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 48. 생일잔치(Birthday party)(6) >
소걸은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봉을 들고 있는 오른손이 몹시 저릿했다. 순간적으로 봉화(棒火)를 일으켜 당천갈의 독강에 대응한 결과였다.
원래는 당천갈과 이렇게 직접 부딪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개방의 후개로서 본신의 무위가 낮은 편은 아니었으나 화경을 대적하기에는 심히 부족했다.
당천갈이 만약 이번 공격에서 목표를 달성하고 상황을 잘 수습한다면 당가의 차후 실세가 될 수 있다는 정치적 배경도 있었다.
개방을 대표하는 얼굴로서 대놓고 끼어드는 것은 하책이었다.
그러나 정신 나간 검룡의 사제가 당천갈과 홀로 대적을 하려고 하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 손 거들 수밖에.
과거에 마셨던 자소곡차 값을 갚기 위해 당가까지 왔다. 김산은 소걸에게 상황에 맞춰 임의로 판단하여 개입하기를 요구했다.
도하나를 그냥 뒀다가 독강에 스치거나 하여 사지 어디 하나라도 절단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소걸은 당천갈 대신 다른 화경을 상대해야 할 게 뻔했다.
그리고 소걸은 그 다른 화경이 독괴보다 훨씬 무서웠다.
독괴가 도하나를 향해 거대한 독강을 내려치는 순간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화산파의 어리고 유망한 후기지수가 골로 갈 형편이었으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순간 화산파 한국 지부의 문주까지 참전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피어오른 검화, 도화, 봉화가 모이며 독강을 옆으로 쳐냈다. 독강은 튕겨 나가면서도 기세를 잃지 않고 연회장의 바닥을 박살 냈다.
당가 연회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깊은 구멍을 남기고도 독강은 힘을 잃지 않고 아래로 파고 들어갔다. 이내 구멍으로부터 녹회색 연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극독을 품은 기체였다.
독강은 강기 자체의 화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성강의 완성도는 다른 병기를 기반으로 한 강기에 비해 부족할 수 있으나 그 근본이 독이기에 가진 부수적인 위협 요소가 많았다.
독강의 착점으로부터 발생한 독연 역시 그 중 일부였다.
독연을 확인하는 순간 화산코리아 문주 백무강이 검기를 날려 연회장 한쪽 벽을 파괴했다.
소걸은 왼손으로 장법을 쏘아내 연기가 그쪽으로 빠져나가게 했다. 미숙하게나마 항룡장(降龍掌, Dragon lord)을 시전한 결과였다. 내공과 깨달음이 모두 부족하여 제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공기의 흐름을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장내에 거세찬 바람이 불었다.
실내에서 독공의 고수를 상대하는 것은 멍청한 선택이었으나 장소를 바꿀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것이 차선이었다.
초절정 셋이 일제히 물러나며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만들었다. 멈췄던 숨을 몰아쉬었다. 교전 중 독을 차단하기 위해 피부 주변에 둘렀던 기막(氣幕, Ki film)을 해체했다. 비로소 흡입하게 된 산소가 달았다.
강기를 연속적으로 쏟아낼 수 있는 화경의 고수와 달리 초절정에게는 최소한의 정비 시간이 필요했다.
장내에 독이 떠돌고 있는 환경이었다. 연기와 닿는 순간에는 직접 접촉을 피하기 위해 기막을 둘러야 했다. 말 그대로 숨 돌릴 시간도 부족했다.
다행히도 당천갈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몇 마디 꺼내주었다.
"셋의 의지는 잘 알겠소. 허나 강호가 의지만 갖춘다고 되는 곳은 아닐 텐데."
당천갈의 동공 중앙이 녹색으로 번뜩였다. 눈앞에 있는 장애물들의 수준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맹견이 모인다 한들 범을 감당할 수 있겠소?"
"왜 굳이 감당해야 하오?"
소걸이 태연한 어조로 답했다.
"시간이 이쪽 편이지 않소?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은 거지의 본업이라 자신 있는 편이오."
초절정 셋이 모인다고 하여 화경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지만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초절정 셋은 같은 경지 안에서도 수준과 전투 경험이 부족하지 않은 편이었다.
근접 박투 능력이 낮을 것으로 예상되는 독공 전문가를 상대로라면 비교적 할 만한 일이었다.
"당수련은 연회장을 이미 빠져나갔소. 그녀를 쫓던 당가의 대공자도 저기 발이 묶여있고. 곧 당가의 주인에게 도착하겠지. 그러면 모든 상황은 끝 아니오?"
소걸은 너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낱 범이 용맹하다 한들 어찌 용을 감당할 수 있겠소?"
초절정 나부랭이들이 화경을 감당할 수 없듯이 화경 역시 현경에 미치지 못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용이라."
그러나 당천갈 역시 마주 웃었다.
"그건 귀방의 항룡팔장(降龍八掌)을 의미하는 것이오? 아니면 화산의 검룡을 말하는 건가?"
"……아까 못 봤소? 본 거지는 손으로 용의 형상을 만들기에는 공부가 부족하오. 무슨 뜻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모르지는 않지. 허나 내 안배가 여기에만 미칠 것 같소?"
당천갈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소걸 역시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최소한 몇 개월의 준비 기간을 가진 계획이다.
암왕을 상대로 반기를 드는 상황에서 주먹구구식으로 계획을 짜지는 않았을 터.
연회장 내의 독괴 측 무인들은 가주파 무인들이 막고 있는 상황이다. 장로급 무인들의 숫자가 비슷해 전투가 오래가고 있었다.
본래라면 독괴를 포함한 종가측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겠으나 김산 일행이 상황에 개입하며 겨우 전력비를 맞췄다.
그러나 애초에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내 문주급 인사들과 당가의 장로들뿐이었다.
그렇다면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독괴의 수하들은 어디에 있는가?
철두철미는?
소걸은 입구에서 당무선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으며 철두철미가 당가 울타리를 포위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당수련이 가주에게 도착할 일은 없을 거요. 학생들의 실력이 제법이긴 하나 가장 뛰어난 자는 여기 남아있는 모양이고."
당천갈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제 몸보다 긴 장검을 휘두르는 청년이 당무기에게 달라붙으며 압박하고 있었다. 나이 차이에도 오히려 우위를 점한 모양새였다.
예상 외의 복병이었으나 여기서 떼어놓은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당수련을 잡는 것은 우선이긴 했으나 상황이 잘 풀린다면 당무기에게 공을 주지 않는 것이 나았다.
"헌데."
백무강이 끼어들었다. 소걸과 당천갈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온전히 몸 상태를 정비한 신색이었다.
"장로께서 말씀하신 다른 용이 밖에 있지 않소. 그것까지 다 계산된 거요?"
항룡장이 아닌 다른 용. 화산검룡 김산을 의미함이다.
도하나 역시 방긋 미소 지으며 끼어들었다. 커다란 도기를 다시 피워 올리면서였다.
"사형이 오고 있을 거에요."
당천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검룡은 얕볼 수 없는 사내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영 안심이 되지 않는군. 당연히 셈을 하긴 했으나 귀하들을 처리하고 내가 직접 상대하는 것이 더 낫겠지."
독괴는 양손으로 독강을 일으켰다. 눈앞에 있는 것들을 단숨에 제압할 심산이었다.
몸 상태를 온전히 재정비하지는 못한 소걸이 봉을 허리춤에 찔러놓고 두 손을 가슴 앞에 위치시켰다. 손바닥을 자연스럽게 편 채였다.
아무래도 여기 낀 인물 중 수준이 가장 떨어지니 보조할 생각이었다.
개방의 후개가 어디 가서 꿇릴 위치는 아니었으나 현실이 그랬다.
당가의 장로와, 잠깐이나마 화산파의 이십사수매화검수였던 노고수와, 약물과 학대에 가까운 훈련으로 길러진 살인기계 사이에 있으니 초라했다.
"본 거지는 독기를 막고 후처리하는 데 집중하겠소. 두 도사 분이 앞에서 고생해주시오."
"뒤에 누워서 장풍이나 쏘면서 노구를 앞세우려는 것이냐? 거지라 그런지 예의가 없구나. 장유유서를 모르느냐?"
"와요!"
양손에 독강을 펼친 채 보법을 밟으며 다가오는 당천갈을 향해 도하나는 오히려 달려들었다.
여도사의 돌진에 기겁한 백무강이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이런 미친! 어린 것이 겁도 없구나. 그 꼴통하고 같이 다녀서 그런가!"
"꼴통이요? 누가요?"
"하긴 김 형이 좀 꼴통이긴 하오."
"사형이요?"
당천갈은 겁 없이 달려드는 하수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 와중에도 입을 쉬지를 않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독괴라는 별호는 반납하는 게 좋겠다. 진짜 정신 나간 것들을 보니 별호에 괴를 붙이는 게 부끄럽구나."
"본 거지가 생각하기에는 귀 장로는 그때까지 살아있을지를 걱정하는 것이 나을 거 같소. 암왕 어르신이 자비로운 편은 아니지 않소?"
"본 도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당장 살 것을 걱정해야 할 것 같구나. 저 살벌한 강기 좀 보아라."
"그것도 맞군."
"미친 것들."
휙─.
도하나와 백무강이 각자 휘둘러지는 독강을 피하며 무기를 횡으로 베어 반격했다.
콰앙─!
짧은 틈새 당천갈이 팔을 거둬들인 후 다시 뻗었다. 팔과 철로 된 병기가 부딪쳤는데 폭음이 들렸다.
도하나와 백무강은 양쪽으로 튕겨 나갔다. 당천갈은 비교적 무위가 떨어지는 도하나를 향해 따라붙었다.
그러다 고개를 꺾더니 날아오는 장력을 쳐냈다. 용의 형상을 채 이루지 못한 빛살이었다. 시선 끝에서 어린 거지가 웃고 있었다.
소걸이 벌어준 틈을 타 도하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몇 수를 교환하지도 않았는데 전신이 삐걱거렸다. 벌써 몇 번이나 도화를 사용한 탓에 단전이 공허했다.
다행히도 속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당천갈이 더 빠르기는 했으나 압도하지는 못하는 상황.
당천갈이 화경에 도달했으나 그 신체를 온전히 활용할 만한 체술의 달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펼쳐진 일이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내공 부족이 느껴졌다. 그나마 연배가 높아 내공이 깊은 백무강 역시 그랬다. 수준에 맞지도 않는 항룡장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소걸은 거의 죽을 맛이었다.
네 명 모두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건 지속 가능한 전투가 아니었다.
초절정 셋으로 화경을 상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간 싸움이었다. 검강과 검화의 완성도 차이 때문이다. 교전을 시작한 지 몇 분 되지 않았는데 셋을 벌써 쓸 수 있는 시간을 거의 다 썼다.
문득 소걸의 눈이 뒤로 향했다.
"이신!"
당가의 대공자와 덕수이가의 후기지수가 맞붙고 있는 쪽이었다.
"……네? 소 조교님? 저 부르셨어요?"
"어서 정리하고 너도 껴라."
소걸은 숨을 헥헥거리며 몹시 구차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이러다 나 죽겠다."
도무지 개방의 후계자로 보이지 않았다. 일말의 위엄도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당천갈이 목숨을 걸고 얻고자 하는 당가 후계자 자리와 동격이었는데 말이다.
"……예?"
이신이 얼빠진 표정으로 멈춰 섰다. 그 사이 당무기가 거리를 벌렸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린놈의 보법이 제법이었다.
이신은 아차 싶은 표정으로 그걸 보다가 소걸에게 대답했다.
"그, 저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데요."
"아니잖아요."
도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신을 바라보았다.
"이신 학생. 망설이고 있죠?"
"망설이다뇨?"
"교수님하고 비무할 때랑 검술이 다르잖아요."
"그거야 교수님은 화경이시고 하니까……."
"지금은 실전이에요. 실전을 위해 수련하는 거잖아요. 경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자를 베세요."
"하지만, 이분은 수련이 사촌 오빠시기도 하고……."
"수련 학생을 죽이려는 사람이기도 하죠."
"……."
이신은 입을 다물었다.
비무 중에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은 있었어도 아직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베어본 적이 없었다.
실전 같은 실전도 경험해본 적 없고 덕수이가라는 명문 무가 출신이기에 그랬다.
자기보다 하수 혹은 동수를 상대로는 가문 비전의 청룡검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전쟁을 위해 개발된 철저하고 실리적인 살인 검술이기에 그랬다. 공격성을 절제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모든 무인은 결국 폭력을 업으로 한다.
의롭고 성실한 이신이 여태 무의식적으로 외면해온 사실이었다.
무인의 실전은 결국 고상한 비무가 아니었다. 죽고 죽이고 다치고 다치게 하고 피를 피로 되갚는 진흙탕이었다.
"죽이지만 않으면 돼요. 최선을 다해 상대하고 이쪽에 붙으세요. 당장 여기도 죽기 직전이니까."
이신은 무거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장검의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청룡검법의 기수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