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 43. 생일잔치(Birthday party)(1) >
매앰—.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귀청을 찔렀다. 짙은 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커다란 창문 너머 볕이 선연했다. 도로 아스팔트 위로는 아지랑이가 어른거렸다. 올여름은 유독 더웠다. 폭염이랬다.
기말고사도 어영부영 끝이 났다.
중간고사 이후에는 기존에 하던 것 외에 특별히 다른 수련 과정을 더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아직 기본기에 충실해야 할 시기였다.
서열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특기할 만한 사항이 몇 있었다.
당수련이 절정 경지에 이르렀고, 김지원이 서열 5위까지 올라왔다. 김지원이 일류 중에서는 선두였다.
다른 학생들도 다 열심히 했다. 그러나 인간은 극한의 상황이 닥치면 한계에 가까운 능력을 보여 주곤 한다.
당수련과 김지원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고, 분명한 목적과 향상심을 가슴에 품고 연무장을 굴렀다. 노력은 눈에 보이는 성과로 돌아왔다.
전체적으로 실력 상승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쉴 새 없이 수련만 했으니 그럴 만했다. 대견하긴 했다.
하지만 무조건 수련을 많이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도 그렇지만 특히 김지원의 신체는 분명히 한계에 가까워져 있었다. 혹사에 가까운 수준으로 강도 높은 수련을 반복해서 그렇다.
휴식이 필요했다. 마침 방학이었다.
"내일부터 방학이다. 각자 몸조리 잘할 수 있도록. 쉴 때는 쉬되 수련을 아예 놓지는 마라. 기량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도록. 혹시 방학 중 학교에 남는 사람 있나?"
몇몇이 손을 들었다. 김지원, 김소원 자매에 최수아와 당수련 정도였다.
김씨 자매는 잠깐 쉬다가 학교에서 또 수련하기로 했다. 최수아는 먼지 때문에 남은 모양이었다. 당수련이야 사천이 고향이고.
나머지는 사천이 본가가 아닌 만큼 각자 고향에 돌아가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다.
어차피 방학이라고 해봐야 한 달 남짓이었다. 몸을 굴려야 하는 무공대학 특성상 마냥 놀게 놔두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한 달 뒤부터 계절 학기 시작이었다.
"그럼 여름 방학 잘 보내라. 한 달 뒤에 보자."
"감사합니다!"
아무튼 대부분이 집에 돌아간다니 다행이었다.
당장 내일이 당수련의 생일이었다. 괜히 학생들이 사천에 있다가 상황에 휩쓸리기라도 했으면 귀찮았을 텐데 다행이었다.
아무튼 당초아에게 당천갈을 상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제 목숨을 걸고 현경에게 대드는 자를 상대하겠다고 약속했는데 피를 보지 않을 거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당수련의 생일 파티는 내일 저녁이었다.
"아, 당수련은 상담 좀 하자. 정리하고 연구실로 오도록."
"……네."
***
"내일 생일이지?"
"네."
당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타준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 아이도 많이 성장했다.
처음에는 되지도 않는 검을 들고 제대로 된 공격초는 사용하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검을 내려놓고 삼재종합공을 익힐수록 싸우는 방식이 유연해졌다.
성격도 아주 소심했는데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좀 밝아진 것 같았다. 자신감도 좀 붙은 것 같았고.
하지만 내일은 그 정도 실력 상승으로는 아무것도 못 할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축하하고. 내일은 어떡할 거냐?"
"네?"
"나도 내일 네 생일잔치에 가기로 했다."
"교수님이요? 왜요?"
당수련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조부가 오라고 나한테 초대장을 보냈다."
"할아버지가요?"
"그래. 그러니 가야지. 내 간이 그걸 거부할 만큼 크지는 않다. 나도 세끼 밥을 챙겨 먹는 사람인데 밥때마다 독 걱정을 하고 싶지는 않거든."
"풋. 할아버지가 그럴 사람은 아니에요."
"너한테나 아니겠지."
얘는 암왕이 어떻게 사천당가 본가를 집어삼켰는지도 모르나 보다.
하긴 얘가 태어나기 수십 년도 전의 일이니 그럴 수도 있나.
외부인이 당문을 집어삼키는 과정에서는 당가 사람들이 대적하기를 포기할 정도로 기가 막힌 용독술이 있었다.
그 정도가 아니고서야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당가인이 가주 자리를 내어놓을 리가 없다.
일명 천인하독(千人下毒) 사건이다.
암왕이 암왕이기 이전, 독절(毒絶)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직계와 방계를 포함한 당씨 무인 천 명이 한 날 동시에 독에 걸린 일이 있었다.
각자 경지, 성별, 직위, 나이가 달랐는데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한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사천성에 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국외에 있는 자들도 모조리 독에 걸려 앓았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몹시 고통스러운 독이었다고 들었다.
당가인 중 누구도 그 독을 해독하지 못했다.
그때 그것을 해독하겠다고 나선 자가 바로 독절이었다.
동쪽의 소국 출신의 당가 빈객. 뛰어난 능력을 갖추어 외부인으로서는 올라올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왔으나 정황상 독절에게는 그게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독과 암기술을 사랑하는 그에게는 아쉽게도 당가는 비기를 외부에 쉽게 공개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천당가는 무공 특성상 삼재종합공 보급 이후 무공을 공개하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비급을 감추는 경향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독과 암기는 아는 만큼 대응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무튼 독절은 그 독을 해독했다.
천 명을 동시에 해독시켰다.
그제야 당가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알았다. 독절이 자신이 하독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입으로 협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보여주었을 뿐이다. 천하제일독이 누구인지.
그 보상으로 천 명으로부터 당가의 지분을 상당량 받았고, 머지않아 독절은 당가주 자리에 올랐다.
이후 독절은 현경이 되었고 암왕이 되었으니 당가는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거다. 암왕 영감님한테 까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현경에게도 까불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영감님이 가장 그렇다.
생일 참석하라는 것은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얌전히 들어주면 된다.
만일 내 신념과 어긋나는 것을 요구했다면 목숨을 걸고서 대적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세상 물정 모르는 손녀에게 네 조부가 사실 병 주고 약 주고 가문 전체를 삥뜯은 사이코패스라는 것을 말하자니 좀 그랬다.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게 좋은 것도 있는 법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너는 상황을 어디까지 알고 있냐?"
"어디까지라뇨?"
"우리 둘이 얘기하자면 증명해야 할 것도 많고 귀찮지.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가자. 들어오시죠."
문이 열리면서 요구르트 아가씨가 들어왔다.
"……언니?"
"오랜만이구나."
삼자대면이었다.
***
처음에 당초아는 당수련과 협력하자는 계획에 반대했다. 아무래도 당가 전체를 먹어보겠다는 야심이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걸로부터 세력도를 받은 시점에서 내 생각은 달랐다. 당초아가 하오문 사천지부 따위의 도움을 받는다 한들 당천갈에게 맞서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당천갈 하나야 내가 어찌해볼 수 있다고 쳐도 나머지 세력이 문제였다.
철두철미는 제대로 된 경호집단이었다. 뒷골목 시정잡배 동네지부에서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하오문의 천하해결사(Global hitman)들을 모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애초에 독괴 역시 자기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후계 경쟁자들을 대적할 생각으로 전력을 짜놨을 것이다. 열세끼리 손을 잡는 것은 당연했다.
내 입장에서는 당수련과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좋았다. 암왕 영감님의 의도 역시 당수련의 보호 요청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초아 역시 결국에는 동의했다. 경쟁은 길게 봐야 하고 당천갈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지금 당장의 일이었다.
그러나 당초아는 욕심을 모두 버리지는 못했다.
협력을 하더라도 최대한 늦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당초아는 가지고 있는 정보 우위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을 원한 것이었다.
그 부분은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당수련 측이 제대로 대비하면 당천갈의 계획을 저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은 당수련이 모조리 가져갈 것이다. 당초아 입장에서 지금 상황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다. 당천갈도 그것을 알기에 당초아를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일 전날인 오늘까지 삼자대면이 미뤄지게 되었다.
"작은 숙부께서……!"
상황을 설명하자 당수련은 소스라치며 놀랐다.
눈은 마주치게 되어 있다.
당초아와 당천갈은 먼지 사건으로 인해 서로의 정보를 파악했지만 둘과 마찰이 없었던 당수련에게는 정보가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독괴가 어디까지 준비했을지는 모른다. 철두철미와 본인은 예상할 수 있는 최소치에 불과하다. 개인적인 정보통에 의하면 잔치에 참석하는 빈객 중에서도 당천갈을 지지하는 자가 꽤 있다더군."
"그래서 숙부님을 저지하는 데 있어서 한시적으로 협력하자는 거야."
당초아가 터프하게 요구르트를 마셨다. 어째 알싸한 냄새가 올라왔다. 요구르트, 맞는 거겠지? 나는 마시려던 요구르트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한시적, 인가요."
"알잖아, 수련아. 너와 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단다."
당초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수련은 당초아와 시선을 마주하자 눈썹을 떨었다.
후계 경쟁자의 관계다. 어느 한 쪽이 권력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친척은 때로 남보다 못한 법이다.
실제로 피가 섞인 친척이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알겠어요. 이번 일에 대해서만 협력해요.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
당수련과 당초아가 악수했다.
"근데, 언니.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얼마든지."
당초아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왜 맨날 그렇게 입고 다녀요?"
"어? 그, 취, 취미?"
당수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친척 언니를 바라보았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학교 이사장이라는 작자가. 뭐 대충 그런 표정이었다.
원래 지적은 동생에게 들었을 때가 가장 부끄러운 법이다.
***
다음 날 저녁.
나와 도하나, 소걸은 함께 맞춤 정장을 쫙 빼입고 북사천에 있는 당가 본가로 향했다.
당초아와 당수련은 애초에 거기 거주하기 때문에 가서 만나기로 했다.
아주 거대한 저택이었다.
거주자만 수천 명에 해당하는 사천당가의 본가. 마치 궁전처럼 화려한 건물이었다. 처마 끝마다 기와가 달려있었으나 내부는 최첨단이었다.
정원 역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줄을 길게 서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올 정도의 인물이면 그래도 꽤 먹어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입구에서 초대장을 검사 정도는 하고 있었다.
우리는 생일 당사자로부터 초대를 받은 VIP였기에 바로 통과했다.
물론 그게 아니었더라도 VVIP의 초대장이 있으니 프리패스였겠지만.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천천히 걸었다. 기세를 읽고 아는 얼굴을 찾았다.
그렇게 입구를 스쳐 지나가는데 낯익은 인물들이 보였다.
그것도, 11명이나.
"어, 교수님!"
"……니들이 왜 여깄냐."
"수련이 생일이니까 축하하러 왔죠!"
"당수련한테 말은 했고?"
"서프라이즈인데요? 교수님도 같이하실래요?"
"……누구 의견이냐."
학생들은 일제히 최수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대한민국 최대 가문인 사천당가 영애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최수아는 카메라를 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