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 62. 장로회의(Council of Elders)(2) >
현경에 도달하기 위해 화경의 무인은 무인으로서의 업과 격을 쌓아야 했다.
세계에 직접 간섭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기 위해서는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사실은 그조차 가설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정확한 근거는 없었다.
아직 현경은 인류가 이론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경지이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한 세대에 존재하는 현경 은 한둘이 전부였다. 현경을 세는 데 손가락이 모자라게 된 것은 근대 이후였다.
경험에 기반을 둔 검증되지 않은 가르침만이 떠돌았다.
업과 격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들이 실재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하는 사실들이 몇 있었다.
첫번째는 내가 찾고 있는 검룡패였다.
현경인 스승님의 진원진기를 다스리기 위해 현경의 업을 수행하는 과정 자체가 그 증거였다.
두번째는 천마신교(Chosenism)의 교주였다. 즉, 천마(The chosen one).
파천신공(破天神功, Heaven breaker)이라는 절세의 무공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당대의 천마가 현경을 이룩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적통의 핏줄에 무재, 정치력, 사업 수완이 골고루 충족되어야 오를 수 있는 자리라 그랬다.
몇백 년 전처럼 깨달음을 얻겠답시고 폐관수련이나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위치였다.
막대한 지원과 절세의 무공 덕에 당대의 천마가 화경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으나 그 초인의 경지 너머까지 쉽게 닿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는 보통의 화경과 달랐다.
5억 신도로부터 받는 압도적인 지지. 오랜 세월 동안 핏줄을 지키며 이어진 전통. 천마라는 이름이 세계에 남긴 흔적.
그 모든 것들이 뭉쳐 일개 화경은 도달하지 못할 업과 격을 보장했다.
그것이 비록 무인으로서 쌓은 것이 아니라고는 하나 의미를 전혀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기를 통한 세계에 대한 간섭력을 분명히 상승시켰다.
그렇게 천마는 가현(假玄, False SS)이라고 불러도 좋을 경지를 이룩했다.
현경과 화경 사이의 어느 지점을 구축했다.
종교와 신앙을 통해 업과 격을 편법으로 쌓는 것.
내 눈앞에 있는 자도 마찬가지였다.
자칭 재림천마.
일월마군 사공태랑.
그는 천마신교의 교주가 그러는 것처럼 광신도들의 신앙과 간증을 통해 업과 격을 쌓고 있었다.
물론 그 수준은 미약했다.
5억 신도를 다스리고 있는 천마신교의 진짜 천마에 비하면 사이비 종교 교주인 일월마군을 지지하는 신도들은 극히 부족했다.
그러나 그 신앙의 질은 높았다.
아니, 어찌 생각하면 그것은 가장 가치 없는 싸구려 신앙일지도 몰랐다. 일체의 사고를 거치지 않는 맹목적인 신앙이었으니.
천마신교에 비하면 일월신교의 교도들은 숫자도 적었고 신도들의 수준도 부족했다.
다만 광신도의 비율이 높았다. 평신도 대다수가 광신도에 가까웠다. 전심전력을 쏟아 기도하고 헌신했다. 영혼까지 갈아 모든 것을 바쳤다.
게다가 천마를 교리를 가장 먼저 실천하는 교단의 주인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천마신교의 교도들과 달리, 일월신교의 교도들은 재림천마를 현세에 강림한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월마군은 뒤틀리고 비틀리었을지언정 일개 화경이라고는 보기 힘든 수준의 업과 격을 이룩한 상태였다.
"……교주."
"질문이 많아 보이는군."
"적지는 않다."
"그럴 만도 하오."
내 하대에도 일월마군은 태연하게 답했다. 연소자의 반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
스스로 쟁취하고 얻어온 것에 자신이 있으니 쉽게 흐트러지지 않을 단단한 자존심이 보였다.
"질문 몇 개 허락하지 못할 것은 없지. 뭐든 물어보시오."
오히려 일월마군이 내게 말을 놓지 않았다.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이성을 되찾았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여긴 적진이었다. 냉정함을 잃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일월마군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월마군을 바라보았다.
우람한 풍채. 가히 장사라고 부를 만하다. 천 년 전에 태어났다면 누가 봐도 장군감이라고 했을 만한 단단한 육신.
이리 같은 눈과 짧게 친 머리가 그가 풍기는 사나움을 더하고 있었다.
그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가 본다면 속을 만도 했다. 최소한 겉모습만은 당대의 천마보다도 위압적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높은 옥좌 위에서 최고급 옷감으로 재단된 사제복을 입고 방만한 자세로 흐트러져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곁눈질로 마선도 확인했다.
나른한 표정의 마선은 어느새 손톱 칼을 꺼내어 손톱 끝을 손질하고 있었다.
한국에 와서 만난 화경 중 최고수라 일컬을 만한 둘이었다.
금제를 해제한다 해도 승부를 자신하기 힘든 수준. 다만 당가에 비하면 평균 전력은 압도적으로 뒤처졌으니 해금을 선택지로 고려할 만했다.
근데 이쯤 되면 대한민국에서 볼 수 있는 화경은 거의 다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은데.
취견자부터, 검괴, 독괴에 마선, 일월마군까지.
하긴 당가와 일월신교, 개방, 하오문의 주거지를 샅샅이 돌아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군.
"마선은 언제부터 일월신교의 교도였소?"
일월마군은 능청스럽게 눈썹을 한번 치켜들더니 마선 쪽을 향해 익살스럽게 턱짓했다.
대답을 한 것은 마선이었다.
"꽤 되었다."
시선은 여전히 손톱 칼을 향한 채였다.
"연구를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은 보통 내 연구에 관심이 많지."
연단의 대가.
고작 일 년을 더 살기 위해 억만금을 영약에 쏟아붓는 부자들은 항상 마선을 원했다. 돈과 나이가 많을수록 그랬다.
마선은 손톱 칼을 몇 번 더 움직이다 손톱 끝을 후, 불었다. 손톱 끝이 깔끔했다. 살이 조금 드러날 정도였다.
"이 땅에서 가장 돈 많은 집단이 쓸모가 없었기에 차선을 택했다. 그곳이 여기다."
사천당가는 명문세가 치고는 손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래도 세력 분류상으로는 정파였다. 흔히들 중도정파라고 부르는 실리주의를 가미한 정파.
당문은 암왕 영감님 같은 걸출한 약사가 있는 데다가 훌륭한 제약 회사도 있다.
굳이 인체 실험을 불사하고 핵폭단을 연구하는 무림 공적과 손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 득보다 실이 많을 일이었다.
따라서 마선은 돈도 많고 적당히 손도 더럽힐 수 있는 자들을 찾았다.
일월신교. 사이비 종교는 인체 실험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을 테다.
"여기서 핵폭단을 연구하나?"
"하하, 그럴 리가. 내 벗은 그저 내 건강에 도움이 되는 단약을 연구하고 있을 뿐이오."
일월마군이 끼어들었다. 핵폭단 연구를 부정하는 언사였다.
하긴 마선이 뭐라고 답해도 나는 믿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마선은 핵폭단을 연구하는 무림공적이었고, 나는 그를 쫓는 자였다.
설령 마선이 일월신교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지금까지 해온 일만으로도 무림공적이었다.
그것만으로 마선을 맹에 끌고 갈 이유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분명 핵폭단 복용에 관한 문제는 생각해둬야 했다.
이미 부산에서 열화핵폭단을 복용한 취견자와 싸운 일도 있었다.
그곳의 책임자였던 의사 김상후가 마선과의 접촉에 대해 증언했었다.
마선이 완성된 열화핵폭단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으리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만일 광신도들이 열화핵폭단을 걸고 날뛴다면…… 부산 절맥연구소 때와 독괴의 난 이상으로 큰 사고가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목숨을 도외시한 채 사천시에서 패악질을 하는 광신도들.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둘.
화경의 극한에 위치한 두 사람이 만약 열화핵폭단을 복용한다면 진원진기의 금제를 해제하고 싸운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기껏해야 후기지수 수준이었던 취견자가 복용한 것과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당장 독괴의 난 당시 쌍괴가 열화핵폭단을 복용했다면 나 역시 반드시 금제를 해제해야 그들을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완성된 화경이 몇 배의 내공을 얻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내공 소모의 교환이라는 선택지를 지워버리는 것이 된다. 내공 측면에서 내가 유일하게 유리한 내공 재생 속도조차 밀리게 되니 말이다.
나로서는 단기결전으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상황을 따질수록 내가 유리한 점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진이라는 지리적 위치, 사원 환경에 대한 정보 격차, 동격 고수의 숫자, 내공의 양, 핵폭단 사용 여부까지 많은 지표가 내가 불리하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유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화경이 되고 나서 수많은 화경을 상대했고 그 과정에서 아직 살아남았다는 것.
내공을 잃기 전에도 후에도 상대가 고수든 하수든 맞서 싸워야 할 상황에 싸워왔으며 끝내 이겼다는 것.
화산검선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협을 행하기 위한 싸움을 피하지 않았고 정면돌파하며 살아왔다는 것.
협행불패(俠行不敗).
그것이 내가 쌓아온 업이었다.
격은 뭐.
고명한 도사.
타임지 선정 검룡.
기네스북 선정 최연소 화경.
화산파 무무문 문주.
화산파의 비밀병기.
대한민국 임시직 국민 영웅.
각종 검수상, 후기지수상 수상자.
천살성.
사천무공대학의 교수 겸 수위.
그리고 화산검선의 마지막 제자.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소."
"무엇이오?"
"왜 날 장로로 영입한 거요?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내 성질머리가 꽤 유명한 편 아닌가? 고명한 도사가 사이비 말 잘 들을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보통 도사가 본인 입으로 고명하다는 말을 하오? 아주 말코가 따로 없군."
"과찬이오."
일월마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췄다.
"……말 잘 들을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소. 그저 제일 잘 나가는 간판을 데려왔을 뿐이지. 검룡패라는 물건으로 확실하게 데려올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어디 쓰기 위한 간판을 말이오?"
"아, 아직 못 들었나?"
"무엇을?"
그에 대해선 사천 교구 주교가 끼어들어 일월마군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천마시여. 아직 김 장로님에게 따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이번 장로 회의에 사안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래? 간단히 얘기해서 내 정치를 한 번 해볼까 하오."
"정…… 뭐?"
"뭐 그렇다고 내가 진짜 정치를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건 아직 멀었지."
일월마군이 숨을 한 번 골랐다.
나는 사이비 종교인이 이제 정치까지 하겠다는 소리를 듣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뭘 멀었단 건데. 나중에는 진짜 정치도 해보겠다고?
"이번에 대한민국무인협회장이 자진해서 사퇴하지 않았소? 그 당문제철 출신 인물 말이오. 말이 자진 사퇴지 끈 떨어진 연이 된 거 아니오. 협회 측에서 당장 당문을 밀어주기도 힘든 분위기인바, 그 자리를 내가 한 번 먹어볼까 하는데. 김 장로는 선거대책위원회 간판이 될 것이고."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사이비 교주인 당신이 대한민국 모든 무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자리에 오르고 싶다. 내가 듣기엔 그렇게 들리는데. 이 말이 맞소?"
"정확하오. 역시 명문 출신이라 이해가 빠르군."
"그래. 그렇군.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 혹시 무처법의 내용 같은 건 알고 있소?"
"무처법? 그게 뭐요?"
"무인의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특별법……. 아니오."
……안 되겠다. 이 자식 최대한 빨리 엎어야겠다.
행정부와의 무인 규제 협상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기본적인 내용도 모르는 채 맡겠다니.
교단의 피해자들, 마선과의 유착, 대한민국 무인들의 미래까지.
내가 천마가 되든 뭐가 되든 일월신교는 반드시 뒤집어야 할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