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53화 (53/120)

< 53 : 52. 사천쌍괴(Sacheon double monster)(2) >

안력을 돋구어 독괴의 상태를 살폈다.

독괴의 신체 상태가 눈에 보이듯 그려지고 낱낱이 읽혔다. 뇌리에 잔상처럼 새겨졌다. 사람 학살할 팔자 덕에 얻은 공능이었다.

의복에 이곳저곳 손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어느 정도 전투를 한 것 같은데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타격을 입은 거 같지는 않았다.

찢어지고 구겨진 정장을 입고도 독괴는 고고하게 서 있었다.

무인 치고도 큰 키가 주변 철두철미 사이에서도 두드러졌다. 머리 하나는 위에 있었다. 병장기를 익히기에도 적합한 신체인 듯한데 독괴는 오직 암기와 독만을 공부했다고 들었다.

당문 종중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화산검룡."

"왜."

꿈틀.

독괴가 한쪽 눈썹만을 한번 떨었다.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물러날 생각은 없나?"

"없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너 혼자 여기 있는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모른다."

"……모른다고?"

"그때 다 했던 얘기 아닌가. 해야 한다면 할 뿐이다. 가능한지는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 그랬지……. 상황이 조급해 잠깐 구차하게 굴었군. 격에 맞지 않는 언사였다. 사과하지."

"받아주겠다."

수백 명이 연회장과 본문을 잇는 길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당천갈 이외에는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초여름의 바람은 저녁임에도 잔잔했다. 우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앞을 막으면 죽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해봐라."

"하지만 애초에 네가 막아서지 않는다면 더 편하겠지. 네가 물러서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지금 확실하게 결정했다."

독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엇을?"

"네가 나를 막을 이유가 뭐지?"

"……이제 와서?"

"목적을 분명하게 하자는 거다."

"……무슨 뜻이지?"

"내 목적은 사천당가를 종중에게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수련을 쳐내야 했지. 그 명분을 만들기 위해 아들까지 죽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순간부터 어차피 내게는 당가를 이을 기회가 없었다."

"……계속 말해봐라."

"그러니 처음에는 당무기를 밀어주려고 했다. 그나마 직계 중에서 가장 똘똘한 놈이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근데 연회장에서 약관의 검수에게 손도 못 쓰고 쪽을 당하더군. 실력이 밀리는 것을 알면 차라리 물러나면 추후를 기약했을 것을. 지피(知彼)와 지기(知己) 양쪽이 모두 모자랐던 것이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당무기도 탈락이라는 거다. 내 아들 당무선은 이미 죽었고. 그러면 직계 측을 크게 봐도 후계자는 한 명밖에 남지 않는군. 게다가 내게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당천갈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남자가 대를 잇기를 바랐으나 애초에 당수련도 여자이니 직계가 잇는 것 자체에 감지덕지할 일이다. 이번에 지켜보니 지모도 꽤 출중하고 상황 판단이 빠르더군. 모자람이 없지는 않으나 괜찮은 데릴사위를 데려오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고."

"……그 말은."

"그래."

당천갈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멀리에 서 있는 어떤 인물을 가리켰다.

독도 암기도 아닌 그저 손가락질.

그러나 손끝에 있는 대상은 뭐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나는 당초아를 지지하겠다."

당초아는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경악했다.

일이 예상하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툭툭.

당초아를 보며 미소를 지은 독괴는 뻗었던 손을 다시 접어 가슴을 두어 번 두드렸다. 철두철미의 휘장이 있는 곳이었다.

"철두철미."

팡팡!

척!

독괴의 부름을 들은 수백 명의 철두철미 무인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가슴팍을 거세게 두드렸다. 그 시선 끝에는 당초아가 있었다.

"모든 철두철미는 지금 이 시간부로 당초아 아가씨를 지지할 것이다."

당천갈은 이후 내게 고개를 돌리고 소박하게 웃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오직 한 명만 죽이면 된다."

독괴는 정녕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조직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람 특유의 섬뜩함이 모든 행동에서 묻어 나왔다. 범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치 판단이었다.

친자를 죽이면서까지 당가의 후계자리를 노렸는데 그것을 얻는 것이 본인이 아니었다. 암왕이 빼앗아 간 당가를 다시 가져올 수만 한다면 그게 직계 중 누구라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다시 묻지."

그러니 독괴가 노리는 것은 본인의 승리가 아니라 오로지 한 사람의 목숨이었다.

"왜 네가 나를 막아야 하지?"

당수련.

독괴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죽음이다. 그게 전부였다.

그렇다면 내게 독괴를 막을 이유가 있는가.

생사에 초연한 화경 고수 한 명과 십 수명의 초절정, 수백 명의 절정 고수를 상대하면서까지 당수련을 지켜야 하는가?

애초에 내가 검룡패를 미리 받으면서 약속한 당사자는 당초아였다. 당수련의 생일에 당천갈을 막아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당천갈이 당초아에게 고개를 숙인 지금 그 약속은 빛이 바랬다.

그렇다면 애초에 끼지 않으려 했던 이유.

남의 집안싸움이라는 사실만이 남을 뿐이다.

모든 일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옳지도 않았다.

각자에게 각자의 정의가 있는 이상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완벽한 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림의 세계에서 죽고 죽이는 것은 어디에나 있는 일이었다. 막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만일 이번에 당천갈이 당수련을 죽이려는 것을 막는다면, 후에 당수련이 당천갈이 죽이려 든다면 그것도 막아야 하는가?

세상에서 살인을 완전히 없앨 수 있나? 내게는 그럴 능력도 그럴 자유도 없었다.

모든 의미 없는 이유를 제하고 나면 내게는 사천당가의 권력 다툼에 끼어들 당위성이 없었다.

당수련의 담당 교수라는 아주 작고 별 볼 일 없는 이유만이 남을 뿐이다.

수백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당초아와 당수련을 차례로 보았다. 당수련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당초아의 눈빛에서는 놀라움과 동시에 어떤 미약한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아까 암왕 영감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주님과?"

"나를 이곳으로 초대한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

"뭐라고 하시던가?"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불렀다더군."

"천하의 화산검룡을 그런 이유로? 그래서 너는 뭐라고 대답했나."

"그랬냐고 했지."

"너도 현경 앞에서는 얄짤없었던 모양이구나."

"그 말이 맞다. 이후에는 이번 정쟁에 대해 물었다. 내가 어떡하길 바라느냐고."

"그래서?"

"관심 없다고. 마음대로 하라더군."

"하하……. 관심 없다고. 그래, 그랬는가."

당천갈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처음으로 얼굴에 피로감이 감돌았다.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관심조차 없었던 거로군……."

"그래."

나는 생각에 빠진 당천갈로부터 등을 돌렸다.

"당수련."

"……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불린 당수련은 화들짝 놀랐다. 현장에 있는 수백 명의 시선이 나로부터 당수련으로 이동했다.

"너는 어쩌고 싶나?"

"저요? 저는……."

당수련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그녀의 시선에는 자신을 무감하게 혹은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수백 명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약관의 무인이 쉽게 감당하기 힘든 압박감일 터였다.

당수련은 그 차가운 시선을 외면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저는, 싸우는 게 싫었어요."

한참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던 당수련이 어느 순간 눈을 빛내며 말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서 가장 단단한 표정이었다.

"가문을 물려받을 욕심도 없었고, 언니 오빠들이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을 거 같아서. 그래서 항상 도망쳤어요. 그래서 독과 암기술을 배우는 것도 포기했어요. 나 하나만 그러면 다시 모두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 같아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은 학생 열댓 명이 전부인 곳에서 당수련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계속 저를 싫어했고, 제게 무언가를 바라는 어른들은 제가 뭔가를 하기를 요구했어요. 아무도 할아버지의 손녀가 아닌 저에게는 관심이 없었어요. 저는 그냥 다 포기하고 싶었어요."

당수련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 한쪽 주먹에는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 와서 권각술을 배우고 소중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 스스로도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살고 싶은 대로 살 거에요.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맞서 싸울 거에요."

"살고 싶나?"

"……살고 싶어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는군."

들어야 할 대답은 들었다. 나는 당천갈을 보며 거보라는 듯 턱짓했다.

"어쩌라는 거냐?"

당천갈이 왼쪽 미간만 찌푸렸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너는 당초아를 돕기로 약속한 것 아니냐? 당수련을 내어주면 끝나는 일이다. 그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그 이상으로 원하는 게 있으면 당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와라. 너라면 가질 자격이 있다."

"데릴사위는 질색이다. 아까 거절했다."

"아까? 무슨 소리냐?"

나는 대답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이 아니었다. 등 뒤에 매고 있던 두 번째 검이었다.

연보라색 검신이 여름밤 달빛에 빛났다.

화산파의 가장 유명한 신물이었다.

레플리카는 채 범접할 수 없는 업과 격이 서려 있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디는 신병이기가 마땅히 가지고 있는 기운이었다.

"으음. 진심이냐?"

당천갈이 침음을 흘렸다.

화경의 눈에는 진품의 여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신병이기는 이미 격을 완성한 고수마냥 제 스스로 숨길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괴 역시 검이 진품임을 한눈에 깨달았을 것이다. 애초에 레플리카도 당문의 장인들이 만드는 물건이었다. 구분을 못 할 리가 없었다.

자하신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한 수였다.

화산파 비전무공 자하신검을 사용하기 위한 최적의 병기가 자하신검이었다.

애초에 두 자하신검은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는 한 쌍이었다.

"아까 말한 거 기억나나?"

"무엇 말이냐?"

"암왕 영감님의 말."

"어찌 잊겠나. 내가 하는 모든 일을 관심 없다고 했는데."

"그다음."

"그다음?"

"마음대로 하라고 했었지."

나는 자하신검에 강기를 덧씌웠다. 보라빛 검강이 연보랏빛 검신을 덮었다. 너무 얇아 그저 색이 변한 것처럼 보였다.

"내 마음대로 해야겠다."

모든 일에 나설 수는 없었다.

그건 협이랑은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 땅 위를 살아가는 초라한 한 명의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쩌면 단순한 욕심일 수도 있었다. 공명심이나 도덕적 쾌감을 충족 시키기 위한 헛수고일지도 몰랐다.

"남의 가문 일에 멋대로 끼어드는 건 미안하다. 죽고 죽이고 빼앗기고 쟁취하는 것도 본래라면 분명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닐 터."

당수련과 나는 교수와 학생이라는 관계로 이어진 미약한 인연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스승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 무공부터 신념, 그리고 생명 그 자체까지.

사제 관계라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제자가 살고 싶다고 말했다.

칼을 뽑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내 눈앞에서 내 제자를 죽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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