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 47. 생일잔치(Birthday party)(5) >
"화산파? 그렇군.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마저 그자하고 비슷하구나."
독괴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연회장의 화려한 조명들이 빛났으나 화경의 육신은 눈부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도 어째 쉽게 되는 것이 하나도 없군."
독괴가 낮게 읊조렸다. 독괴는 이내 양손에 독기를 가득 끌어올렸다. 녹색 연기가 몸을 휘감았다.
명백한 독인(毒人)의 전투태세였다.
"쳐라."
이윽고 독괴는 고개를 정면으로 내리며 나지막하게 뱉었다.
그에 호응하듯 연회장 곳곳에 있던 독괴의 수하들이 일제히 기세를 일으켰다.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숙부님?"
당가 본가에서 금지옥엽의 생일에 대놓고 칼날을 꺼내 들었다. 곁에 있던 철공자 당무기마저 기겁할 일이었다.
"숙부님, 제정신이십니까? 곧 가주님이 오실 겁니다!"
"대공자나 정신 단단히 차리시오."
독괴가 담담히 받아쳤다.
"가주가 이 상황을 모를 것 같소? 알고도 내버려두는 것이오. 앉은 자리에서 손바닥 보듯이 우리를 읽고 있을 것이오. 이 땅에 가주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소."
"가주님께서……."
"그저 발버둥을 기다려주고 있는 것뿐이오. 이대로 상황이 끝난다고 한들 우릴 용서하지는 않겠지. 무슨 뜻인지 알겠소? 지금이 당가를 되찾아올 마지막 기회라는 말이오."
"마지막 기회."
철공자 당무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당무기 역시 안일한 마음으로 이 계획에 낀 것이 아니었다. 당가 종중의 직계 적자였다.
숙부가 사촌 동생의 목숨까지 앗아가면서 일을 도모할 줄은 몰랐으나 당무기 역시 걸 수 있는 것은 모두 걸었다.
"알았으면 해야 할 일을 하시오."
당천갈이 당수련 쪽을 향해 턱짓하자 당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당수련을 맡도록 하지요."
"그러시오. 나도 장애물을 치우고 금세 따라가겠소."
"쉽지 않을 텐데요?"
두 남자가 대화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도하나가 끼어들었다.
"두 분이 합공을 하는 것이 어떨까요?"
"……바로 가시오."
"알겠습니다."
당무기는 광인을 보는 눈빛으로 도하나를 보더니 보법을 밟아 도하나를 넘어갔다. 젊은 여자가 독괴를 상대하려 들다니 미친 게 틀림없었다. 만독불침을 이룬 반로환동의 고수가 아니고서야.
도하나도 굳이 막지 않았다. 보고 배운 대로 습관적인 도발을 했으나 당천갈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울 것이 자명했다.
어쨌든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도하나는 도기를 가득 끌어올려 독괴의 기세에 대항했다. 가만히 대치하고만 있어도 숨이 막힐 정도였다.
독공의 고수가 병장기의 고수에 비해 박투 능력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실력의 고하가 명확했다.
사천독괴는 독강을 일으킬 수 있는 화경의 고수.
도하나가 독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편이기는 했으나 강기를 이룬 독을 버틸 수는 없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일 것이 분명했다.
초장부터 전력을 다해야 시간이라도 끌 수 있었다.
"혹시 3초식 양보 가능한가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저씨가 저보다 고수잖아요."
"허허."
"아니면 말고요. 고수 아닌가 보네. 동수인가 보다. 3초식 양보하면 자신 없나 봐."
독괴의 실소를 들으며 원지혜에게 전음을 보냈다.
─도망쳐.
그와 동시에 독괴가 도하나에게 달려들었다.
"미안하지만 내게도 여유가 많지 않구나."
"별 기대도 안 했어요."
콰쾅─.
도하나는 피하는 데 집중하며 독괴와의 전투를 시작했다. 도하나의 옥색 도기와 당천갈의 진녹색 독기가 뒤섞였다.
갑작스러운 무력 사태에 정신을 놓고 있던 원지혜가 전음을 듣고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잘을 모르겠지만, 연회장 여기저기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당수련을 노리는 모양이었다.
사천당문을 배경으로 하는 싸움이었다. 일개 후기지수들이 끼어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당수련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온몸을 발발 떨고 있는 당수련이 눈에 들어왔다.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장내만큼이나 심정이 혼란스러운 듯했다.
원지혜는 연신 고개를 돌리며 전체적인 상황을 살폈다.
장내 곳곳에서 독연이 피어올랐다. 독괴의 수하들이 손을 쓰기 시작하자 가주파의 장로들이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객들은 연회장 구석으로 물러나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술잔을 들이키는 자들도 있었다.
잔치에 참석한 모두가 고수는 아니었다. 연회장 곳곳에서 날리는 독기와 경파를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은 기겁하여 밖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학생들은 독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자."
원지혜는 출구를 가리켰다. 인파에 섞이는 것이 유리해 보였다. 아무리 사천당가라고 하더라도 아무나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니.
당수련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다른 학생들도 줄줄이 따라왔다.
이신만이 가장 뒤에 혼자 남았다.
"먼저 가."
"이신?"
스르릉.
이신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등 뒤에서 장검을 뽑아들었다.
본인 키보다 길이가 긴 기병이었다.
"뭔 소리야! 너도 따라와!"
"이대로는 못 가."
원지혜는 그제야 이쪽을 향해 보법을 밟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당가의 철공자. 초절정으로 알려진 암기의 고수였다.
이신 외에는 맞설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이신이 상대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초절정을 등 뒤에 두고 달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암기의 고수라면 더욱 그랬다.
"적당히 시간만 끌다가 따라와. 밖에서 기다릴게. 교수님 말씀 들었지? 도망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냐."
"응."
원지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렸다.
"가자."
학생들은 침묵으로 따랐다.
"요즘 강호의 질서가 엉망이군. 여기저기서 어린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니."
철공자 당무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이신을 보았다. 약관이나 될까 말까 한 애송이가 제 몸에 맞지도 않는 긴 검을 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솜털도 채 빠지지 않은 것 같은데 아서라. 사천공대의 후배 같은데 이런 곳에서 인재를 잃고 싶지는 않구나."
"한 수 배우겠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군. 당수련을 위해 목숨까지 걸 셈이냐? 대체 왜?"
"친구를 위해 검을 뽑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마음은 갸륵하나 지금은 소꿉장난에 어울려줄 시간이 없구나. 내 손속이 과함을 원망하지 마라."
당무기가 품에서 비수를 여럿 꺼내 날렸다.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고 제압을 위해 말단을 노렸다. 섬전 같은 속도였다.
"추후 보상은 다 해줄 것……."
채챙─.
이신은 긴 검을 부드럽게 휘둘러 단번에 비수를 쳐냈다. 한 호흡이었다.
검끝에 순간적으로 검화가 맺혔다가 흩어졌다. 초절정의 상징이었다.
"오늘 어이없는 일을 여럿 보는군. 그 나이에 초절정이라니."
당무기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무기가 만약에 저 나이에 초절정이 되었다면 굳이 이런 추잡한 짓거리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천하의 후기지수로 이름을 떨치며 당가의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했겠지.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당무기는 사업 수완은 뛰어났으나 무재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나이 마흔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잘 쳐줘 봐야 수재에 불과했다.
지금은 나이 스무 살은 어린 친척 여동생을 죽이려는 쓰레기였다.
당무기는 눈 깜빡할 사이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기세를 갈무리하고 품 안의 암기를 헤아렸다. 제한된 숫자의 암기를 사용할 최적의 순서와 조합을 짜기 위함이었다.
명실상부 동격의 고수를 상대하는 태도였다.
"하긴 강호에 남녀노소가 어디 있는가."
검후의 등장 이후로 남녀의 구분은 빛을 바랬고, 소년화경의 등장 이후로 나이를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오랜 세월 대기업의 임원으로 살다 보니 가장 중요한 명제를 잊었다. 무림의 세계에선 무공의 고하만이 전부였다.
"최선을 다하겠다."
급소를 노리지 않는 자비는 당무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말랑말랑한 감정에 매몰될 여유가 없었다. 당가인다운 냉철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죽거나 죽이거나.
갖거나 잃거나.
칼 위를 걷는 강호인의 삶은 결국 그 단순한 법칙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당무기는 시야에서 멀어지는 당수련의 등을 보았다. 저 등이 본관까지 닿는다면 세워온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었다.
암기술이란 무릇 인간을 죽이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었다.
이제 가다듬어온 암기술을 증명할 시간이었다.
당무기는 정장 곳곳에서 암기를 여러 개 뽑아들어 한꺼번에 던졌다.
쒜에엑─.
궤적을 읽기 힘든 표창부터, 일직선으로 쇄도하는 비도, 바닥을 튀며 목표물을 노리는 독연 폭발물까지 십수 개의 다양한 암기들이 이신과 그 너머의 당수련을 향해 날아갔다.
이신은 눈빛을 빛내며 날아오는 암기를 하나씩 쳐냈다.
타타타당!
하나를 걷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모든 암기를 쳐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무기 역시 초절정을 상대한 경험이 많지 않았으나 이신에게는 초절정의 암수(暗手)를 상대한 경험이 아예 없었다.
동시에, 혹은 연속적으로 몰려드는 암기를 모두 걷어낼 수는 없었다.
신체를 노리는 것은 대부분 쳐냈으나 애초에 이신을 통과해 당수련을 노리는 것은 몇 개 놓쳤다.
"조심……!"
휘리리리릭!
그러나 그쪽에서도 날아오는 것이 있었다. 당무기가 쏘아낸 암기들은 미확인 투사체와 맞부딪힌 후 힘을 잃고 추락했다.
바닥에 떨어진 투사체가 당무기의 눈에 들어왔다. 상황을 파악한 당무기는 이를 깨트릴 듯 악물었다.
철로 된 나비였다.
"당초아……!"
순간 당무기와 당초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당초아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눈동자에는 승리감이 맴돌았다. 그 후 다시 몸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자율무공학부 일당 중에서 최후미였다.
"한 수 배웠습니다."
그러나 당무기에게는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두 수만에 원거리에서 암기를 상대하는 것이 까다롭다는 것을 깨달은 젊은 검수가 박투를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검수와 암수의 싸움은 거리가 생명이었다. 당무기는 이를 갈면서도 보법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그 순간 거대한 폭음 등 뒤에서 울렸다.
초절정 따위의 화력으로 날 수 없는 소리였다.
당무기와 이신의 시선 역시 순간적으로 그쪽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신은 아는 사람이 그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고, 당무기는 숙부가 드디어 광녀를 물리쳤구나 하는 확신 때문이었다.
폭음이 들린 장소에서는 거대한 독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당천갈이 독강을 폭발시킨 결과물이었다. 손님이 다 빠져나가지 않은 연회장에서 그런 짓을 했다는 점에서 독괴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았다.
콰아앙!
문득 다시 한번 폭음이 들리더니 연회장 옆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기의 흐름에 따라 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대부분의 독연이 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윽고 빠져나간 독연 사이에서 독괴와 대치하고 있는 인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셋이었다.
"순 객기인 줄 알았더니 실력이 제법이구나."
"이 정도로 뭘요. 별거 아니에요."
화산파 무무문 수습 도사 도하나.
"문주는 나를 지지하는 줄 알았소만? 문주까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지금의 행동이 화산 전체의 뜻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것이오?"
"문주직은 아까 때려치웠소. 나 개인이오."
화산코리아 문주 백무강.
"그럼 후개께서는?"
"후개 아니고 사천공대 조교요. 교수 놈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요."
개방 후개 소걸.
초절정 셋이 화경 하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넷 중 어느 하나 미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