 일어났다.

"천마시여, 놈은 허세를 부리고 있을 뿐입니다! 해독을 위해 시간을 끄는 겁니다! 제가 증명하겠습니다!"

"사실 저자가 말해줬소."

"아닙니다!"

켕기는 것이 있는 듯 먼저 나서자 나도 그쪽을 지목했다. 억울한 표정의 좌사와 미심쩍은 얼굴의 일월마군이 눈을 마주쳤다.

"……증명하게."

"존명!"

좌사는 등 뒤편에 놓아두었던 장창을 잡고 내게 달려들었다. 신선처럼 길게 기른 흰 수염이 휘날렸다.

도인 같은 얼굴을 했으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군."

"어린 것이 건방지구나!"

"늙은 것이 의심만 많구나."

"이놈!"

나이 지긋이 먹은 노인이 창을 내게 빛살처럼 찔러왔다. 말랐으나 힘 있는 신체는 아직 중년에 가까웠다.

그럴듯한 별호조차 없이 나이만 먹은 초절정이지만 쌓아온 세월과 많은 영약 덕택에 뿜어대는 기세는 제법이었다. 내공 하나만큼은 썩어 넘친다는 뜻이었다.

나는 찔러오는 창을 금나수(擒拏手)로 휘감으며 더 잡아당겼다. 창기에 대응하기 위해 손과 팔에 옅게 기를 두른 채였다.

좌사가 중심을 잃고 오히려 끌려왔다. 나는 그 속도를 이용해 그냥 얼굴에 주먹을 갖다 댔다.

퍽!

주먹에 부딪힌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비틀거렸으나 아직 서 있었기에 발을 한 번 밟고 발목을 휘감아 찼다.

좌사가 쓰러졌다. 이미 원탁에 실린 발경력을 해소했던 시점에서 엉망진창이었던 옷이 더 찢겨나갔다. 몰골이 추했다.

사실상 승부의 결정까지 단 한 수였다.

나는 장로들과 딱히 싸우고 싶지 않았다.

초절정도 되지 못한 장로들은 이미 거동도 불편한 상태였고, 게다가 무형지독을 먹은 이상 내게 이들은 이미 반송장처럼 보였다. 굳이 손을 쓸 필요가 없는.

그러나 그들은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광명우사가 좌우에 놓인 쌍도를 들고 일어섰다. 주교 역시 권법의 기수식을 잡았다.

그 순간 손톱 칼이 소리 없이 날아왔다. 강기를 담은 채였다. 나는 손목시계에 강기를 담아 받아내었다.

챙!

폭.

부딪혀 튕긴 손톱 칼은 천장에 깊이 박혔다.

"그만."

일월마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사와 주교가 자세를 풀었다. 마선은 천연덕스럽게 새로운 손톱 칼을 꺼내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김 장로. 분명 내공을 쓰는군."

"그렇다고 하지 않았소."

"아까 독을 알고 있었다고 했소?"

"그렇소."

나는 손목시계를 살폈다. 다행히도 흠집은 나지 않았다. 그럭저럭 비싼 물건인데 다행이었다. 강기를 두껍게 두른 보람이 있었다.

"근데 왜 굳이 독이 든 과자를 먹었소?"

"해독제까지 함께 받았기 때문이오."

"……세상에 산공독의 해독제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말이오. 나도 놀랐소. 대체 그런 걸 누가 만들 수 있겠소?"

나와 일월마군의 시선이 동시에 마선쪽으로 움직였다.

"……친우여. 이 부분은 해명이 필요한 것 같군."

"소룡. 너는…… 정말로 흥미롭구나."

마선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호기심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내놈이 그러고 있으니 몹시 소름이 끼쳤다.

마선은 천천히 고개를 일월마군 쪽으로 돌렸다.

"나는 칠보산산(七步散酸)의 해독약을 만들 능력이 없소. 내가 만들 수 없는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 많아 봐야 둘뿐이오."

"……백두의선과 암왕."

"그렇소."

"믿겠소."

일월마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기로도 칠보산산의 해약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 김 장로, 다시 묻겠소. 어떻게 내공을 쓰고 있는 거요?"

"그게 뭐가 중요하오? 내가 내공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믿기 싫으면 믿지 마시오."

칠보산산. 들어는 본 적 있었다. 초고속으로 기혈을 마비시키는 산공독이라고 들었다. 경험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튼 교주가 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굳이 산공독을 쓴 자가 있고, 그걸 내게 알려준 자가 있다는 사실만이 남는군."

"……."

일월마군이 장로들을 무심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장로들은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교 돌아가는 판이 아주 개판이요. 교주 일 오래 하려면 주변 생각도 좀 들어 보셔야겠소. 신입 장로로서 하는 충언이라고 생각해주시오."

"내…… 한 번 생각해보겠소."

일월마군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성질을 긁어보았지만 그래도 출수는 하지 않았다.

무인협회장 자리에 욕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 이용가치를 꽤 높게 보고 있거나 나와의 승부에 자신이 없을 수도 있었다.

나도 자하신검 진본을 챙겨오지 않은 상태에서 화경 둘을 상대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아무튼 장로들과 교주 사이에 작은 균열을 만든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회유의 가능성이 늘어난 셈이었다.

"혹시 오늘 회의 끝난 거면 돌아가도 되겠소? 집에 있는 개한테 밥을 줘야 할 시간이라."

"……그러시오."

나는 도하나를 향해 턱짓했다.

"가자."

뾰로통한 얼굴의 도하나가 뒤를 따라왔다. 과자 못 먹게 한 것에 아직 삐친 모양이었다.

"다음에 뵙겠소. 그 뭐더라. 우주 무림맹 창설 회의던가?"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요."

"아, 그랬지. 그때 뵙겠소. 기대 많이 하시오."

"김 장로도 기대 많이 하고 오는 것이 좋을 거요."

일월마군이 나직하게 말했다. 너무 잘 긁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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