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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62화 (62/120)

< 62 : 61. 장로회의(Council of Elders)(1) >

그 이후에도 개방과 하오문을 통해 알게 된 피해자들을 찾아가 접촉했다.

우습고도 슬펐던 것은 대개 고통받고 있는 것은 피해자 광신도 본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보통 본인은 그 빈곤한 상황 속에서도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오히려 재단에 더 바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자들도 있었다.

고통 받는 자들은 대개 광신도의 가족들이었다.

일월신교는 기본적으로 교도에게 높은 수준 부담금을 요구했다.

십일조, 주말 예배에서의 헌금, 각종 축일(祝日)과 천마탄신일에 대한 축하금 등등.

심지어 그 모든 요구는 신도는 물론 비신도인 가족에게까지 미쳤다. 부담금이 몇 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가족들도 우화등선하여 내세에 선계로 함께 갈 수 있다는 논리였다.

또 하나 우스운 건 초대 천마의 탄신일과 재림천마의 재림탄신일을 따로 계산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놈이 그놈이면 하나로 통일하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재단 입장에선 아무래도 그런 기념절이 많을수록 좋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알면 알수록 교단의 교리 자체가 이미 비논리적이었다.

믿는 사람이 우둔해 보일 정도로.

문제는 그 우둔한 광신도 본인을 말로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말로 설득할 수 있을 지경이라면 광신(狂神)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피[血]와 삶[生]을 나눈 가족조차 설득하지 못한 자를 내가 설득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생활을 함께하는 사람보다도 사제와 교주의 말을 믿었다.

설득은 불가능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답은 간단했다.

그들은 가족보단 교단의 말을 더 믿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착취하지 않는 새로운 구세주가 되기로 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광신도 본인보다는 고통받는 그의 가족들을 위한 길이었다.

모든 사람은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그건 괜찮다.

하지만 본인이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었다.

***

그렇게 얼마간 일월신교 교단의 피해자들과 접촉하여 교단 생태계에 대해 이해하고, 하오문과 개방을 통해 일월신교 고위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가던 중이었다.

어느날 주교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 주 일요일에 사천 교구에서 장로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김 장로님도 참석하시겠습니까?"

"물론. 가겠소."

장로 회의라면 일월신교 고위층들이 모이는 자리일 것이었다.

미리 파악해둔 정보들과 실제 인물 및 무공 수위를 비교해볼 좋은 기회였다.

"혹시 교주도 오는 거요?"

─당연히 '천마님'도 오십니다.

"아, 그렇지. 천마님. 아무튼 온다는 거군.

─오시지요.

주교는 존칭을 요구하는 듯했으나 나는 못 알아들은 척했다.

"어디로 가면 되겠소?"

─장막성전 사천 사원으로 오시면 됩니다. 필요하시면 안내인을 보내드릴까요?

"아니, 필요 없소. 알아서 찾아가도록 하지."

전화를 끊었다.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가 2주쯤 남았을 무렵이었다.

***

날이 좋은 주말이었다.

나는 가볍게 칼을 두어 개 찼다. 혹시 몰라 품에 비수도 챙겼다. 손목시계도 괜찮은 걸로 둘렀다. 복장은 깔끔한 정장이었다. 연검(軟劍)으로 활용 가능한 허리띠도 잊지 않았다.

나가기 전에 시원한 냉차도 한 잔 마셨다.

무형이라는 이름이 붙은 유니크한 용정차였다. 발매 중지된 귀한 한정판이었다.

나는 괜히 입맛을 다시며 집을 나섰다.

밖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스포츠카에 기댄 도하나가 서 있었다.

잠깐만.

철컥.

"사형? 어디 가요!"

도하나의 물음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무형지독을 곁들인 용정차 찻잎을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더는 별 쓸모가 없는, 당가의 가주도 마실 정도의 최고급 용정차 찻잎. 건강에 그리 좋지 않은 물건이었다.

일단 챙겨가지 뭐.

경우에 따라 우리 일월신교 장로 여러분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트렁크에 검을 싣고 도하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볕이 눈부셨다. 나도 도하나에게 선글라스를 하나 받아서 썼다.

"출발."

"네."

도하나가 뭔가 딸각하자 스피커에서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베이스가 강한 EDM이었다. 귀가 아플 정도였다. 물어보지 않아도 요즘 것들 노래가 분명했다.

음악은 들리는데 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배경 음악을 뚫고 도하나가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사형, 우리 오늘 어디 가요?"

"……넌 그것도 모르면서 따라왔냐?"

"요즘 운전이 재밌더라구요. 또 그 불쌍한 사람들 만나러 가요?"

불쌍한 사람들.

최근에 일월신교의 피해자들을 만나러 갈 때 도하나에게 운전을 부탁하고는 했다.

도하나는 최근 김지원, 김소원 자매에 이어 교단 피해자들까지 접하면서 측은지심을 좀 더 깨닫게 된 모양이었다. 긍정적인 일이었다.

"아니, 오늘은 아니다."

"그럼요?"

"그 사람들을 불쌍하게 만든 사람들."

나는 도하나 대신 내비게이션을 조작해 일월신교 장막성전 사천 사원의 주소를 입력했다.

삼천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고 달동네에 사는 피해자들과 달리 참으로 번듯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새끼들 얼굴 좀 보려고."

도하나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잠깐 갸웃거리다가 말없이 생긋 웃더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부아아아아앙!

노란색 스포츠카가 시끄러운 배기음을 내며 앞으로 미끄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천 사원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오늘 장로 회의가 열려 평신도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꼴이 참 잘 돌아간다 싶었다.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은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검룡 장로님! 천마재림 만마앙복!"

경비원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포권했으나 나는 그저 손을 한 번 내저었다.

저 경비원이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만 괜스레 짜증이 났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만마앙복 같은 시대에 뒤처진 구호를 들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사원 주차장에는 비싼 차가 가득했다. 장로 회의가 있는 날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도하나의 스포츠카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내려서 도하나의 난폭 운전 탓에 흐트러진 차림을 가볍게 정리했다. 칼을 찼다. 선물용 찻잎도 챙겼다.

"가자."

"네, 사형."

도하나도 등에 도를 잘 고정시킨 후 나를 따라왔다.

사원 입구로 가자 안내를 맡은 신도들이 있었다. 죄다 젊은 여신도들이었다. 다들 미모가 출중했다. 나는 또 기분이 나빠졌다.

"반갑습니다. 김 장로님. 다른 장로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시지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갔다. 신도가 앞에서 작은 몸짓으로 걸었다.

사원은 척 봐도 짓는데 돈이 많이 들었을 만한 고급스러운 건물이었다. 인테리어부터 자재가 모두 그랬다. 걸려있는 그림, 가구, 건물 자체의 조형까지 어느 것 하나 귀해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까놓고 말해 사천당가 본관보다 값비싸 보였다. 물론 독을 제외하고 말이다.

가장 높은 층까지 신도를 따라갔다.

"이곳입니다."

이 층에는 방이 하나뿐이었다.

여신도가 방의 입구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짓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경쓰지 않고 걸어 들어갔다.

안은 거대한 회의실이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원탁이 있었다. 그러나 약간 높은 자리에 옥좌라도 해도 될 만한 화려한 의자가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일인지하의 평등.

옥좌는 아직 비어 있었다.

"어서 오시게."

옥좌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노인이 내게 말을 건넸다. 등 뒤에 놓인 장창처럼 몸집도 가늘고 길었다.

미리 조사한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일월신교 광명좌사 박기덕이라는 자였다.

"초면이군. 반갑소."

이어서 입을 연 자는 키 작고 몸 굵은 중년인이었다. 좌우에 놓인 굵은 쌍도가 인상적이었다.

광명우사 채지철이었다.

"오셨군요. 간만입니다."

사람 좋게 웃는 사천 교구의 주교 김상배.

무기는 따로 없었다.

이상의 3명이 일월신교 장로회의 주요 인물로 거론되는 자들이었다.

셋 다 경지는 초절정에 불과하고 그럴듯한 별호조차 없었으나 거대한 사이비 종교를 이끄는 수완이 있는 자들이었다.

이외에도 열에 가까운 장로들이 있었으나 함부로 입을 열지도 못하고 있었다. 확실히 위 3명에 비해서는 경지와 직위가 모두 밀리는 모습이었다.

미리 조사한 대로였다.

이외에 주목할 만한 인물은 교주가 전부…….

"오랜만이군."

그렇게 생각했었다.

회의실의 구석. 그 위에는 조명조차 없었다.

원탁에서 가장 어두운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나른한 목소리였다.

"……너는."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

수염 하나 없는 매끈한 얼굴.

사내의 몸은 마르고 야위었으나 내부로부터 절제된 기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래가 아니었다. 최소 동격. 혹은 그 이상의 고수였다.

순간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게 될 정도로 정제된 살기가 느껴졌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자.

그러나 그 누구보다 인체에 대해 출중한 세 명의 의선(醫仙) 중 한 명.

마선(魔仙, Dr. black).

천하제일연단술사.

핵폭단의 개발을 이유로 무림공적으로 쫓기고 있는 자.

"너와 나는 이래저래 연이 많구나, 소룡(小龍)."

그리고 내가 내공을 잃게 된 사건에서 핵폭단 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자였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으나 솟구치는 살기는 참을 수 없었다.

팔자를 타고난 천살성의 살기가 장내를 가득 메웠다.

도하나마저 움찔하고 장로 중에서는 기절하는 자가 나올 정도였다.

3인의 원로들 역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야 그가 내 친우이기 때문이오."

대답한 것은 마선이 아니었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어두운 회의실에 빛이 쏟아졌다.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그 역시 내게 있어 하수가 아니었다.

믿음과 추앙을 착취해 강제로 쌓아올린 업과 격이 그의 부족한 무공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일개 화경으로 여겨지지 않는 폭발적인 기세.

자세히 들여다보면 격과 업에 틈이 있으나 일반적인 화경은 초월했다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였다.

굳이 말하자면 절정과 초절정의 관계에 가까울 정도.

그는 현경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화경은 넘어선 어느 지점에 있었다.

일월마군이라고 불렸던 늙은 화경은 10여 년 전에 내가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태도와 몸짓에서 격조와 여유가 가득했다.

"반갑소이다. 화산검룡. 아니, 이제는 김 장로인가. 정사대전 이후로는 처음 보는 것이로군."

그는 내게 등을 보이며 천천히 걸었다.

"앉으시오. 내 친우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앞으로도 많은 것이니."

이윽고 화려한 옥좌에 앉아 턱을 괴었다.

일월신마.

혹은 스스로를 재림천마로 칭하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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