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 51. 사천쌍괴(Sacheon double monster)(1) >
나는 고개를 돌려 일행의 면면을 확인했다.
당초아와 노인 한 명 그리고 자율무공학부 학생들이 삼재검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인의 위치에 원지혜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휘를 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신, 소걸, 도하나는 없었다.
근데 당수련과 당초아는 그렇다 치고 얘들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몸조심하랬는데 철두철미와 치고받기나 하고 말이야.
도하나가 깽판 치고 있다는 말에 암왕 영감님과 차를 마시다 급하게 출발한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었다.
당초아와 당수련이 무사하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럼 연회장에서 쓰러졌다는 건 누구지?
물어볼 것이 좀 있었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선득했다. 화경의 고수.
"집사 아저씨,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검괴께서 손속에 자비를 두신 듯합니다."
삼재검진의 선두에서 신나게 달려들다가 한 수에 제압당해 튕겨 나간 노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색이 창백하고 입가에는 핏줄기가 흘렀다. 깊은 내상을 입은 듯했다. 목숨에 지장은 없겠으나 전력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검괴란 말이지.
나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정장 아래로 보이는 근육이 울퉁불퉁했다.
불타오르는 듯한 기세. 사나웠다. 정돈되지 않은 자유로운 기파가 주변의 바람을 만들 정도였다.
사천쌍괴의 검괴(劍怪, Sword monster).
"나잇값을 못한다? 날 보고 얘기한 거냐?"
"그래."
"내가 누군지 모르나?"
"방금 들었다. 검괴라던데."
"그래, 내가 바로 검괴다. 감히 내게 나잇값을 못한다고 해? 근데 잠깐. 내가 뭔가를 잘못 들었나 보군."
검괴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들었다고? 원래는 몰랐나?"
"잘은 몰랐다."
검괴가 피식 웃었다.
"나를 몰랐다고."
"그래. 사천쌍괴라는 것은 알고 있는데……."
"사천쌍괴이자 반도제일검(半島第一劍)이며 경상오협의 일원이고 대한민국 무인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 검괴 최상엽에 대해 잘 몰랐다는 것인가?"
"……그, 대단하군. 수상 축하한다."
"아냐아냐. 별거 아니야. 기네스 선정 최연소 화경을 달성하여 소년화경이라는 별호를 얻었으며 타임지 선정 칠룡칠봉 중 검룡을 무려 5년 동안 유지했고 단 한 번 참가한 정사대전에서 최우수 검수상과 최우수 신인상을 동시에 받은 자네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지."
"……그, 어, 고맙군?"
검괴는 아주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로 날 가리키며 내 경력을 줄줄 읊었다.
별호에 괴자 들어가는 인간 치고 정상이 없다지만 이 인간은 내가 생각하는 모습과 좀 많이 달랐다. 성격이 이상할 건 예상했으나 이건 좀.
명성에 집착하는 스타일인가?
"꼭 한번 보고 싶었다. 같은 검수로서 말이지."
"그, 나도 만나서 반갑군."
"그래, 반갑다. 이런 자리에서 만나서 더욱 반갑군."
검괴는 순식간에 검을 뽑아들었다.
"그 화산검룡과 검을 맞댈 수 있다니 말이야."
근데 저 양반, 웃고는 있는데 어째 기분이 좀 상한 거 같다.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 들을 때만 해도 호탕하게 웃고 있던 인간인데 설마 내가 본인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설마.
"오늘 화산검룡을 꺾고 나를 증명하겠다."
검끝에 불꽃 같은 강기가 넘실거렸다. 정제되지 않은 파괴력이 엿보였다.
아무래도 그러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뭐 크게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다.
이곳에는 도하나와 이신, 소걸이 없었다. 물론 당천갈도. 아무래도 여기를 얼른 정리하고 연회장으로 가봐야 할 듯싶었다.
"그런데 아까 말한 것 중에 이상한 별호가 하나 있더군."
"이상한 별호?"
"반도제일검이라 하지 않았나."
"맞다. 반도제일검. 이 나라에 있는 고수 대부분은 당가 출신이라서 검을 다루는 고수는 많지 않지. 그중에서도 내가 독보적으로 뛰어나다는 세간의 평이 있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별호다."
검괴는 전혀 부끄럽지 않아 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근데 왜 그게 이상한 별호지?"
"내가 눈앞에 있지 않나."
"응?"
"진짜 제일검이 당신 앞에 있다는 뜻이다."
"……오호라."
검괴가 등 뒤까지 검을 당겼다가 벼락처럼 내려쳤다.
"그럼 증명하면 되겠구나!"
검괴의 검은 빨랐다. 그러나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나는 이화접목(梨花?木, Grafting)의 수로 검괴의 검을 받아 그대로 옆으로 흘렸다. 흐름이 물처럼 이어졌다.
콰아아아앙─!
길 옆쪽에 있던 숲이 움푹 패였다. 파헤쳐진 흙이 머리 위까지 치솟았다. 나무가 무더기로 날아갔다. 땅에 긴 흉터가 생겼다.
나는 고개를 반만 돌리고 학생들에게 경고했다.
"더 물러나라. 위험하다."
"네, 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아간 흙을 맞고 있던 학생들은 다급하게 뒤로 보법을 밟았다. 근처에 있던 철두철미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화경의 접전.
이하의 무인들은 근처에 있는 것도 감당할 수 없었다.
마냥 내가 이화접목의 수로 검괴의 공격을 흘리지 않았다면 다치는 사람도 생겼을 것이다.
"이런. 잠깐 흥분했군."
"그런 것 같았다."
"다시 가겠다."
"그래."
검괴는 아까보다는 좀 진정한 듯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일격이라고는 하나 내가 가볍게 흘려낸 것을 보고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게 맞았다. 검괴는 마음을 좀 가다듬어야 했다.
굳이 자랑할 마음은 없었지만 한 수를 교환하는 것만으로 나는 확신했다. 검괴가 반도제일검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내가 반도제일검이 맞았다.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니 눈 크게 뜨고 보아라."
이왕 맞붙게 된 거 학생들이 배워가는 것이 있으면 했다. 저들 수준에 뭐가 보이기나 할지 의문이긴 했지만.
당장 나만 해도 최근에 화경과 치고받고 싸운 것은 개강 초기 취견자와의 싸움이었다.
사천당가라는 거대한 문파 하나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화경 간의 싸움이 몹시 드물었다. 세력 싸움이 치열한 지역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화경급 고수가 낀 세력이 싸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당문 내부의 알력 다툼이 아니고서야.
"나를 교보재로 쓰겠다는 말이냐? 너는 내 생각보다는 좀 더 예의가 없는 편이구나."
"그런 말 자주 듣는 편이지."
검괴가 헛웃음을 지으며 재차 달려들었다. 아까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기 신경망을 통해 음속에 반응하는 화경의 속도가 두드려졌다. 체술마저 완성의 경지였다. 나 역시 내공을 순환시키며 반응했다.
검괴의 검은 쾌속했다. 직선적이었으나 때로는 소리를 두고 올 만큼 빠른 검을 휘둘렀다.
게다가 아까 초절정 무인이던 채 집사를 한 수에 무력화시키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강한 공격력도 갖춘 무인이라는 뜻이다.
강기를 다루는 방식이 효율적이지는 않았으나 불타오르는 것처럼 일렁이는 검의 별빛이 무척이나 파괴적이었다.
불꽃, 아니, 그보다는 번개 같은 검이었다.
빠르고 강했다.
검괴는 특이한 성격과는 달리 아주 정직하게 강한 무인이었다.
올곧은 태도로 오랜 세월 수련해온 명문 정파의 기질이 엿보였다.
사실 무라는 것이 그렇다.
오묘한 궤적, 피하고 걷어내고 받아치는 기술, 눈속임, 심리 싸움. 소위 수법이라고 부르는 것들.
어떻게 보면 그런 것들은 충분한 힘과 속도를 얻지 못했기에 필요한 잡기술에 불과하다.
충분한 힘과 속도가 있다면, 그것만으로 승리를 쟁취하는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검괴의 검에서는 그런 신념이 보였다.
오로지 힘과 속도에 치중한 공격일변도의 검술.
훌륭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독문무공을 사용하는 듯했는데 유명한 무공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완성된 검이었다.
"검술의 이름은?"
"검괴검공."
"……그건 너무 대놓고 티 내는 거 아닌가?"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아니, 훌륭하다. 빠르고 강했다."
그러니까 검괴는 나를 이길 수 없었다.
검괴의 성명절기는 충분한 힘과 속도를 얻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한 것이었다. 강기를 저렇게 폭발적으로 사용하면 아무리 내공이 출중하다고 해도 오래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빨랐고.
화산의 검이 더 강했다.
그게 전부였다.
검괴의 검은 빨랐으나 내 눈에는 다 보이고 대응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였다.
검괴검공은 강맹했으나 자하강기의 밀도 높은 강기를 침범하지 못했다.
체술 역시 모자람이 없었으나 나만큼 근육과 혈도의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힘, 파괴력, 속도, 안법, 체술, 발재간, 전신 운동 능력, 판단, 무공 이해도, 내공 조절, 심지어 경험까지.
작은 차이들이 겹치고 겹쳐서 도저히 따라잡지 못할 격차를 만들었다.
검괴의 실력이 모자라지 않았다. 그는 내 바로 밑에 있는 완숙한 화경이었다.
하지만 나와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검괴가 극대화한 힘과 속도 측면에서 내가 더 앞섰기 때문이다. 무인으로서의 완성도와 별개로 나는 검괴와 천 번 싸우면 모두 이길 자신이 있었다.
스걱.
"무슨 차이였나."
"영업 비밀이다."
"그렇군."
검괴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검괴의 검을 그대로 베어냈다. 합철로 이루어진 보검이 종이 베어지는 소리를 남기며 갈라졌다.
"검술의 이름은?"
"자하신검."
"네가 반도제일검이 맞다."
"아무렴."
나는 검을 잃은 검괴의 가슴에 중지 손가락을 튕겼다. 혈도를 짚인 검괴는 자리에서 그대로 무너졌다.
스무 초식도 겨루지 않았고 시간으로는 채 2초가 안 되는 시간이었다.
"다들 잘 봤나?"
"……."
학생들은 대답이 없었다. 잘 안 보였던 모양이다.
"이만 지나가라. 나도 연회장으로 가봐야겠으니."
감히 철두철미도 길을 막지 못했다. 그들 사이로 당초아와 학생들이 정원을 향해 걸었다.
파바밧─.
그때 뒤에서 경공 밟는 기척이 났다.
보니 얼굴이 피범벅이 된 소걸과 이신이었다.
"……너흰 왜 그 모양이냐? 하나는 어딨고?"
"도 소저는 훨씬 안전할 거요. 반대 방향으로 갔으니. 당 소저들은? 아직도 여기 있군!"
"철두철미 뭘 하나. 막아라."
불현듯 차가운 목소리가 길목을 울렸다. 철두철미는 움찔한 후 다시 정원으로 향하는 일행 앞을 막아섰다.
"마침 다들 한 자리에 있군. 수고를 덜 수 있겠어."
태연한 신색. 쌍괴로 묶인 친우가 바닥에 쓰러져 있음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사천독괴. 당천갈이었다.
이윽고 그의 뒤로 뒤늦게 수많은 인영이 차례로 도착했다. 모두 가슴팍에 철두철미의 휘장을 달고 있었다.
나는 내공을 순환시켰다. 검괴와 겨루며 어느 정도 사용하기는 했지만 금방 차오르고 있었다. 전력에 가깝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검룡패를 가불했던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