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 55. 잔치가 끝난 뒤(After party) >
사천당가 본관 대식당.
어두운 조명 아래 중년인이 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강당을 방불케 할 정도로 높고 넓은 대식당을 가득 채우는 존재감.
온기 잃은 늦은 저녁의 대식당은 중년인 덕분에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앉아라."
세상은 남자를 암왕이라고 불렀다.
암왕의 전음을 듣고 대식당을 찾은 몇 명은 얌전히 테이블 앞에 앉았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가의 주인은 객들을 불러놓고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신선과 같은 자태로 차를 따라 마시면서 이따금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끄덕일 뿐이었다.
현경팔좌의 일원다운 고고함.
말 한마디 없이 상황을 완벽히 장악한 위엄.
범인이 쉬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도 여유가 엿보였다.
긴장한 객들은 현경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소리 없는 감탄을 금치 못했으나, 김산만이 홀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암왕이 특별히 김산을 압박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암왕이 들고 있는 찻주전자가 몹시 낯익은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차에서 풍기는 최고급 용정의 향 역시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저 영감이 설마…….'
김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왜 불렀는지는 다들 알겠지."
마침내 암왕이 입을 열었다. 중후한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객들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그와 동시에 허공섭물로 공중에 정렬된 다섯 개의 찻잔.
암왕은 손수 찻잔에 차를 한 잔씩 따랐다.
그 찻잔이 느릿하게 날아가 객들에 앞에 놓일 때마다, 현경이 직접 따라준 차를 받은 객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화경이 무인들의 슈퍼스타라면, 현경은 무인들에게 있어 반신쯤 되는 존재였다.
무의 극치에 도달한 세계의 정점.
무인의 길을 걷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가주에 대한 반감을 품는 당천갈조차도 손수 따라준 차를 손에 쥐었을 때는 내심 감동했다.
마침내 김산의 차례가 되었을 때.
김산과 암왕의 눈이 마주쳤다.
절세의 후기지수는 감히 대선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
암왕이 눈을 피했다.
그 순간 김산은 확신했다.
'탔구나.'
속으로 탄식했다.
차원이 다른 수 싸움이었다.
과연 외부인으로서 사천당가를 집어삼킨 독절다운 판단이었다.
오늘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고 지고는 애초부터 암왕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관심 없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앉은 자리에서 싸움을 다 내려다볼 수 있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후계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누가 승자가 되든 애초에 암왕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독절이 '천인하독'으로 당가를 집어삼켰던 것처럼.
암왕은 '무형지독'으로 살아남은 후계자 전부를 지배했다.
한순간에 화경을 제외한 전원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넣었다.
암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아무 증거도 없이 급사할 것이다. 독은 검출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마신 것은 그저 최고급 용정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암왕은 언제든 원하는 후계자를 승리하게 만들 수 있었다. 경쟁자가 모두 사라지면 절로 그렇게 될 테니.
당천갈과 같은 전략이었다.
차이점은 독괴가 성취하고자 목숨을 걸고 병력을 모으고 피 흘리며 투쟁했던 것을, 암왕은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얻어냈다는 것이었다.
암왕은 심지어 그것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다들 들지."
별 일 아니라는 듯 차를 마시게 할 뿐.
길게 보는 안배였다.
그 안배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이 현장에서 암왕과 소년화경 둘뿐이었다.
객들은 감격한 표정으로 현경에게 받은 차를 마셨다. 눈동자가 아주 반짝거렸다.
김산은 찻잔을 그냥 입가에만 대고 내려놓았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어째 속이 안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무형지독이 아직 화경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약간 미심쩍었다.
물론 현경쯤 되는 격을 갖춘 인물은 함부로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거짓말이 격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다만 진실을 약간 비틀 수나 있을 뿐이다.
화경에게 미치는 독효가 크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조용한 가운데 차를 홀짝이며 조금이나마 풀리던 분위기는, 암왕이 객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가장 처음 불린 이름은 당연히 일의 주동자의 것이었다.
"당천갈."
"예, 가주."
"그릇이 작다."
당기백은 무심한 표정, 고저 없는 목소리로 평가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았다.
"목적도 하급이고 방법도 하급이다. 목적이 당가인 자는 당가를 가질 수 없다. 그딴 시답잖은 바람을 품고 후계자를 독살하였으니 방법도 하급이다. 네 아들이 차라리 너보다 훨씬 낫구나."
"……."
"본가에서 무력 분쟁을 일으킨 죄, 후계자 당무선을 독살한 죄, 무엇보다 이기지 못한 죄를 물어 당가 장로 자리를 박탈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직위와 권한은 회수될 것이며 추후 필요에 따라 해외지부에서 백의종군하게 될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게 어딘가.
당천갈은 눈을 감고 주어진 벌을 받아들였다.
사실상의 반기를 들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 화경의 무인은 언제든 세력을 키울 수 있었음에도 그랬다. 자비였다.
당천갈은 암왕과 자신 간 그릇의 크기 차이를 실감했다.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인가? 아마 못 했을 것이다.
암왕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당무기."
"예, 가주님."
"똑같다. 하찮다. 무력 분쟁을 일으키고 이기지 못한 죄를 물어 대사천당가의 후계자 자리를 박탈한다. 또한 당문제철에서 직위와 권한을 회수한다."
"가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철공자 당무기는 후계 경쟁에서 탈락했다.
울분이 차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변명거리도 없었다. 그나마 당천갈에 비하면 다시 올라갈 기회는 있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당초아."
"네, 가주님."
"쓰레기들보다는 낫구나. 목적은 하찮았으나 그릇은 좀 나았다.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면서도 주도권을 잃지 않는 것은 그나마 좋았다. 앞으로 당문제철을 맡는다."
"네?"
"싫으냐?"
"아, 아닙니다! 가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당가의 후계자로는 여전히 한없이 모자란 그릇이니 계속 정진하거라."
"네!"
당초아는 당문제철을 받았다.
이기지 못한 죄는 없었다. 패배 직전에 암왕이 분쟁을 종료시켰기 때문이다.
암왕으로서는 그나마 괜찮은 후계자 둘을 경쟁시키겠다는 판단이었다.
"당수련."
"네, 할아……, 가주님."
"이제야 겨우 한 사람 몫은 하는구나. 본신의 무력의 집중하는 것은 좋으나,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할 것이다.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직위를 박탈할 것이다. 앞으로 당문제약을 맡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수련은 당문제약을 받았다.
외부와의 교류, 협력의 비중이 큰 제철은 당초아에게 맡기고, 내부 연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큰 제약은 당수련에게 맡긴 것이었다. 두 사람의 성향 차이를 고려한 결과였다.
마지막으로 암왕은 유일하게 자리에 있는 외부인을 불렀다.
"화산의 꼬마야."
"예, 영감님."
암왕과 소년화경이 말을 주고받자 옆에 있는 객들이 더 놀라고 긴장했다.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명칭들이었다.
"마음대로 하랬더니 정말 마음대로 했더구나."
"제가 원래 어르신들 말씀은 잘 듣는 편입니다."
"감히 대사천당가 본가에서 험하게 날뛰었으니 벌을 주어야 할 것인데, 또 살아남은 후계자들을 이끌고 하찮은 계획을 파훼했으니 상도 받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마음대로 하라셔서 마음대로 한 거인데 벌도 받아야 합니까? 정 그러시면 둘을 상계하시죠. 그냥 없던 걸로 합시다."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아닐 거 같은데요."
중년인의 모습을 한 암왕이 소년처럼 웃었다.
"벌과 상을 동시에 주는 것이다. 네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당가의 데릴사위로 오거라. 사천당가를 주마."
"그건 아까 거절했지 않습니까."
아까.
당천갈은 이제야 그 의미를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상대했던 고수가 타 문파의 인물임에도 당가주와 면담을 할 정도의 큰 인물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왜, 당초아나 당수련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만."
"네가 고르는 쪽이 사천당가의 가주가 될 것이다."
"……안 고를 겁니다."
데릴사위가 나온 직후부터 당초아와 당수련은 눈을 반짝였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가주님의 명이라면 어쩔 수 없이 김산을 남편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다.
가주의 명은 늘 절대적이고 천하칠대세가쯤 되는 초국적세가에서 정략결혼은 피하기 힘든 일이었으니 말이다.
"고르지 않겠다? 둘 다 달라는 말이냐? 흠. 좋다. 일부일처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그 그릇이 참으로 크다. 허락하마."
"……예?"
"나조차도 부인을 하나만 두었거늘 어린 도사의 행보가 참으로 영웅호걸과 같구나. 하긴 당가의 데릴사위라면 마땅히 현행법 제도마저 내려다볼 줄 알아야지."
"……영감님."
"농이다, 농. 물론 네가 원한다면 농이 아니게 만들어줄 생각은 있다만."
"생각 없습니다."
당씨 자매가 묘하게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는 가운데 편안한 웃고 있던 암왕은 이내 진심으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말로 네게 줄 것이 없구나. 너에게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울 수 없는 영역이고 완성된 부분은 이미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대가는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대가를 받지 않은 일은 대가를 받고자 한 일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검선 영감 같은 말을 하는구나."
암왕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그럼 이 차를 가져가는 것은 어떠냐?"
"차, 말씀이십니까?"
소년화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몹시 불경한 표정으로 당가의 가주를 바라보았다.
주변 객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보상을 고사했다지만 고작 차는 너무하네'쯤의 의미로 보였다.
실상은 전혀 다른 뜻이었다.
"제가 그래도 명색이 도사인 사람인데, 이 차는 좀……."
"다른 사람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다. 네가 다 마셔라."
"예? 이걸요?"
"내가 만든 특제, 차 아니냐. 장복하는 것으로 만독불침(萬毒不侵)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만독불침!"
"허……!"
천하제일독가의 씨족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누구보다 만독불침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차를 복용하는 것만으로 만독불침을 이룰 수 있다면 당가의 전력은 급격히 감소하게 될 것이 뻔했다. 독인의 입장에서는 만들어져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가주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었다. 당씨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찻주전자를 바라보았다.
"……정말입니까?"
"내가 거짓말을 하겠느냐.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효가 듣지 않는 만큼 약효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김산은 곰곰이 득실을 헤아렸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산이 이제 와서 영약으로 득을 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내공 자체의 양은 이미 풍부했으니 말이다. 지배권이 없을 뿐이었다.
반대로 독은 언제나 위협적이었다. 당장 당천갈과의 승부도 만독불침 상태였다면 훨씬 효율적으로 내공을 관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나도 이런 물건을 만드는 것은 마지막이 될 것이다. 다음엔 '화경도 마실 수 없는 차'가 될 테니 말이다."
"……하긴 그렇겠군요."
암왕은 이번에 예민한 화경조차 알아챌 수 없다는 검증을 끝낸 상태였다. 다음에는 독효 자체를 끌어올릴 것이다.
그때는 만독불침을 위한 백신이 아니라 치사율 높은 극독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암왕 영감님은 이걸 먹으면 만독불침이 되는지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나도 때로 독이 두려웠었다."
암왕이 웃었다.
"이제는 아니구나."
천하제일독에게 그런 말을 듣자 김산은 이 이독제독의 정수를 받기로 한 판단이 아주 만족스러워졌다.
***
다음날, 김산은 학교로 출근하는 길에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독접관 근처에도 인파가 많았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학생들에게 그런 느낌을 말했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내게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군. 아니면 오늘 독접관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 이유를 알려준 것은 최수아였다.
"교수님. 고무림 안 들어가 보셨어요?"
"고무림?"
김산은 바로 휴대폰을 조작해 고무림에 접속했다. 메인에 대문짝만 하게 박힌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김산의 얼굴이었다.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毒怪(독괴)를 쓰러트린 젊은 高手(고수)는 누구? 그 정체는 돌아온 '華山劍龍(화산검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