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 50. 삼재검진(Sancai battle formation) >
한편 인파를 따라 탈출한 원지혜와 자율무공학부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당천갈과 그 수하들의 공격으로부터 탈출한 자들은 연회장 근처에 서성이고 있었다. 일단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라서 연회장을 나오기는 했으나 암왕을 보기 전에는 눌어붙을 모양새였다.
하긴 암왕이 주최한 잔치를 마음대로 떠날 수 있을 만큼 간 큰 객이 연회장에서 나왔을 리가 없었다. 연회장 구석에서 팔짱 끼고 상황을 지켜보는 고수 가운데에는 그런 대담한 자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사천공대 일행은 그 피난객의 한편에 모여있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저 사람들.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과민 반응하는 건가?"
정이삭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보았다. 나무 근처에 남자가 서 있었다. 정이삭이 바라보자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맞다."
답한 것은 옆에서 남자를 힐끗 바라본 당초아였다.
"철두철미로군. 연회장을 습격한 장로 측의 수하다."
"그 말씀은……."
"그래."
당초아는 대수롭지 않은 척 시선을 연회장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가지고 있는 암기와 독을 계산했다.
당초아의 경지는 절정. 딱히 학생들에 비해 낫지도 않은 실력이다.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당수련을 노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맞아? 수련아?"
원지혜는 당수련과 눈을 마주치며 한 번 더 확인했다. 당수련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듯했다. 연회장에서 들은 친족의 죽음이 아직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당초아는 이사장인 자신의 말을 듣고도 당수련에게 재차 확인하는 원지혜를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심 원지혜의 평가를 한 단계 올렸다.
"이동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 보는 눈이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대놓고 연회장을 터트린 걸 생각하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하구나."
원지혜는 당초아와 다른 학생들의 의견을 돌아가면서 들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나는……."
이윽고 일행을 주시하는 시선이 많아지는 듯하자 결정을 내렸다.
"움직이는 게 낫겠어요."
"어디로?"
"저야 당가는 잘 모르죠. 하지만 어디든 여기보다는 나을 거 같아요. 저자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있어요. 철두철미 맞죠?"
"그래."
"안전한 곳은 없을까요?"
"아무래도 본관이 가장 안전하겠지. 가주님이 머무시는 곳이니 말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우리는 상관없어요. 아마 저 사람들이 노리는 건 이사장님과 수련이일 테니까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우리가 없으면 너희를 굳이 노릴 이유는 없겠지. 기분은 상했겠지만 너희를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저 사람들 기분까지 걱정해줄 여유는 없죠."
그때 연회장 안으로부터 노인 하나가 튀어나왔다.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노인은 누구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일행에게 달려왔다.
일행 중 경지가 그나마 높은 원지혜와 정이삭이 반응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노인은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내민 날붙이 사이를 대담하게 통과했다.
"수련 아가씨!"
원지혜와 정이삭은 뻘쭘하게 꺼낸 날붙이를 슬쩍 집어넣었다.
"……아시는 분이야?"
"응. 어릴 때부터 날 보살펴주신 집사 아저씨야."
"걱정했습니다. 수련 아가씨. 무사히 빠져나가셨군요."
"집사 아저씨도 무사하신 거 같아 다행이에요. 다른 장로분들은요?"
"아가씨를 지지하는 장로님들은 연회장 내에서 당천갈 장로님을 지지하는 장로님들과 맞서고 있습니다. 그나마 당천갈 장로님을 막아서는 자들이 있어 저라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옆에 있는 분들은 누구십니까?"
"학교 친구들이에요. 생일 축하를 위해 온……."
"아가씨의 학교 친구분들이셨군요. 반갑게 인사만 할 상황은 아니라 아쉽습니다. 저는 본가에서 수련 아가씨를 전담하고 있는 집사입니다. 채 집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저, 저희도 반갑습니다."
나이 지긋이 먹은 노인이 학생들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예법을 취하자 자율무공학부의 학생들도 어쩔 줄 모르며 답례했다.
이후 채 집사는 주변을 힐끗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단숨에 파악했다. 사천당가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은 연륜에 기한 능력이었다.
"아무래도 당천갈 장로님이 단단히 작정하신 것 같군요. 여기는 위험해질 겁니다. 본관으로 이동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려고 했던 참이었어요. 채 집사가 좀 도와주시겠어요?"
"……당초아 아가씨."
채 집사는 말을 꺼낸 당초아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당초아는 가주파보다는 직계파에 가까운 인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연회장에서 보셨으면 알겠지만 나는 오늘 오빠들과 협력한 바가 없습니다."
"……보았습니다. 제가 선두에서 이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철두철미가 점점 모이고 있었다.
학생들은 몰랐지만 본가 자체를 포위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포위망이 좁아지고 있었다. 이유는 몰랐으나 학생들도 현상은 파악했다.
"저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 전에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원지혜의 말을 듣고 채 집사는 당씨 아가씨 둘의 표정을 확인했다. 둘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원지혜를 향해 말했다.
"지금 당장 가시죠."
선두에는 채 집사. 그 뒤에는 정이삭이 뒤따랐다. 일행의 중심에는 당수련과 당초아가 있었다. 원지혜는 가장 후미에서 상황을 살폈다.
경공을 밟으며 이동하는 일행이 연회장 객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동하자마자 길을 막는 자들을 마주했다.
가슴에 철두철미의 휘장을 달고 있는 자들이었다.
"무슨 일이냐. 내 얼굴을 모르지는 않을 터. 비켜라."
"죄송합니다."
당초아가 별일 아닌 것처럼 명령했으나 철두철미의 무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부 의사를 표했다. 전혀 죄송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감히 당가 본가에서 당씨 직계의 길을 막는다는 말이냐? 참으로 대담하구나."
"명을 받드는 것뿐입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누구의 명인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잠깐 멈춰 있는 사이 뒤에서도 일행을 쫓아오는 자들이 있었다.
"뚫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곳만 넘으면 바로 본가 정원입니다. 가주님께서 아끼는 정원을 망가트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곳까지만 도착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죠. 바로 갑시다."
당초아가 출수했다.
휘리리리릭!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철로 된 나비가 철두철미 무인을 향해 날아갔다.
당초아의 명령을 거부했던 대원이 검지와 중지만으로 나비를 낚아챘다. 무위의 차이가 극심했다는 뜻이다.
호쾌하게 출수했던 당초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래야겠군요."
채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보이는 것 이상으로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두철미는 당가에서 가장 유명한 무력대였다. 전원이 절정 이상의 경지이며 초절정의 비율 또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전원이 초절정으로 구성된 정예 팀도 존재할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사천공대 일행의 전력은 몹시 초라했다.
채 집사가 초절정의 경지였으나 이외에는 당초아, 원지혜, 정이삭, 당수련 고작 4명만이 절정인 상황이었다. 나머지 8명은 절정이 눈앞에 두었으나 일류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포위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원이 저 벽을 뚫을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었다. 당수련과 당초아만 보내면 된다.
"검진을 짜죠."
"검진? 갑자기? 무슨?"
원지혜가 의견을 냈다.
"삼재검진이요. 많이 연습했어요. 고수를 상대로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일 겁니다."
"검진을 짜면 안정적일 수는 있겠으나 돌파력이 낮아지지 않나?"
"우리 애들로 철두철미를 상대하려면 진을 짜지 않고는 무리에요."
원지혜가 확언했다. 일류만으로 거의 동수의 절정 고수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 개개인의 무력은 절대적으로 뒤처졌다. 협력만이 관건이었다.
"알았다. 그런데 삼재검진으로 될까? 나도 진의 구조에 대해 아는데 철두철미가 모를 리가 없는데."
"안 되어도, 어쩔 수 없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학생들은 고작 한 학기 호흡을 맞춰왔을 뿐이다. 다양한 대응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준비해왔던 것을 펼칠 뿐.
"이사장님이 중심에서 '인'을 맡아주세요. 돌파 순간 '천'에 있는 수련이와 합류해서 나아가세요."
삼재검진은 세 겹으로 구성된다.
가장 바깥쪽의 천. 상대와 가장 치열하게 대면하는 곳이다. 수준 이상의 외공을 갖추고 무력이 뛰어난 자들이 맡는다.
두번째는 지. 다소 무공 수준이 떨어지는 자들이 천을 보조한다. 천을 지원함으로써 다소 떨어지는 무위를 보완할 수 있다.
가장 중심은 인. 상황 전체를 조율하는 진의 중심이다. 보통은 가장 시야가 넓고 무력이 뛰어난 자가 맡는다.
보통은 이신이 인을 맡았으나 지금 자율무공학부의 최고수는 부재중이었다.
그나마 학생들에 비해서는 무위가 뛰어나고 암기를 사용해 원거리에서 상황을 조율할 수 있는 당초아에게 인 자리를 맡는 것이 나았다.
천자 겹의 중심은 채 집사가 맡았다. 초절정으로 보이는 철두철미의 무인과 맞붙이는 모양새였다.
자율무공학부 일행이 진을 형성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경지가 학생들보다 뛰어난 채 집사가 당초아가 잠깐 얼타고 당황할 정도. 반복 숙련으로 다듬어진 구성력이었다.
"개진."
천자 겹의 좌익을 맡은 원지혜가 명했다.
채채채챙!
검진을 형성한 일행이 한꺼번에 무기를 뽑아들었다. 쇳소리가 청명했다.
"가자."
원지혜의 말에 따라 삼재검진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어린 학생들이 제법인데."
학생들이 진을 형성하는 것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철두철미의 지휘관이 말했다.
그리고 느릿하게 검을 뽑았다.
"철두철미."
"네."
"철두철미의 뜻을 확실하게 가르쳐줘라. 한 사람도 놓치지 마라."
"존명."
철두철미의 무인들도 일제히 당가검을 뽑았다. 철저하게 무기와 암기의 제식이 통일된 구성이었다.
채채채챙─!
삼재검진과 철두철미가 격돌했다.
최초의 격돌 순간.
양 측은 모두 당황했다.
'무겁다.'
'가벼워!'
첫 타격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예상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자율무공학부에서 천자 겹은 항상 초절정과 화경을 상대해왔다. 지자 겹의 지원을 받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두셋이 한꺼번에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숫자는 비슷했음에도 철두철미의 검 하나에 달라붙는 삼재검진의 무기는 여러 개였다. 자연스러운 협력이 극히 짧은 간격을 두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 수 한 수를 차례대로 걷어냈다.
창과 같은 돌파력은 없었으나, 바위가 굴러가듯 무겁게 나아갔다.
그러나 철두철미의 당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절대적인 경험의 차이가 있었다. 철두철미는 하수를 상대한 경험도 고수를 상대한 경험만큼 풍부했다.
찰나에 적응하고 반격을 시작했다. 천자 겹과 지자 겹을 동시에 노렸다. 철두철미 역시 삼재검진 같은 기본적인 검진은 진작에 꿴 상태였기 때문에 대응이 어렵지 않았다.
원지혜는 이를 악물었다.
지원이 늦었다.
천지가 밀릴 때는 인의 역할이 중요했다. 인이 틈을 만들어줘야 천지가 나아갈 수 있었다.
천지가 예상보다 잘해주고 있지만 인이 늦었다.
당초아로는 부족했다. 무력도 부족했고 상황 판단도 늦었다. 더구나 학생들의 판단을 따라가는 속도도 늦었다.
삼재검진의 원리는 암기하고 있으나 체화되지 않았기에 그랬다.
원지혜가 기어코 소리를 질렀다.
"이사장님! 천자 겹으로 이동하세요!"
"……뭐?"
"제가 인을 맡겠습니다!
이신만큼 잘해낼 자신은 없었다. 이신만한 무력과 무를 읽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지혜 역시 상황 판단하는 능력만큼은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최소한 당초아보다는 나을 게 확실했다. 그만큼 많은 땀을 쏟았다. 학생들의 판단에 대응할 자신이 있었다.
불합리한 무위를 지닌 화경과 초절정의 교수진을 상대로 연무장을 굴러 온 시간이 있었다. 흘린 땀의 무게가 자신감을 만들었다.
원지혜는 마주한 상대를 강하게 쳐내고 반탄력을 이용해 물러났다. 당초아와 자리를 교대했다.
중심에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았다.
보였다.
조감도를 보듯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장 몰리는 최수아의 옆을 찌르고 다음에는 가장 큰 틈을 향해 찔렀다. 채 집사를 도와 초절정 고수를 걷어냈다.
창이 닿았다.
삼재검진이 통하고 있었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검진이었다. 특히 호흡을 공유하는 자들과 함께라면 상성이라 말할 것이 없는 정도였다.
익혀온 삼재종합공들이 적재적소에 쏟아졌다.
그 순간 원지혜는 삼재검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인에 가장 뛰어난 고수가 서는 이유.
사람이 천지를 조율한다.
그것이 삼재검진이었다.
천지가 위대하다고 하나 사람이 없으면 천지는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원지혜는 어떤 심득을 얻었다. 그것이 본신의 무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검진에 대한 것이라 아쉽기는 했으나, 지금은 그것으로 기꺼웠다.
마침내 선두가 돌파했다. 순간적으로나마 철두철미 초절정의 고수의 균형을 잃게 하였다.
그 순간.
섬뜩한 기운이 공간을 장악했다. 삼재검진이 멈췄다. 익숙한 위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럴까 봐 내 직접 발걸음을 했다. 애송이들을 상대로 부끄럽게 뭣들 하는 것이냐.
"……검괴."
사천이괴의 또 다른 하나. 독괴의 친우. 화경 고수. 검괴였다.
원지혜와 삼재검진은 무슨 수를 써도 화경을 뚫을 수 없었다. 익히 증명해온 사실이었다.
원지혜가 이를 악물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지?'
그때, 검괴의 뒤에서 또 다른 움직임이 있었다. 정원 방향이었다.
'추가 지원?'
화경에 더해 추가 지원이 있다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온 인영은 순식간의 검괴의 등을 지나와 삼재검진과 철두철미 사이에 끼어들듯이 섰다.
"넌 뭐냐?"
"지나가던 어른."
김산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잇값도 못하고 애들이나 괴롭히는 것들을 혼내주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