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 42. 빈자와 도사(Begger and taoist) >
다음 목적지는 사천역이었다.
사천역 내부에는 커다란 공유 사무실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 거지들이 점거하고 있는 곳이 있었다. 물론 불법으로 점유한 것은 아니고 정당한 대가를 내고 사무실에 입주한 것이다.
개방도가 아무리 데이터를 많이 입수한다고 해도 그것을 컴퓨터 없이 정보로 다시 정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사무실을 대여하는 것을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일단은 고정된 위치가 있지만 그들은 언제 어디로 사라질지 모른다. 공유 사무실은 정리하고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유흥가 지하에 본거지를 튼 하오문처럼 은밀하지도 않았고, 도심에 대규모 빌딩을 차지하고 있는 대문파처럼 당당하지도 않았다.
<개방 사천지부>
"실례하겠소."
자동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개방은 최소한의 인원만 사무실에 배치할 뿐 나머지 방도들은 정해진 일터가 없기 때문이다.
타닥타닥.
지하철 곳곳에서 구걸하고 소주나 마시는 거지들과 달리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방도들은 비교적 말끔한 복장으로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방도들은 나를 힐끗 보더니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리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괜히 섭섭해질 정도로 우리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무안해서 나도 괜히 고개를 돌려 좁은 사무실 이곳저곳을 살폈다. 구석 자리에 있는 소걸이 바로 눈에 들어와서 다가가자 기척을 느꼈는지 소걸이 입을 열었다.
"아, 왔소?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제1회의실로 가지."
나와 도하나가 그쪽으로 걸어가자 소걸은 하던 것을 정리하고 우리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밀폐된 회의실이었다. 소걸은 곧장 전음재밍장치와 도청방지기를 작동시켰다.
"알다시피 자료가 많지는 않소. 하지만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되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소걸은 종이를 몇 장 내밀었다.
"정리한 거요."
"요즘 세상에 종이 정보라니. 아예 신문지를 만들지 그러냐."
"아날로그는 해킹을 안 당한다는 장점이 있소. 괜한 말 말고 어서 읽어보기나 하시오. 다 읽고는 태우시고."
"오냐."
나는 받은 종이를 책상 위에 쭉 펼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력도였다.
"후계 구도는 크게 사파전이라고 할 수 있소."
소걸은 표정이 차가운 남자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먼저 종중의 직계 장남인 당무기가 있소. 나이는 마흔셋. 경지는 초절정. 현재 당문제철의 부사장 자리에 있소. 성정이 냉철하고 상벌이 확실하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명분이 있으니 사천성 출신과 그 2세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편이오."
그 다음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당수련. 뻔히 아는 건 다 생략하겠소. 암왕의 외동손녀인 만큼 지지기반이 가장 튼튼하오. 올해 후계구도에 참가하면서 당문제약을 받는다는 말도 있을 정도요. 확실한 것은 생일 당일이 되어봐야 알겠지만 말이오. 여기까지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후계 경쟁 구도요."
다음으로 유순하게 생긴 남자를 가리켰다. 위쪽에는 별도로 당천갈의 초상화가 연결되어 있었다.
"당천갈의 독자인 당무선. 나이는 서른다섯. 마찬가지로 경지는 초절정이오. 현재 당가제철의 전략팀장이라고 하는데 성격이 꽤 우유부단하다고 하오. 개인적인 지지 세력은 거의 없는 수준이오. 원래는 정쟁에 낄 깜냥도 못 된다는 평가가 있었으나 요즘 부친이 준비하는 걸 보니 또 모르겠소."
마지막으로 내 직장 상사.
"장녀 당초아. 당가의 후계권을 포기하는 줄 알았으나, 뒤에서 국제 마피아 조직과 손을 잡고 권력을 노리는 악독한 여성이오. 개방으로 골랐어도 든든하게 지원해줬을 것인데 그 부분이 아주 아쉬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 평판이 좋지 않소. 성격이 제 오라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군. 몹시 표독스럽다는 것이지."
"정보에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만."
"전혀 그렇지 않소. 김 형이라면 개방과 하오문 중 어느 쪽을 고르겠소? 당연히 의로운 명문정파인 개방 아니겠소?"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거지가 된 나. 건달이 된 나.
"둘 다 싫다."
"굳이 고르라면 말이오."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
"개방과 하오문에 들어오는 자들은 뭐 다 오고 싶어서 온 줄 아시오? 상황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살게 되는 것이지."
"그건 또 그렇군."
"김 형은 분명 개방을 고를 것이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빈자와 도사는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오. 청빈하게 살고 악의없이 살지. 빈자와 도사. 그래서 빈도(貧道)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아는 빈도는 그런 뜻이 아니다만. 하긴 남한테 빼앗아 연명하는 삶보다는 빌어먹는 삶이 나을 거 같긴 하군."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소."
"둘 다 되지 않기 위해 앞으로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도사는 시켜줘도 안 할 거요."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공식적으로 당문제약은 중립을 지키는 중이오. 유력한 후계자가 당문제약의 요직에 오르지 않았으니 말이오. 당수련이 올여름에 당문제약을 받는다는 말이 있으나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
"그럼 현재로서는 당문제철만 주의하면 된다는 것이군."
"그렇소. 김 형이 당초아를 적대하지 않는다면 말이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사천공대도 상대해야겠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사천공대에 제대로 된 전력이 있기는 하나?"
"없소. 초절정 교수 몇이 전부요. 그들이 당초아를 위해 당가의 다른 후계자를 적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아, 듣자 하니 계약직 교수로 화경 고수가 하나 있긴 하다던데."
"듣자 하니 그 화경 고수는 참을성이 별로 없다던데."
"……확인."
사천시 전역의 지도를 확인했다. 당가의 세력도가 덧씌워져 있었다. 북쪽에는 당가의 본가가 있었고 도심에는 당문제약이 위치했다. 당문제철은 바다를 접하고 있었고 그 오른쪽 삼천포에는 사천공대가 있었다.
"당문제철의 전력은 어떻지?"
"다음 장 보시오."
스륵.
한 장 더 넘기자 당문제철의 주요 고수들이 있었다. 화경은 독괴를 포함하여 둘. 초절정은 십수 명이었다. 물론 실제 전력은 그 이상이겠지만 사천에 있는 자들만 추린 듯했다.
"여기 죽은 자들이 껴있는데."
내가 손가락으로 몇몇 초상화를 가리켰다. 먼지를 되찾는 과정에서 지리산에서 죽인 초절정 고수들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안 죽어서 그렇소."
"그렇군."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대외비였다. 물론 개방도 몇몇도 현장 탐색을 도왔고 하오문에도 아는 사람이 꽤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연구실을 만든 당천갈과 연구실을 박살 낸 나와 당초아가 서로 아무 언급을 하지 않으니 얌전히 묻어두는 것이 맞았다.
당문제철의 고수들이 모두 생일에 참석할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후계 경쟁자들을 제압하기도 힘들 것이니.
당가 내부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생각하면 이 외에도 전력이 상당하다고 봐야 했다.
"당수련의 생일에 참석하는 인사의 명단을 구해보지. 아무래도 그때 참석하는 외부 면면들도 꽤 중요할 것 같군."
"벌써 정보를 수집하고 있기는 하오. 어느 쪽의 초대장을 받았는지에 따라 구분하는 중이지."
"잘하고 있군."
"개방이니 어련히 잘하지 않겠소."
"어느 쪽이 가장 많나?"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당무기의 초대장과 당천갈의 초대장이 가장 많소. 의외로 잔치의 주인공인 당수련의 초대장은 거의 없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 파악을 못 한 것인지."
"그중에 혹시 암왕의 초대장을 받은 자도 있나?"
"있겠소? 암왕이 알량한 권력 가지고 다투는 잡배들도 아니고 말이오."
거지 주제에 사천당가의 후계 경쟁자들을 얕잡아 불렀지만 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사실 개방의 후개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한 소걸이 그들보다 나은 것이 맞긴 하다.
"내가 알기에는 있다."
"……금시초문인데. 누구요?"
"의문의 30대 화경 고수가 암왕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다더군."
"……진짜요? 김형이 암왕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다고? 언제? 혹시 그때 이사장님이 준 편지가 암왕으로부터 온 거였소? 왜?"
"나도 이유는 모른다. 같이 생각해보자고 이야기한 것이다."
"뭐라고 쓰여 있었소?"
"당수련의 생일에 놀러 오라고 적혀 있었다. 그 외에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군."
"흠."
소걸은 턱을 쓰다듬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흠. 아무래도 김 형이 당수련을 보호하기를 원하는 것 아니겠소?"
"어째서냐."
"당수련은 지금 초대장을 거의 보내지 않고 있는 형편이오. 상황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후계 경쟁을 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지. 문제는 그런다고 한들 당천갈이 자비를 베풀지는 않을 거란 말이오. 사천성 출신들이 가장 싫어하는 자가 암왕의 후손들이니 말이오."
"그래서?"
"목숨이 위태롭다는 거지. 그러니 마침 당수련과 안면도 있고, 당천갈에게 대적할 능력도 있는 김 형을 부른 것 아니겠소. 까놓고 말해 김 형은 일단 거기 가면 당수련이 칼 맞고 죽는 걸 구경만 할 위인은 아니잖소. 자기 학생이니 최소한 목숨은 건져놓을 테지. 암왕도 김 형의 그런 성격은 아실 테고."
"……내가 그 정도 호구로 보이나?"
"협객으로 보이오만."
"요즘은 그 두 단어를 혼동해서 쓰는 경향이 있던데."
"그런 시대이기에 협객으로 살기가 어려운 것이오."
소걸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암왕도 편지에 직접 무엇을 요구하지 않은 만큼 모두 김 형이 선택하기 나름일 뿐이오. 암왕이 진정으로 당수련의 보호를 원했다면 직접 요구하고 보상을 약속했겠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 경쟁에 직접 개입할 마음은 없었던 것 아니겠소."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해야 하는 것.
당초아와의 약속은 당천갈을 막는 거였다. 당무기와 당무선은 별개. 당문제철 역시 직접적으로 대적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철두철미를 포함한 당천갈의 직속 세력이 날뛰는 것은 막는 것은 계약 내용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었다.
당가 내부 사정에 깊게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약속대로 당천갈의 공격만 막고 나면 당가의 후계자가 누가 되는지는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쟁 과정에서 나올 무고한 희생자를 줄이는 것이 내게 더 중요한 일이다.
굳이 참석한다면 구경만 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원래는 14년분의 내공을 쥐어짜서 해내야 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여유가 조금 생겼다.
"아, 혹시 개방 역시 당수련의 생일에 참석하나?"
"물론이오. 암왕의 외동손녀 아니오. 아마 사천시의 굵직한 문파는 모두 사람을 보낼 것이오. 문주들이 직접 참여하는 경우도 부지기수겠지."
"그럼 개방에서는 소걸 네가 참석하면 되겠군."
"내가 왜……?"
"아니면 어차피 당수련의 교수와 조교 명분으로 참석할 거다."
"……알았소. 그건 그렇고 물건은 챙겨뒀소?"
"무슨 물건."
"장로급과 칼부림이 예상되어 있는데 레플리카를 쓰지는 않을 거 아니오."
"……생각 중이다."
원래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확실히 당천갈쯤 되는 인물을 상대하려면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하는 법이다.
당천갈 외에도 화경이 여럿이 있을지도 모르니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준비하는 것이 맞았다.
그 후 이것저것 안배를 하다 보니 시간은 훌쩍 흘렀다.
어느새 당수련의 생일이 하루가 남았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