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 53. 독괴(Poison monster)(1) >
"상황이 참으로 복잡하군."
소걸이 중얼거렸다.
또 한 번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
사천당가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줄 알았던 독괴는 갑자기 당초아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독괴의 수하나 다름없는 철두철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천갈의 당초아 지지 선언은 피아의 인식을 급격하게 바꿔 놓았다.
당장 같은 공간에 있었던 학생들과 당초아, 채 집사 일행의 분위기는 몹시 어색하고 미적지근했다.
원지혜는 당소련을 데리고 슬쩍 물러났다. 다른 학생들 역시 당초아로부터 슬금슬금 멀어졌다. 채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뻘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당초아의 주변으로 몰려든 것은 원래 정원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던 철두철미였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참."
당초아가 고개를 들고 독백했다. 중추에 걸린 여름 달이 눈에 들어왔다.
당천갈의 영물 양산 계획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당초아였다. 그 순간 당천갈이 당초아를 바로 제거하려 들었다면 아마 어렵지는 않았을 테다.
그랬다면 상황은 지금과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당장도 지지하는 장로의 숫자만 비슷할 뿐 휘하 병력의 숫자는 앞서는 당천갈이다.
지리산에서의 실험이 성공해 초절정, 혹은 절정 경지의 영물을 양산할 수 있었다면 당천갈 측의 전력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라도 바로 당초아를 제거해 오늘의 습격을 대비하게 하지 못했더라면 애초에 연회장에 당수련을 지지하는 장로들이 그렇게 많이 참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천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사천공대를 찾아와 당초아의 의지를 확인하였다. 그때부터 당초아는 당천갈의 차선책(Plan B)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당무선이 죽고 당무기가 몰락한 지금, 당초아의 당천갈의 최선이었다.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적인 줄 알았던 숙부는 이 순간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었다.
독괴는 화경 고수 하나의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당가의 핵심 기업의 요직 대신 대학교 하나만 받고 요구르트와 정보를 팔던 사천당가의 장녀는 가장 절실하던 무력집단의 지지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숙부의 공격에서 달아나기 위해 함께 도망치던 친척 동생은 권력을 얻기 위해 제거해야 하는 일 순위가 되었다.
"다가오지 마시죠."
원지혜가 창을 세웠다. 공격적으로 들이밀지는 않았으나 분명 당초아를 외부인으로 인식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학생들은 원지혜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삼재검진을 구성했다.
당초아는 그것이 신기했다.
어떻게 고작 3개월 만에 저런 신뢰가 쌓일 수 있을까.
그 짧은 기간에 숙련된 검진을 익히고 합을 맞추는 것보다, 한 사람을 위해 사천당가에마저 검과 창을 들이미는 저 우정이 놀라웠다.
협객의 제자는 협객이 되는 걸까. 그 제자의 제자도 마찬가지인 건가. 늘 그렇지는 않겠지.
저들이 특이한 경우일 것이다.
부러웠다.
당초아는 저런 유대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당초아가 가진 유대는 대개 등가교환(等價交換, Give and take)에 기반한 사업 파트너에 가까웠다.
그 이상으로 받은 거라곤 글쎄, 검룡패를 하나 주고 얻은 김산의 지지 정도일까. 마음 같아서는 검룡패가 몇 개 더 있으면 다 줘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 김산의 지지마저도 이제는 큰 의미가 없었다. 지금 여기서 당수련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사천당가를 얻는 것은 당초아 자신이었다.
"왜. 내가 수련이를 해치기라도 할까 봐?"
당초아는 짐짓 예사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저야 모르죠."
원지혜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사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긴 원주원가의 보석이 학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천공대의 이사장 자리는 한직인 것이다. 명성은 높되 권력이 없으니.
"모르니까 조심하는 것뿐이에요."
지극히 옳은 판단이었다.
당초아 자신도 자기가 어쩌고 싶은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당수련을 제거하면 그걸로 승리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서 자신의 제자를 죽게 둘 수 없다는 김산의 선언이 있었다.
그가 당초아를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여기서 당수련을 공격하는 것은 김산을 배신하는 것일까?
그게 어때서. 김산과는 짧은 계약 관계였다. 길어도 2년 남짓일 뿐. 그 이후의 삶은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당초아는 계속해서 생각하고 망설였다.
문득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들을 보았다. 철두철미의 휘장을 달고 있는 무인들. 단 10분 전까지만 해도 일말의 유대도 없었던 자들이다.
"언니."
"수련아."
말을 건 것은 당수련이었다.
"언니는 어떡하고 싶어요?"
당수련은 누군가에게 들었던 질문을 친척 언니에게 돌려주었다.
가문의 장녀로 태어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아들도 아니었고 가주의 피를 잇지도 못했다.
그 누구도 당초아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가지고 싶다."
당초아에게는 대단한 무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당가인 정도의 애매한 재능.
뒤처지지는 않았으나 독괴처럼 화경을 바라볼 만큼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기회를 기다렸다.
하오문과 손을 잡고 화산검룡을 초대했다. 따로 정보력과 무력을 키웠다. 오빠들에겐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기회가 왔다.
준비하지 않았다면 분명 오지 않았을 기회였다.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하세요."
당초아는 어쩐지 당수련보다 약한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공이 아니라 인간 자체로서.
"하하하."
당초아는 당수련의 당찬 조언을 듣고 웃었다. 눈웃음이 길게 그려졌다. 명쾌한 답이었다.
"난 아마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할 거야. 하지만, 그냥 가만히 앉아서 놓쳤을 때 더 크게 후회하겠지."
당초아는 품에서 철접 두 개를 빼 들었다.
"철두철미."
"네."
"당수련을 제압해서 데려오세요."
"존명."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한다.
이기는 쪽이 강한 것이다.
그게 당문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고민은 이기고 해도 늦지 않았다.
철두철미의 무인들이 움직이자 자율무공학부 학생들도 다시 태세를 가다듬었다.
당초아는 빠졌지만 자율무공학부 학생들이 꾸리고 있는 삼재검진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훨씬 강해졌다.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이신이 천자 겹의 선두를 맡은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 거요?"
소걸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신은 상황에 맞춰 대응하라고 했는데, 상황이 너무 어지러우니 어느 쪽을 도와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이사장과 학생들 사이에서 조교는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학생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쪽이 옳은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하오문 지부장이 사천당가의 후계자가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이 그리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지금 이런 말 하기는 뭐한데. 나는 이사장님이 개방 대신 하오문 골랐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소."
당초아는 쓴웃음으로 대응할 뿐이었다.
***
집안싸움을 슬쩍 보았다.
"한눈팔 시간이 있나?"
"당신도 관심 있을 거 같아서 잠시 본 건데."
"나는 시간이 촉박해서 말이다."
독괴가 독강으로 만든 륜(輪)을 날렸다. 두 개를 날리고 가까이 달려들며 손으로 두 개를 추가로 만들어 교차하며 휘둘렀다.
곡선을 그리며 날아온 륜이 독괴의 직접 공격과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팡팡팡팡!
나는 자하신검을 휘둘러 차례대로 쳐냈다. 공격은 아주 짧은 시차를 두고 들어왔지만 내게는 대응하기에 충분한 간격이었다.
륜이 단숨에 부서지며 강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독강을 상대하는 것은 이런 부분이 귀찮았다.
강기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경우가 많은데 강기를 파괴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피부에 자하강기를 둘러 독강의 파편을 튕겨냈다. 효율이 높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푸쉬이이익…….
독강의 파편이 떨어진 곳에서 땅이 파이면서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검회색으로 급격하게 시들어가는 풀 따위도 보였다.
건강에 좋지 않은 물건인 게 확실했다.
독괴는 철저하게 내공 싸움으로 몰아가려는 모습이었다.
효율을 생각하지 않고 독강을 가득 쏟아냈는데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호신강기를 자주 두를 수밖에 없었다.
독강의 모든 파편을 쳐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 반면 하나만 피부에 닿아도 치명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수 한 수의 교환은 내가 훨씬 효율적이었지만 고질적인 내공 부족이 이번에도 발목을 잡았다.
그나마 21년치를 사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 7년분밖에 없었다면 진작 금제를 해제하고 너 죽고 나 죽고 했을 것이다.
"이미 전투를 치른 것 같은데 내공을 그렇게 막 써도 되는 건가? 최근에 석유라도 한 잔 마셨나?"
"결국은 널 한 번은 상대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내공 소모를 최소화했지. 그 때문에 초절정과 꽤 오래 손을 섞었지만 지금 보니 잘했던 것 같군."
"저런. 내공 좀 아껴쓴다고 초절정 상대하는 데도 오래 걸리다니. 화경으로서 기본기가 부족한 게 아닌가 싶은데."
독괴는 눈썹을 한 번 꿈틀하더니 내 얼굴을 향해 침을 탁 뱉었다. 침의 색이 검은색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젖혀 피했다. 침이 떨어진 장소로부터 회색 연기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나는 머리 부분에 기막을 굴뚝처럼 길게 세웠다. 주변과의 연결은 차단하되 천장은 뚫어 산소가 통행할 수 있게 했다.
화경의 기본적인 피독 대응이었다.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독극물에 유용한 대처였다. 독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기막을 형성해야 효과가 있기에 하수들은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극독은 환골탈태를 거친 고수에게도 치명적이지만 애초에 감염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독공에만 치중한 무인이 초고수 간의 교전에서 승률이 높지 않은 이유였다.
내공만 충분하면 전혀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독괴는 극단적으로 독공에 치중한 무인이었다. 보법과 암기술도 상당하지만 화경급을 기준으로 세우면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냥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피부 접촉을 통해 감염되는 독은 호신강기로 쳐냈다. 호흡기로 감염되는 독은 피독 기막으로 우회했다.
매 순간마다 상당한 양의 내공을 고정적으로 소모하고 있었다.
거기다 독강으로 날아오는 직접 타격은 검강으로 대응해야 했다. 아무리 독강이 검강에 비해 무른 편이라고 해도 검기로 대응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독괴는 나를 말려서 죽일 속셈이었다.
그것이 보이는 것은 독괴의 공격 양식이었다. 독괴 본인도 여유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인데 독강을 폭발적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누가봐도 효율적인 나의 얇은 검강과 호신강기를 보면서도 소모전을 유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모종의 사고로 내공을 잃었다는 소문은 무림 고위층 사이에서는 꽤 퍼져 있었으니 그에 맞춰 전략을 짜온 듯했다.
금제를 해제하는 것도 방법이었으나 마냥 정답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부산에서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취견자만 제압하면 끝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독괴를 쓰러트린다 한들 세자리 수의 철두철미가 남아있었다.
금제 해제의 부작용으로 반송장 상태로 있다가는 진짜 송장이 될 수도 있었다.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전투 종료 시점까지 화경으로 행세할 최소한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으면 금제를 해제해야 할 것이다. 독강 맞고 앓다 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말이다.
일단은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고. 금제를 푸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정면 돌파.
소모전 유도? 확인. 독괴의 의도는 알았다.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의 의도에 끌려가는 것은 대개 하책이라는 것이다.
천천히 내공을 소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격에 승부를 보는 것이 좋아 보였다.
다행히도 자하신검으로 자하신검을 사용하는 것은 효율이 아주 높은 편이었다. 내기를 단전에서 외부로 발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이 거의 없는 편에 가까웠다. 이 정도 효과는 있어야 신병이기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건 뭐냐? 내공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자하신검."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자하신검──.
──벽(䧗, Mountain breaker).
보랏빛 강기의 파도가 독괴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