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 45. 생일잔치(Birthday party)(3) >
사천당가 본관은 앞에 커다란 정원을 끼고 지어진 남회색 건물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담백했다. 절제된 형식미가 느껴졌다. 완벽주의자적인 기질마저 느껴졌다. 당가의 장인들이 지었음이 분명했다.
일반적인 저택과는 다르게 창문이 거의 없었고 몇 개 있는 것도 크기가 작았다. 독과 암기를 다루는 자들 특유의 폐쇄적 성향이 엿보였다.
본관 정문에 도착하자 사용인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는 짧게 목례하고 본관에 들어섰다.
한발 내딛은 순간.
등줄기에 전율이 흘렀다. 공간 전체를 타고 흐르는 기운이 전신을 압박해 들어왔다.
잠시 시야가 일그러진다고 느낄 정도로 강렬했다.
공간이 명백하게 나뉘어 있었다.
화경 특유의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 아래 사지(死地)와 생로(生路)가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누군가가 임의로 만들어낸 환경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용인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사지 위에 있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로지 고수를 위해 준비된 환경이라는 뜻이다.
생로는 폭이 몹시 좁았다. 그러나 끊기는 일 없이 이어졌다.
나를 초대하는 길이었다.
생로를 따라 걷기 전에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만약의 사태가 생겼을 때 빠져나갈 구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허."
바깥.
내가 지나온 길. 정원. 하늘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사지였다.
그 끝이 가늠되지 않았다.
암왕은 진작부터 이 저택에 들어선 모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화경마저 그 손아귀의 바깥에 있지 않았다.
암왕이 드러내기를 의도하지 않았기에 느낄 수조차 없었던 것뿐이다.
연회자에서 일어난 사실을 고할 필요조차 없었다. 사용인의 도움이 없더라도 암왕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현경의 영역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건지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암왕.
팔현경의 일좌.
무공을 배운 수십억의 인간 중 단 수백 명만이 화경의 경지에 오른다.
그중에서 양손으로 꼽을 수 있는 한 줌의 무인만이 무의 끝[武極, End of arts]에 닿는다.
화경을 아이처럼 여기는 절대자의 경지였다.
그 중에서도 죽음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자가 암왕이었다. 서방에서는 플루토(The Pluto)라는 별호로 암왕을 일컫는다.
암왕이 내 목숨을 노린다면 나는 절대로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마음에 칼을 세웠다. 나는 일개 무인이 아니라 화산검선(The Hermit)의 의지를 잇는 제자이기 때문이었다. 무공의 고하에 따라 해야 할 일이 바뀌지는 않았다.
뒤는 없었다. 나아갈 길만이 있었다.
나는 좁은 생로를 따라 걸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본관의 가장 높은 층까지 다다랐다.
계단 앞에 있던 노인이 내게 묵례를 하고는 등을 돌려 안내했다. 사용인들의 대표 정도로 보였는데 경지는 초절정이었다. 그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기에 나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생로는 가장 끝에 있는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들어오거라."
근처에 가자 안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 기의 흐름을 읽기 어려운 수준의 허공섭물이었다.
커다란 방이었다.
농구장 크기 정도 되는 방에 책과 표본 따위가 가득했다. 독일 것이 분명한 물건이 도처에 깔렸었으나 어떤 향도 나지 않았다.
지루한 표정으로 책상에 턱을 괴고 있는 중년인이 어떤 조치를 한 것이 분명했다.
"오랜만이구나. 화산의 꼬마야."
진작 칠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머리가 검고 자세가 곧았다. 얼굴에 새겨진 옅은 주름 외에는 세월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목 아래의 신체는 여전히 전성기에서 한 끗도 상하지 않고 건장했다.
언뜻 보면 40대쯤으로 보이는 저 남자가 몇십 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당문의 주인이었다.
암왕 당기백.
"오랜만입니다, 영감님. 그간 잘 지내신 모양입니다."
"아무렴. 헌데 넌 아닌 모양이구나."
나는 암왕 영감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 의자가 생로의 끝이었다.
"아직 의자에 앉으라고 하지 않았는데."
"미리 감사합니다. 의자의 감촉이 제법 좋습니다."
"허. 그 고리타분한 영감 밑에서 어찌 이런 게 나왔을까."
내가 의자를 두드리며 말하자 암왕 영감님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재밌는 장난감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네 단전에서 검선 영감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시선이 전신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꼴이 이렇게 되고는 처음 만나는 것인데 보기에 적잖이 신기한 듯했다.
"한낱 화경의 육신에 현경의 본원(本原)이 깃들었으니 어찌 정기신이 엉망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공을 그 정도나마 다루는 것이 놀랍구나."
"그래도 최근에 많이 좋아진 편입니다. 당가에게도 도움을 받았고요."
"어찌? 우리 아해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을진대. 격체전력으로 진원진기를 이전한 것부터 나 역시 경이로울 지경인데 그것들이 뭘 어떻게 돕는단 말이냐."
"스승님이 영감님께 드렸던 패 있잖습니까."
"아아. 그것에 얽매인 현경위의 업을 네가 가로챈 것이로구나. 단순한 검결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검선 영감의 안배였던 모양이다. 신기하다. 말년에 천기(天機)라도 읽은 것인가."
암왕 영감님은 무극의 경지에 오른 사람인 만큼 내 상태에 대한 이해와 파악이 빨랐다. 내공이 묶인 이후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그러했다. 하신 내게 보이는 것을 현경이 못 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천기에 관한 말은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정녕 스승님께서 천기를 읽으셨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셨겠지요."
"화산의 꼬마야. 천기라는 것은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온전히 읽을 수도 없을뿐더러 다 안다고 해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꾸지 못한다면 천기를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고난이 눈앞에 보여도 그저 행하는 것이 너희 사제의 양태 아니었느냐?"
실로 그러하였다.
그래서 세상은 스승님을 협객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그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최선…… 말씀이십니까."
현경의 고수가 목숨을 희생하고 화경이 내공을 잃는 상황이 대체 누구에게 최선일 수 있을까. 적어도 내게는 일말의 선도 아니었다.
암왕 영감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모르겠으면 됐다. 나 역시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니. 네가 알아야 하는 일이라면 언젠가 알게 되겠지."
"예."
나는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언젠가 스승님의 같은 눈높이가 되면 그때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차라도 들겠느냐?"
"암왕이 주는 차를 마시라니. 제 용기를 증명할 만한 일화로 얘기하고 다니기에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고얀. 내가 너에게 독이라도 타서 차를 줄 것 같으냐."
"예."
"맞다."
"……예? 정말입니까?"
"걱정 말아라. 그리 독한 것을 주지는 않을 거다."
탁상 위에 있던 찻주전자가 저절로 끓고 흔들렸다. 이윽고 옆에 있는 선반에서 찻잔이 두 개 날아와 앞에 놓였다. 찻주전자가 허공에서 절로 기울더니 잔에 찻물을 채웠다. 연둣빛이 맴도는 투명한 차였다.
"들어 보아라. 내 신작이다."
"……신작 말씀이십니까. 검증된 겁니까?"
"무슨 검증?"
"안전 상태라던가, 식약청의 인증이라던가, 혹은 식품위생법 같은 것 말입니다."
"지금 안전성을 검증하고 있지 않으냐."
"……."
나는 차의 향을 맡았다.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맛을 보았다. 쌉싸름한 맛은 잠시. 질감이 부드러웠다.
"……맛있네요?"
"어찌, 맛이 괜찮으냐? 무형이라는 것이다."
"차 이름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차? 차는 평범한 용정이다. 나는 독 이름을 말한 것이다."
"듣고 보니 용정의 맛이긴 하군요. 품질이 최고급인 것 같습니다."
무형. 어감이 참으로 딱딱하다. ……무형?
"……혹시 무형지독(無形之毒, Immaterial poison) 말씀이십니까? 그 통속 소설에서나 나오는 물건이요?"
"현경에 가장 가까운 화경이 그 존재조차 몰랐으니 일단 무형의 측면에서는 합격이로구나. 맛과 향과 색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느낌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만."
"그럼 이제 독효만 검증하면 되겠구나."
"……저 죽습니까?"
"이런 장난감 같은 물건으로 화경을 어떻게 죽이겠느냐. 배라도 좀 앓게 하면 다행이겠다. 애초에 고수에게 써먹겠다고 만든 물건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배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효과가 빠른 물건이 아니다."
"……그렇군요."
나는 괜히 배를 문질렀다.
그 광경을 보며 암왕 영감님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꼬마야. 진작에 천독불침을 이뤄놓고 뭘 걱정하는 거냐? 어렸을 때부터 백두 영감한테 독 실컷 받아먹었잖느냐?"
"의선에게 받아먹는 것과 암왕에게 받아먹는 것이 같습니까?"
"……."
"……죄송합니다."
"되었다. 얼굴도 보았고 차도 마셨으니 이만 가보거라."
"예?"
나는 축객령을 듣고서야 이곳까지 온 목적을 상기시켰다. 품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이 편지는 무엇 때문에 보내신 겁니까?"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불렀다. 다 봤잖느냐. 소식을 들으니 검선 영감도 생각이 나고 적적하여 그랬다."
"……부탁하실 것이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 세상에 몸소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데 내가 너에게 무슨 부탁을 한다는 말이냐?"
듣고 보니 그랬다.
광오한 말이지만 어찌 보면 사실이었다.
암왕 영감님이 할 수 없는 일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칼질 정도? 하지만 칼이 필요한 일을 영감님은 칼 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저는 뭐, 당수련이라도 보호해달라는 줄 알았습니다."
"아아. 열등한 것들이 가문의 작은 권세를 두고 다투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냐."
"예?"
"신경 꺼도 된다. 정녕 신경이 쓰인다면 껴도 되고. 상관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해라."
"……가문의 후계자가 누가 되든 상관하지 않으십니까? 독괴가 후계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손녀분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중요치 않다."
암왕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웃었다.
"당가의 이번 세대를 글렀다. 큰 인물이 없다. 당천갈? 후계 자격조차 없다. 목표라는 것이 고작해야 당가를 차지하는 것이니 말이다. 꼬마야, 내가 당가를 어찌 얻었는지 아느냐?"
"천인하독 아닙니까."
"그건 수단일 뿐이다. 내게 당가를 얻고 말고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더 많은 독과 암기술을 알고자 했을 뿐이지. 그러다 보니 당가가 절로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암왕은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목표라는 게 고작 이 자리라니. 외부와 대적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갈고닦는 것도 아니다. 손수 친족을 쳐내고 가주가 되는 것이 꿈이란 말인가. 참으로 하찮다."
"그럼 어찌 막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하찮은 것에게 당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찮기 때문이다. 어차피 살아남을 운명이라면 살아남을 것이고, 기어 올라올 운명이라면 기어 올라오겠지.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천명이고 천기다."
암왕의 눈은 몹시 무미건조했다. 죽음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내는 친족에게도 별다른 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 피붙이에게마저 약육강식과 강자존의 논리를 적용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누구보다도 당가인다운 사람이었다.
"아, 차라리 네가 당문의 데릴사위가 되는 것은 어떠냐. 그럼 네게 당문을 주겠다. 지금 오늘 피를 흘릴 필요도 없겠지."
"……저는 도사입니다."
"요즘은 도사도 다 결혼하고 하지 않느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는 데릴사위로 안 갑니다."
"왜. 당문이 탐나지 않느냐? 천하칠대세가 아니냐."
"저는 화산의 도사이기 때문입니다."
"허, 검선 영감이 부럽군. 어디서 이런 걸 주워왔을까."
"백두산이랍니다."
"말은 청산유수군. 됐고, 잔치에 낄 생각이면 얼른 가보거라. 네 사제라는 것이 버릇없이 남의 집에서 날뛰고 있구나."
"……창문 좀 써도 되겠습니까?"
"아무렴."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데릴사위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오거라. 그리하면 검룡패란 것도 모조리 찾아주마."
암왕 영감님은 말하면서도 별 기대하지 않는 표정으로 허공섭물로 창문을 열어주었다. 당가 본관에서는 보기 드물게 커다란 창문이었다.
그 순간 사지로 둘러쌓였던 모든 곳이 생로가 되었다.
나는 곧장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멀리 연회장이 보였다. 최적의 경로를 그렸다.
땅에 닿는 순간 발끝에 내공을 가득 담고 경공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