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 54. 독괴(Poison monster)(2) >
콰콰콰콰콰콰콰콰쾅─!
귀를 찢는 굉음이 들렸다. 전장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쪽으로 쏠렸다.
삼재검진을 짜고 버티고 있던 소걸과 학생들도, 어떻게든 검진을 파훼하려던 당초아와 그녀를 따르는 철두철미도 그랬다.
연회장 측면에서 지원을 온 가주파 무인들과 그에 맞서 길을 틀어막고 있는 직계파 무인들 역시 시선이 돌아갔다.
지상에서 극광(極光)처럼 넘실거리는 보랏빛 강기의 파도를 보고 군중은 모두 넋을 잃었다.
화경을 초월 인간, 호모 수페리오르라고 부른다.
기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신체 구성 자체가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연유도 있지만, 그 이전까지의 경지와는 궤를 달리하는 무공을 펼치기 때문이기도 했다.
긴 세월 동안 축적된 내공을 한 번에 쏟아내는 거대 기공을 사용할 때 그 격차는 두드러졌다. 경파가 미치는 범위가 단순한 병장기 휘두르는 것과는 비교하는 것이 의미 없을 정도로 넓었다.
흔히 화경의 지배력이 10장(약 30m)에 달한다고 한다. 내공의 수발이 미치는 범위가 그토록 넓다는 뜻이다. 물론 단전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그 지배력은 반비례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다스리고 직접 접촉한 물건에 겨우 기를 전달할 뿐인 인간 수준의 무인들에 비교하면 초인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김산이 가용한 모든 내공을 한꺼번에 쏟아내어 만든 강기의 파도는 그 이름대로 산사태를 연상시키듯 독괴를 찍어눌렀다.
인간의 육신으로 자연재해를 만들어낸 모양새였다.
보랏빛 강기는 김산이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크게 굽이쳤다. 독괴를 향해 쏟아지고 지나친 후 남은 경력마저 땅을 파고 들어갔다. 흙이 파헤쳐져 장내 무인들의 머리 위에 우수수 떨어졌다.
얼핏 신령스럽기까지 한 보랏빛 기운이 땅에 먹혀 사라지자 군중은 밤을 실감했다. 세상이 훨씬 어둡게 보였다.
독괴는.
"쿠, 쿨럭."
살아 있었다.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김산이 단숨에 뽑아낸 화산파의 신공에 대응하기 위해 강기를 폭발적으로 일으켰음에도 그러했다.
그러나 신체의 결손이 있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독극물을 모두 사용하며 호신강기를 두텁게 둘렀기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찢어지고 베이고 맞고 부러졌으나 잘리지는 않았다.
기혈 역시 급격한 운용 때문에 약간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화경의 튼튼한 기맥에 심한 손상은 없었다.
피해가 적지는 않았다.
내공 소모전이 부담되었던 것은 독괴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산과 맞붙기 전에 초절정의 합공을 상대하며 2할가량 소모했던 내공이 아쉬울 정도였다.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검강을 얇고 짧게 펼치는 검룡의 내공을 계속 소모시키기 위해 비효율적으로 내공을 운용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김산이 거의 모든 내공을 쏟아내어 공격한 결과였다. 독괴 역시 마찬가지로 전력을 쏟아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손해를 입었다.
두 화경의 고수 모두 단전이 텅 비어 있었다.
김산과 당천갈은 우뚝 서서 마주 보고 섰다.
내공이 없을지언정 구부리지 않았다.
"용케도 살아있군."
"방금, 뭐였나? 내공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내공 없이 화경 행세를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그 시절의 폭발적인 기세는 없다. 지금도 서 있는 것이 고작이지 않느냐. 최소한 절반 이상의 내공을 잃은 것은 확실하다."
그 이상이었지만 김산은 굳이 입으로 꺼내지 않았다.
'벽'을 그럭저럭 펼쳐낼 수 있었던 것은 자하신검이라는 신병이기의 도움 덕분이었고, 또한 김산이 그 자하신검과 신검합일에 가까울 정도로 높은 동조율을 이뤄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평소에도 억대의 레플리카를 막 휘두르며 익숙해진 보람이 있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지?"
김산은 웃었다. 독괴의 몸 상태를 보며 독괴도 내공을 모조리 소모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당천갈은 이를 악물었다. 남은 내공을 쥐어짜 전음을 날렸다.
─공격해라. 저놈은 내공도 남은 내공이 없다!
당천갈의 측근인 철두철미 팀장급 무인이 바로 비수를 던졌다.
획─.
탁.
김산은 검지와 중지만으로 비수를 잡았다.
초절정 고수가 발경의 원리를 담아 던진 비수였다. 폭발적인 회전력이 가미되어 있었으나 김산의 손에 닿는 순간 운동을 정지했다. 발경력을 해소한 여파로 팔꿈치가 꿈틀할 뿐이었다.
내공을 다루는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냐."
동격의 고수도 경악할 만한 내공 순환 속도.
극단적으로 동공에 치우친 김산의 내공 체계에 따라 외기가 전신 혈도를 질주하며 내기로 치환되고 있었다.
소강 상태에 있던 단 10초가량.
그 짧은 시간 안에 김산은 순간적으로나마 강기를 발할 수 있을 만큼 내공을 회복했다.
김산과 당천갈이 동시에 내공을 모두 소모하는 그 순간 승부는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땅 위에 김산보다 동공 비율이 높은 화경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산은 가장 내공이 적은 화경이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내공 회복 속도가 빠른 화경이었다.
신병이기의 보조, 상대 전략의 정확한 파악, 정보 격차를 활용한 적확한 대응.
그 모든 조건이 모여 김산의 승리를 만들었다. 심지어 진원진기의 금제를 해제한다는 비장의 수까지 남겨둔 채였다.
하지만 김산 역시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남은 무인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독괴의 수하들을 상대하기에 금제를 해제하는 것은 배꼽이 배보다 큰 격이었다.
그래서 김산은 자리에 그대로 선 채 철두철미의 무인들과 대치했다. 철두철미는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초절정은 화경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기껏 해봐야 버티는 것이 전부인데, 김산이 먼저 덤벼들지 않았으므로 철두철미가 먼저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아직 결정 나지 않은 다른 싸움의 끝을 기다리기엔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매들의 싸움도 끝나가고 있었다.
***
당수련은 삼재검진의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신의 왼쪽, 천자 겹이었다.
팔을 뻗고, 발로 찼다.
주먹으로 때리고 팔꿈치로 찍고 손가락으로 찌르고 무릎으로 치고 발뒤꿈치로 밟았다.
몸의 왼편과 오른편이 다른 방식으로 동시에 움직였다.
체술 초식 사이에 때로는 가슴팍이나 소매, 주머니에서 비수, 바늘, 쇠 구슬 등을 뽑아 날렸다.
권각술과 암기 투척의 전환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김산이 당수련에게 삼재종합공을 가르치기 시작할 때 그렸던 모습이었다.
긴 팔다리와 손가락에, 탄력과 유연성을 타고났다. 주어진 신체를 극도로 활용하고 있었다.
삼재종합공이 전반적으로 숙련된 상태였다.
권각에 비해서는 다소 모자랐으나 보법, 기공 역시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
유려한 움직임이 언뜻 절정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과연 가주의 손녀……!"
멀리서 지켜보던 철두철미 중에서 감탄하는 자도 있었다. 곧 이어진 주변의 시선에 금세 입을 다물었지만 말이다.
당초아는 착잡한 눈으로 당수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얻어걸린 기회를 잡기 위해 발악하는 당초아와 달리 당수련은 온몸으로 투쟁하고 있었다.
자기를 보호하려는 친구들에게 성패를 맡기지 않고 일행의 가장 선두에서 철두철미와 직접 대치하며 피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당초아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 싸움에 그녀의 안배는 없었다. 그녀가 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김산, 하오문, 자율무공학부, 심지어 맞서 싸우고 있는 당수련의 개입 역시도 당초아의 안배였다.
하지만 결국 지금 당초아가 휘두르고 있는 것은 남이 바친 무력이었다. 스스로 준비해온 것들이 아니라 철두철미만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 순간 당초아는 이런 방식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당수련을 제거한다고 해도 누가 당초아를 진심으로 따를 것인가?
당가의 후계자가 된다고 해도 당천갈 혹은 철두철미의 꼭두각시가 될 뿐이었다.
허울뿐인 승리 역시 승리이겠지만, 당초아는 그런 것을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철두철미."
당초아의 부름에 대답하는 무인이 없었다.
"철두철미."
"……예."
재차 부르고서야 마지못해 대답이 있을 뿐이었다. 그 대답에 어린 불만을 읽고 당초아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정지."
"예?"
"멈추라고요. 다들 물러나세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겁니다. 이런 절호의 기회에 왜 물러서라는……."
"입 닫고 물러나라. 어디 명령에 말대꾸를 하느냐. 나를 지지하는 것이 맞긴 한 거냐?"
당초아는 차갑게 뇌까렸다. 폭언을 들은 철두철미는 눈을 크게 떴으나 아무 대답도 못하고 물러났다. 보는 눈이 많았다.
기분이 아주 시원했다.
그러니까 당초아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장면을 기다려왔다. 말 한마디에 철두철미 같은 당가의 주요전력이 꼼짝도 못하는 광경 말이다.
비록 구질구질하게 명령해야 겨우 말을 들은 거였으나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당초아는 거칠게 정장 안주머니를 뒤졌다.
거기서 꺼낸 것은 커다란 시가였다.
"저, 저런."
"당문의 규수가 어찌……."
당초아는 비수로 시가 끝 부분을 잘라내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멋들어지게 삼매진화로 불을 붙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녀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다.
상관없었다. 그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었으니까. 일신의 무력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는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내야 했다. 무력이 아니라면 정치력이든 정보력이든 뭐라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명제였다.
내가 얻어낸 것만이 내 것이 된다.
당초아는 시가를 깊게 빨아 향을 즐기고 천천히 달을 향해 뱉었다.
"수련아."
"언니."
"한 판 뜨자."
"……예?"
"시원하게 둘이서 맞짱 한 판 뜨고 그걸로 다 결정 내버리자고."
호쾌한 당초아의 제안에 아까 물러났던 철두철미가 다시 달려왔다.
"……무슨 짓입니까, 당초아 아가씨! 철두철미의 지지 선언을 헛되이 할 생각입니까? 여기서 당수련을 제거해야만 직계가……."
"어이."
"……저 말입니까?"
"그래, 너. 철두철미."
"……왜요."
"너 당씨냐?"
"예?"
"당씨냐고."
"당씨, 아닙니다만……."
"근데 왜 당씨 일에 존나게 끼어들어? 지금 당씨들끼리 얘기하고 있는 거 안 보여? 뭐 니가 사천당가 물려받을 거야? 데릴사위로 들어오게?"
"……."
당초아와 약속하고 오늘 한껏 깽판을 친 김산과 어느새 정신을 차린 검괴마저 오묘한 시선으로 당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 잘못 들으면 본인들까지 싸잡아 욕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서 당씨보다 아닌 사람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군중들은 맛깔나게 시가를 피워대는 사천당가의 장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불만 있는 사람? 없지. 맞짱으로 결정낸다?"
당초아는 주변을 몇 번 획획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수련이 주먹질하는 거 보니 이길 자신은 없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에 외공 공부를 소홀히 한 자신의 탓이니.
하지만 남의 힘을 빌려 이기는 것보다는 나았다. 내가 가진 것만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좀 맞기야 하겠지만 설마 이 연약한 언니를 죽이기야 하겠는가.
<그만.>
마침내 당씨 자매간의 맞대결이 이뤄지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군중이 동시에 소리를 들었다. 출처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곳에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육합전성(六合傳聲, Divine call).
내공 수발의 범위가 인간을 한참이나 초월했다는 증거였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당가의 주인.
암왕 당기백.
<잔치는 모두 끝났소.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오.>
사천에서 당가주의 축객령을 거절할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 사건의 주요 인물 몇몇에게만 따로 전음이 들렸다.
─본관 대식당으로 오거라.
남은 인원들은 서로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무리를 지어 본관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당초아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맞는 것보다는 안 맞는 게 낫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