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 41. 화산코리아(Huashan korea) >
당천갈이 선물을 주고 떠난 후 나는 연구실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사천시로 향했다.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당장 시급한 것은 정보였다.
사천당가의 일에 개입하기로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건 마치 적군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았다.
내키는대로 행동했다가 당가 전체의 적이라도 되면 곤란했다. 개인이 당문이라는 집단 전체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건드릴 수 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또 반드시 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한 방침을 정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가 내부 사정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당가의 내부 구도를 알아야 내가 개입해야 할 부분을 명확하게 정할 수 있다.
문제는 내 정보력의 상당 부분이 당초아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당초아는 정쟁의 당사자인 만큼 그로부터 얻는 정보가 객관적이라고 확신하기는 힘들었다. 교차검증이 필요했다.
그래도 개방에 이미 의뢰해둔 상태였는데 당가 내부에 대한 특급 정보는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다고 했다. 개방 내부에서 정보를 확인하고 폐기하는 것이 원칙이랬다.
그래서 개방의 정보는 이따 소걸과 사천역에서 만나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그 전에 개인적으로 들릴 곳이 있었다.
나는 사천역 근처 대문파 밀집 지역에 도착해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입구 앞에 빌딩의 이름이 새겨진 회색 비석이 있었다.
<화산코리아 본산>
"화산코리아는 대체 뭘까……."
여기까지 오는 길에 쭉 살펴보니 대문파의 한국 지부는 왠지 코리아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동소림(東少林)이라는 명칭을 쓰는 소림사를 제외하면 코리아가 뒤에 붙었다. 무당코리아, 아미코리아, 화산 코리아.
"하긴 자기네들이 쓰고 싶어서 쓰는 거겠지. 어떡하겠나. 들어가자."
"네, 사형."
도하나가 졸졸졸 따라왔다.
내부가 넓었다. 퇴근 시간에 가까워서 그런지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안내데스크에는 여문도 둘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문주님을 뵙고 싶소."
"……예?"
"그, 화산코리아……의 문주님 말이오."
"어, 약속을 하셨는지……?"
물론 안 했다. 기왕 들리는 것 문파 내 분위기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 했소만."
"죄송하지만 문주님과는 약속 없이 대면을 하기가 힘듭니다."
"본산에서 특별감사 왔다고 전해주시오."
"예? 본산요? 여기가 본산입니다만……."
"이 산 말고 저 산."
나는 대충 서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ID 카드를 보여주었다.
[화산파 무무문 문주]
[화산파 집법당 특별감사]
한문으로 적혀 있었으나 무공을 익히는 자들이 이 정도 한자를 읽지 못할 리는 없었다.
안내데스크 여문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특별감사?"
"잠시만요. 곧장 연락드릴게요."
나는 무무문의 문주로서 전 세계 화산파의 모든 지부에 대한 특별감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여문도는 잠깐 전화를 하더니 곧 내게 고개를 숙였다.
"잠깐 기다리시면 됩니다."
곧 문주의 비서라는 자가 내려왔다. 정장을 입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외형이 지적이었다.
최 비서의 경지는 일류 수준이었다. 온전히 사무직에만 종사하는 듯했다.
하긴 이름만 문주니 본산이니 할 뿐 화산코리아 자체는 기업에 가까웠다. 사실상 문주 역시 사장의 역할을 할 것이니 비서를 두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반갑습니다. 부족하지만 화산코리아 문주님의 비서 역할을 맡은 최재영입니다. 최 비서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반갑소. 집법당의 특별감사 김산이오. 이쪽은 수습."
"반갑습니다! 도하나예요! 수습이에요!"
"바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따라오시죠."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층으로 올라갔다.
곧장 문주실로 향했다. 한 층의 삼 분의 일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똑똑.
"문주님. 최 비서입니다. 감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게."
문을 열자 문주가 창문을 보고 서 있었다.
초절정의 경지. 체격이 장대했다. 정장 위로도 터질 것 같은 근육이 돋보였다. 머리는 이미 새하얬으나 육신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한국 지부에 화경 고수는 없으니 마땅히 초절정 중에서 운영에 능한 자가 문주직을 맡았을 것이다.
우리가 들어온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 갑자기 쳐들어온 특별 감사를 상대로도 저자세로 나가지 않고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듯했다.
뒷모습만 봐도 초절정 고수의 기세와 동시에 노련한 기업인의 분위기가 풍겼다.
문주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특별 감사라 했는가. 여기 어찌……. 사제? 사제 맞나?"
"오랜만입니다. 사형."
화산파 해외지부의 문주가 될 정도의 인물이라면 대개는 총본산에서도 일정 기간 직책을 맡을 정도로 유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현재 문주가 될 정도의 나이대라면, 보통은 내 사형이나 사질이 된다.
사제는 없다. 나는 스승님의 직계이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배분에서 나보다 입문이 늦은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형이나 사질 중에 한국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있다면 자연히 나와 안면이 있을 만하다.
화산코리아의 문주. 백무강.
그는 나의 사형이었다.
"사형의…… 사형이에요?"
"아니. 넌 아니지. 네 원래 배분은 한참 아래이지 않으냐."
편의상 그리고 외관상 귀찮은 질문들이 많아 사형이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지 엄밀히 따지면 도하나는 나보다 배분이 한참이나 낮았다.
그리고 애초에 현대에 들어서는 동문수학하지 않으면 배분이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문번(門番)과 직책에 따라 유동적으로 취급을 달리할 뿐이다. 일일이 배분을 나누기에는 전 세계에 문도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동문수학을 하고 배분을 따질 정도라면 꽤 가까운 사이라는 말이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그렇게 됐습니다."
늙은 사형은 나를 보며 얼굴이 환해졌다. 다가와서 나를 안았다.
꽈악.
"아직 정정하시네요."
"하하! 아직 현장을 뛰어도 괜찮을 정도다! 요즘은 책상머리에서 온종일 종이 쪼가리나 보고 있지만 말이다!"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제를 보니 함께 구르던 시절이 엊그제처럼 느껴지는구나. 헌데, 몸이 아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제 괜찮은 것이냐?"
"살 만은 합니다."
"하하! 넌 여전히 무던하구나!"
팡팡.
사형은 내 등을 두드렸다. 이제는 칠순이 넘었을 나이인데도 여전히 유쾌했다. 몸이 정도 이상으로 튼튼하면 원래 정신도 쉽게 늙지 않는 법이다.
"괜히 분위기를 잡았군. 갑자기 감사라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 말이다. 앉아라. 오랜만에 얘기나 나누자꾸나."
"잠깐이라면 좋습니다."
나는 사장실에 앉아 사형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추억부터 근황까지.
이 늙은 사형과는 내가 초절정이던 시절에 몇 번 같이 임무를 나간 적이 있었다. 암매화가 되고도 그랬다. 암매화가 단독 임무만 수행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때 네가 내 목숨을 구해줬었지. 까딱하면 젊은 나이에 요절할 뻔했지 무어냐! 하하!"
"사형은 당시에도 쉰이 넘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놈아. 천수를 누리지 못하면 다 요절이지. 나는 아직도 창창하다!"
그런 얘기를 한참이나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감사라니."
"그건 그냥 한국지부장을 보려는 명분이었습니다."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사형을 보았다. 눈이 무미건조했다. 꺼리는 기색도 분명 있었다. 나를 환영하던 것도 거짓은 아니겠지만 감사의 방문을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사형제로서 함께 임무를 맡던 것은 과거의 일일 뿐이다. 이 사람은 지금 한 단체의 수장이었다.
아무리 과거의 쾌활하던 시절처럼 굴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있다. 세태와 맞서다 보면 대개는 영혼에 먼지가 묻고 것이다. 언제까지나 항상 맑을 수는 없다. 그쪽이 되려 비정상이다.
적당히 탁해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세상에 익숙해지는 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정보를 얻을 곳이 필요한데 한국지부에 정보기관이 있습니까?"
"정보기관? 있기는 하다만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한국지부가 중요한 임무를 맡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개는 개방의 협력을 받는 편이지."
"그렇군요."
"어떤 정보가 필요한 것이냐?"
"당가의 정보입니다."
침묵이 맴돌았다.
"최 비서. 나가보게."
"네."
최 비서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나갔다. 곧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사형이 테이블 밑에서 버튼 하나를 딸깍거리자 공기의 흐름이 어지러이 뒤틀렸다. 동시에 청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작은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전음재밍장치와 도청방지기인 듯했다.
"당가는 왜?"
사형이 담담하게 말했으나 나는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하긴 사천에 터를 잡은 사람이 당가를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만간 당가 내부에 무력을 동반하는 정쟁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런 말은 못 들었다만."
"제가 당가 내부인에게 들은 정보입니다."
"……그래서. 화산이 그곳에 개입하는 것이냐? 총본산의 명이냐?"
사형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걱정이었다. 이곳에서 화산은 멀고 당문은 가깝다. 사천에 터를 튼 한국지부가 당문을 적대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사형 역시 일개 초절정무인일 뿐이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 반대입니다."
"반대."
"네."
당문 내부의 싸움에 왜 화산문도들이 피를 흘려야 하는가. 내가 당문에 간섭하기로 한 건 나의 사정이다. 문파의 손을 빌릴 일이 아니다.
"끼어들지 마십시오."
"사제."
"접촉이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에서 접근하던 한쪽 편을 들지 마십시오. 모른 척하고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십시오. 늘 그랬던 것처럼."
화산파가 딱히 당문에 비해 세력이 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위치가 좋지 않았다.
섬서에서 화산의 기세가 대단하듯 사천에서는 당문이 그러했다.
구파일방이 중국 내에서 세력 싸움을 하는 동안 본거지 자체를 옮긴 당가이기에 지배력이 더욱 공고했다. 한국은 당문의 땅이었다.
"만일 내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면?"
"하지 마십시오. 제가 참전할 겁니다."
그 말에 사형은 씩 웃었다. 굳었던 공기가 다시 풀렸다.
"그럼 얌전히 있어야겠구나. 잘못 골랐다가 큰일 나면 곤란하지. 아무리 그 시절이 그리워도 어린 사제에게 맞고 다녔던 건 좋은 기억이 아니었거든."
"정당한 비무였잖습니까. 누가 들으면 제가 기사멸조를 밥 먹듯이 하는 줄 알겠습니다."
"기사멸조가 아니라서 더 서러웠다. 그만할 명분도 없었잖느냐."
사형은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아무튼 당문 내부에 대한 정보는 없다. 한국지부가 그런 것에 간섭할 형편도 못 되고. 내가 너를 개인적으로 돕는 것은 어떠냐."
"문주가 돕는다는데 잘도 개인으로 알겠습니다."
"그렇겠지? ……헌데 그럼 문주가 아니게 되면 괜찮은 것이냐?"
"사형."
"하하, 농이었다. 하여튼 늙으면 죽어야지. 어떻게 현장을 뛰겠나. 몸이 아무리 찌뿌둥해도 그냥 의자에나 앉아 있어야겠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때가 탔으나 예전 모습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문주로는 당가를 두려워하나 일개 도사로서는 그러하지 않은 듯했다. 괜히 안심되는 부분이었다.
"안다. 사제."
"예."
사형은 차를 내려놓고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부디 다치지 않게 조심하거라. 건투를 빈다. 예나 지금이나 너는 화산의 자랑이니. 장차 네가 사숙의 역할을 맡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겠죠."
"아니다. 말실수했다. 애한테 별말을 다 하는군. 용무는 그게 전부냐?"
"이제 애는 아닙니다만. 그렇습니다."
"이왕 감사로 온 김에 구경이나 하고 가거라. 감사 왔다는 말에 애들이 기겁해서 열심히 하는 중이다."
"그걸 감사한테 말해도 되는 겁니까?"
우리는 함께 내려오면서 화산코리아 빌딩 곳곳을 살펴보았다. 초절정이 꽤 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주요 전력이 마냥 박혀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외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사형이 한국 같은 경우에는 고수들이 군이나 경찰 쪽으로 많이 빠진다고 설명해줬다.
후기지수들이 모여있는 수련층도 있었다. 눈에 차는 아이는 없었다.
평일마다 보는 것이 이신이나 정이삭 같은 인재여서 그랬다. 애초에 그 급의 인재가 있었다 한들 섬서로 보냈을 것이다.
우리는 느긋하게 화산문도들을 살펴보고 1층으로 나왔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거라."
"반가웠습니다, 사형. 일이 해결되면 다시 한번 찾아뵙지요."
"말을 마라, 이 녀석아. 한국에 온 지 몇 달이 되어서야 얼굴 비춘 녀석이 잘도 그러겠다."
"제 존재가 부담이 될까 그랬지요. 문주가 사형인 줄 알았으면 진작 찾아왔을 겁니다."
"말은 참 잘한다. 사제."
"예."
"부디 뜻하는 바를 이루게."
척.
"건강히 지내십시오."
사형이 포권하자 나도 마주 포권했다.
어느새 해가 떨어져 있었다. 지하철역으로 갈 시간이었다.
***
백무강은 멀어져 가는 어린 사제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 듬직하고 커다란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최 비서."
"예, 문주님."
"쌍괴에게 연락 넣게. 지지 선언에서 우리는 빠지겠다고."
"……정말이십니까? 보복이 있지 않을까요? 당문제철로부터 약속받은 이권도 상당한데 다 포기하셔야 할 테고요."
"그 치들도 바쁠 텐데 우리 같은 동네 무관을 신경이나 쓰겠나? 우리가 화산 본파도 아니고. 그리고 이권은 포기하는 게 맞다. 저 꼴통이 학교에서 일한다는 거 못 들었나?"
"들었습니다. 그게 왜……?"
"사천공대에는 당가의 장녀랑 암왕의 손녀가 있지 않나. 독괴랑 마냥 사이가 좋을 것 같지는 않군."
"그렇긴 합니다만. 헌데 저분이 그렇게 대단한 분입니까? 사제라고 하셨는데 혹시 반로환동을 하신……."
"반로환동은 안 했는데 환골탈태는 했지."
"그게 무슨. 그런데 어떻게 문주님의 사제가 될 수 있습니까?"
"참나. 자네 화산파 문도라는 작자가 소년화경도 모르나?"
"소년화경요? 그 옛적에 잡지에나 실린 인물 아닙니까. 그 최연소 검룡. ……혹시?"
"맞네. 저 꼴통이 소년화경이다."
"……소년화경이 꼴통이라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아, 그건 화산파 총본산 기밀이었나보군. 잊게."
"그걸 어떻게 잊습니까……."
"하긴 안 잊어도 되겠다. 보아하니 남의 잔치에 깽판 한 번 칠 거 같은데 조만간 사천 사람은 다 알겠어."
화산코리아의 문주는 뒷짐을 지고 사제의 등을 보다가 사제가 사라지고서야 뒷짐을 풀었다.
"들어가지. 내부 단속 철저히 하고."
"예, 문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