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 46. 생일잔치(Birthday party)(4) >
김산이 본관에서 암왕과 독대하고 있을 무렵.
연회장의 상황은 당초아와 당수련이 대비한 것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당초아는 당천갈이 철두철미와 추종자들을 이용한 무력행사를 통해 후계자들을 압박할 것으로 생각했다.
애초에 후계자가 아닌 당천갈에겐 후계 경쟁에 공식적으로 끼어들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괴는 아들인 당무선을 장기말 삼아 개입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무선 본인의 세력은 몹시 작았지만 독괴가 개입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독괴에게는 일신의 무력과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세력이 있었다.
당무선을 제외한 다른 후계자들을 없애거나 그들이 스스로 후계 경쟁을 포기하게 하면 자연히 당무선이 정식 후계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당초아가 생각한 당천갈의 수는 뻔했던 것이다.
생일 현장의 무력 장악, 그리고 다른 후계자의 제거.
독괴는 무림공적까지 고용해 영물 실험을 했다. 죽어도 되는, 출처 없는 병력을 양산하기 위해서.
"그런데 먼지가 우리와 접촉하면서 우리가 알게 된 정보가 너무 많아졌던 것 같아요."
당초아가 잘게 손을 떨면서 얘기했다. 금단 증상이었다. 시가, 아니면 요구르트라도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실제로 당천갈은 처음에 무력적 반란을 계획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초아가 알게 된 이상 그 계획의 실현 가능성은 대폭 하락했다.
당문의 세력은 거대했다. 철두철미는 대외적으로 가장 유명한 당문 소속 무력대이지만 그조차도 당문 내부에서는 일부에 불과했다.
예고되지 않은 기습이 아니라면 일개 무력대로 현장을 장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몰래 준비하던 영물 양산 계획마저 김산이 개입하면서 무너진 상황이었다.
독괴 측의 전력이 압도적이지 않았다.
만약 당초아가 당천갈의 불순함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대비하기라도 한다면 당천갈의 반란이 성공하기는 힘들었다.
장로들의 지지를 받는 당수련이 개입한다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계획을 바꿨을 것이다?"
"당연히 생각했어야 하는 부분이었어요. 실제로 어느 정도 대비하기도 했고요. 그게, 이런 방향일 줄은…… 몰랐지만요."
정보는 양방향으로 흐른다. 한쪽에서 접촉하는 순간 상대도 접촉 여부를 알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가문 내부에서 파벌을 끼고 흐르는 정보라면 대개 그런 식이었다.
당초아가 당천갈의 계획을 확인하는 순간, 당천갈 역시 자신의 계획이 들켰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적에게 알려진 기습을 그대로 진행하는 것만큼 멍청한 행동은 없었다.
실제로 당초아와 당수련이 손을 잡고 도움을 요청한바, 당가의 장로들이 생일잔치에 대거 참석했다. 당씨 자매 측에서도 무력 분쟁을 준비한 것이다.
당초아는 충분한 대비를 했다고 생각했다.
당천갈도 그 대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천갈은 판을 엎었다.
아예 다른 방식으로.
"음, 상황 파악이 빠른 것은 좋소만."
소걸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돌아가는 꼴이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은 것 같소?"
말 그대로였다.
"가주께서, 오늘부터 제대로 경쟁이 시작되리라고 선언하기는 하셨으나."
독괴가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붉어진 눈으로 성토하고 있었다.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이렇게 불미스러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소."
폭력으로 후계자들을 제거하려는 원래 독괴의 계획을 알고 있던 자들 눈에는 가증스러운 태도였으나, 제3자가 보기에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 보였다.
독괴의 분노는 정당했다.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한 것이냐."
독괴는 당씨 자매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시선이 주목되었다.
그 순간 연회장에 참석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정황이 그려졌다.
천하칠대세가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자들. 혈육과도 권력을 나누지 않는 냉정한 당가인들의 골육상잔. 본인의 생일잔치에서 경쟁자를 보내버리는 독심.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당가는 네 것이 되었을 텐데."
정확히 그 이유였다.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당수련이 당가의 후계자가 될까 봐. 당천갈은 친자를 독살했다.
방계인지도 확실치 않은 외부인에게 넘어간 당가의 권력을 다시 직계에게 가져오기 위해서.
"아, 아니. 저는……."
당수련이 핏기 가신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당수련이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자리에서 당수련을 추궁해도 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당수련이 무슨 짓을 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었으나 죽은 아이의 아버지가 당수련을 지목하면서 의심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사천당문의 내부인이 아닌 구경꾼들에게는 그랬다.
바로 옆에 있던 자율무공학부의 학생들마저 옅게나마 의심을 할 정도였다.
"수련이가 그랬다고?"
"그럴 아이가 아닌데……."
"하지만 그 당가잖아."
"됐어. 야, 당수련."
"으, 응?"
"네가 한 거야?"
"아, 아냐. 내가 안 했어……."
"얘가 안 했대."
원지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난 너 믿어."
"지혜야……."
당수련은 눈동자를 글썽였지만 친구 몇에게 인정받았다고 상황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가주께서 금일부터 대사천당가의 후계 자리를 위한 경쟁이 시작된다고 하였으나 이런 방식은 아니었을 터. 반드시 조사해 범인을 찾고 말겠소."
"옳소!"
"무인이라면 응당 정당하게 겨루어 자리를 쟁취해야지, 이런 방식은 영 아니올시다!"
당천갈에게 이권을 약속받은 참석자들이 당천갈의 말에 호응했다.
그들은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당천갈이 권력을 얻으면 본인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진다는 것.
누가 범인이고 아니고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다른 후계자들을 조사했으면 하오. 물론 후계자들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소만, 만약 결백하다면 못난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는 셈 협조해 주었으면 좋겠소."
당수련과 당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는 대비한 적이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협조하지요."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사천당가의 직계 장자. 철공자(鐵公子, Iron man) 당무기였다.
당무기는 손을 좌우로 가볍게 올리고 손바닥을 편 채 당천갈에게 다가갔다.
"그것으로 숙부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협조하지 못할 것이 없지요. 본인이 떳떳하다면 조사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소?"
"고맙소, 대공자."
"초아야, 너 역시 마찬가지 아니냐?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당당하게 조사를 받거라."
당무기의 말은 몇 가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조사하는 분위기에 협조해라. 너도 사천당가 직계 일가 아니냐. 먼저 가장 유력한 경쟁자를 처리하자. 조사를 받는다고 해도 별일 없을 것이다.
당초아를 부르면서도 당수련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이미 당수련을 죄인 취급하는 모양새였다.
당초아는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혀를 잘게 깨물면서 머리를 굴렸다.
'숙부, 아니, 독괴는 미쳤다.'
당초아는 당천갈의 붉은 눈을 보며 생각했다. 그건 슬픔이라기보다는 광기에 가까워 보였다.
당초아가 당수련과 가까이 지내며 보아온바, 당수련은 제 사촌을 독살할 인간이 아니었다. 애당초 독과 암기에서 손을 뗀 지도 오래였다.
당초아 본인도 제 사촌 오빠의 죽음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당무기? 당무선을 죽일 이유가 전혀 없다. 명분부터 실력, 권세까지 모든 면에서 당무선에게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자가 범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당무기가 가장 이득이기는 했다. 당수련을 제거하고 나면 가장 유력한 후계자가 당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초아의 귓가에는 사천공대 정원에서 들었던 당천갈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는 것은 미련한 일이지.
당천갈은 그렇게 말했었다.
후계자 셋을 제거하면 당천갈은 제 아들을 유일한 후계자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후계자 넷을 제거하면 어떻게 되는가?
당가주 자리가 자식까지 제거해가며 얻어야 만큼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으나 당초아는 그런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심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똑똑한 척만 하는 멍청한 친오빠는 당천갈에게 협조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태연하게 굴고 있었으나 당초아는 믿지 않았다.
제 피붙이도 죽이는 인간의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조사에 협조한다고 당천갈의 품으로 가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게다가, 여기서 조사를 받는 것은 협력을 약속한 당수련을 버리는 행위였다. 설령 무사히 풀려난다고 해도 중요한 순간에 신의를 저버린 자가 후계 경쟁을 계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협조하지 않기도 힘들었다. 저들은 떳떳하다면 조사를 받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조사를 거부하는 것은 제3자에게 범인이라는 인상을 남길 가능성이 높았다.
'어찌해야 할까.'
당초아는 당수련과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걸, 도하나, 자율무공학과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연회장 곳곳에 자리한 몇 안 되는 당초아의 사람들.
학생들을 제외하면 당수련과의 협력 사실을 아는 자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신의를 배신한다면, 살아남아도 미래가 없었다.
당초아는 결정을 내리고 당수련의 곁으로 걸어갔다.
"숙부의 말씀에는 동의하기 어렵군요."
"무슨 말이냐."
"마치 숙부님은 다른 후계자가 당무선 오라버니를 독살했다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데, 그랬다는 증거가 전혀 없지 않나요?"
"저저……! 말하는 것 좀 보게……!"
"제 친족이 죽었는데 저리 뻔뻔하고 냉정한 태도라니. 저게 독접인가!"
"애초에 무슨 독에 당해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자의 친족에게 조사를 받는 것은 그렇게 공정한 과정이 아닌 것 같군요. 엄한 생사람을 잡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조사는 가문의 다른 어른에게 맡기면 될 일. 조금 있으면 가주님이 오실 시간이니 가주님에게 아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긴, 곧 가주님이 오실 시간이긴 하군."
"그렇네. 손녀의 생일잔치를 이렇게 성대하게 연 것도 당가주님이니 말이야."
조용히 당초아의 말을 듣고 있던 독괴는 이내 무표정하게 일어섰다. 자기 아들의 시체를 차가운 땅바닥에 내려놓은 채였다.
"너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생일잔치의 주인을 의심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그 의심 자체가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거예요."
"굳이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는가."
독괴는 천천히 당수련 쪽으로 걸어왔다.
암왕이 도착하기 전에 상황을 끝내지 못하는 것은 독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암왕이 잔치에 참석하기로 한 시간까지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시간이 부족했다.
저벅저벅.
자식 잃은 아버지가 걷는 길을 아무도 막아서지 않았다. 둘러싼 인파가 좌우로 퍼졌다. 충돌을 대비해서 멀리까지 물러났다.
"정지."
그 거침없는 발걸음을 한 소녀가 막았다. 생글생글 그 나이다운 꽃 같은 미소를 지었으나 그 등에는 거대한 도를 패용한 채였다.
"……정지? 나에게 한 소리냐?"
"사형이 학생들을 보호하라고 했는데. 아저씨가 아무래도 우리 학생을 괴롭히려는 것 같아서요."
"아저씨?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소리냐?"
"사천독괴."
당수련 역시 자율무공학과의 학생이었다.
도하나는 명령한 대로 움직인다. 학생을 보호한다.
그게 전부였다. 화경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맨날 도를 부딪치는 사람이 화경이었다. 한 번도 이긴 적은 없었지만.
"잘 알고 있구나. 그런데 내 앞을 막아서는 것이냐? 넌 뭐냐?"
"사형이라면 어떤 식으로 말했을까요?"
"……지금 내게 묻는 거냐? 똑바로 대답할 수 있는 게 없나?"
도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산파의 수습 도사. 사형의 사매. 사천무공대학의 조교 겸 수위. 도하나."
그리고 독괴가 일으키는 기세에 맞춰 등 뒤에서 도를 꺼내 들었다.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