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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41화 (41/120)

< 41 : 40. 사천당문(Tang men)(2) >

당천갈은 독접관을 나서고도 사천공대를 바로 떠나지 않았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뒷짐을 지고 사천공대를 거닐었다. 때때로 한 자리에 멈춰 공원이나 호수, 꽃과 곤충 따위를 지긋이 바라보기도 했다. 산책하는 모양새였다.

삼천포 여기저기를 말없이 배회하던 당천갈이 문득 입을 열었다.

"관리를 잘했더구나."

"딱히 수고를 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훌륭한 학교였으니까요."

쏴아아?.

잔잔한 봄 파도 소리가 들렸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었다.

당천갈은 사천공대와 맞닿은 바다를 보며 서 있었다. 시선은 서쪽 끝을 향한 채였다. 몸을 돌리자 저녁노을이 마치 독공 고수의 후광처럼 보였다.

당천갈은 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았다.

학교의 주인이었다.

"산책은 어떠셨습니까."

"좋았다. 옛 생각도 나더구나."

독괴가 아직 후기지수였던 시절. 그는 잠깐 사천무공대학을 맡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천공대는 당가 내에서 애송이들이나 맡는 곳이었다.

"좋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오래 걸으셨던데 혹 목이 타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물이라도 한 잔 내어주겠느냐?"

"물은 없습니다만 다른 것은 있습니다."

"아무거나 괜찮다."

당초아는 가문의 어른을 향해 요구르트를 하나 던졌다. 멀리서 음료를 던지는 모양이 얼핏 버릇없어 보였으나 당천갈은 굳이 조카의 예의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요구르트를 열어 마셨다. 알싸한 맛이 올라왔다. 독이었다.

독괴에게 피해를 줄 만큼의 극독은 아니었으나 독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약한 독도 아니었다.

꿀꺽.

당천갈은 요구르트를 한입에 비웠다.

그제야 당천갈은 웃었다. 조카의 당당한 적의가 기꺼웠다.

"맛이 좋구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맛입니다."

요구르트를 얘기하는 것인지 독을 얘기하는 것인지 의뭉스러운 태도였다.

당초아도 같은 요구르트를 하나 따서 마셨다.

"처음 혀끝에 닿을 때는 달죠. 마냥 단 줄 알았는데 목을 넘길 때는 따갑고 뱃속에서는 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느낌이 마냥 나쁘지 않습니다."

"어째서냐."

"제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파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더냐."

"저는 그렇더군요. 그냥 먹기엔 너무 밋밋한 맛이라."

그게 당초아가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문의 어른들이라 존경했던 작자들이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직계의 어린 여아를 암살하려 들었을 때.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해야 했을 때.

비로소 당초아는 삶의 맛을 알았다.

역경을 극복하고 그 뒷면에 있는 것을 쟁취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달다는 것을 알았다.

"어엿한 당가인(Tang's man)이구나."

"당문(Tang men)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초국적 세가의 직계로 태어난 당초아가 온실 속의 화초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

당초아는 태생이 독초(毒草)였다.

"네가 후계 경쟁을 위해 학교 따위를 받고자 했을 때 다 내려놓은 줄 알았다."

"살고자 했을 뿐입니다."

암왕 당기백과 손녀인 당수련에게 과잉 충성하는 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당문제철과 당문제약의 주요 직책을 받은 오빠들과 사촌들이 당하는 것을 보면서 당초아가 선택한 길이었다.

당천갈 역시 당초아가 후계를 포기했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그만큼 사천공대는 사천당가 내부에서는 가치 없고 힘없는 자리였다.

바깥 사람들은 세계 삼대 무학원이니 뭐니 칭송하지만 당문의 핵심은 늘 그랬든 철과 독이다.

그러나 사천공대가 보잘것없었기에 당초아는 자리 말고도 하나를 더 받을 수 있었다.

"학교와 함께 검룡패를 받았던 것도 다 네 계획의 일환이었느나?"

"이렇게까지 대단한 인물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 편을 들어줄 화경 하나가 궁했을 뿐인데."

"화경 하나라. 하긴 너는 그자가 칼 휘두르는 솜씨를 제대로 모르겠구나."

"……저도 다 보고 결정한 것입니다. 정사대전도 보았고 내공을 잃은 후의 행적도 조사하고 결정한 겁니다."

당천갈은 치기 어린 조카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왜죠? 물론 제 안력으로 실제 검룡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나 저배속으로 돌려보면 보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게 아니다."

당천갈은 고개를 한 번 더 젓고는 자상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명실상부 하수가 아니냐. 그의 날카로움을 느끼기에는 미천하다. 화산검룡의 진가는 아래가 아니라 위를 향할 때 있다. 그 보도(寶刀)를 위에서 내려볼 때 느껴지는 섬뜩함을 너는 모를 것이다."

상승의 무리(武理)를 즉각적으로 분석하고 해체하고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화산검룡의 가장 귀신같은 능력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무곡성(武曲星) 따위라도 타고난 것이 아닐까 당천갈은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경지를 어이없을 만큼 쉽게 이기고 본인보다 높은 경지와 칼을 맞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화산검룡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 자체가 두려운 존재였다.

당천갈이 아까 검룡을 마주했을 때.

당천갈은 극성에 이른 안법으로 화산검룡을 훑었음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수 특유의 느긋한 몸짓과 여유로운 태도, 어떤 일이 있어도 당초아의 편을 들겠다는 굳은 의지만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반대로 화산검룡의 시선으로부터는 내부가 샅샅이 읽히는 느낌이 들었다. 기척을 최대한 갈무리했음에도 그랬다.

그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랬는데 무공을 펼칠 때는 어떠하겠는가.

무공을 읽히는 것을 좋아하는 무인은 없다.

쉽게 해체할 수 없는 독공의 고수임에도 당천갈은 화산검룡을 적대하는 것이 꺼려질 정도였다.

급작스레 판에 낀 화산검룡의 존재는 이제 당천갈의 계획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걸림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설득하려 한 것이다.

반대로 말해 화산검룡 같은 변수만 없다면 당가의 최고 무력대를 장악한 당천갈의 쿠데타가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절당했다.

"헌데 무슨 수를 쓴 것이냐."

"무슨 수라니요."

"검룡패란 화산검룡을 고작 한 번 부려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나."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는 사천공대의 교수 따위로 부르는데 그 패를 쓰지 않았느냐."

"……교수 따위. 아무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예."

"그래서 내 철두철미의 사장으로서 검룡을 회유하고자 했다. 검룡패 가지고 몇여 년 교수직이나 시킬 수 있겠지 네 심복이 되게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

그건 당초아 역시 두려워하던 일이었다. 사실 김산이 검룡패만 받고 도망가도 당초아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학교의 수위라더구나."

"예?"

"그래서 오랜만에 이 학교를 둘러보고 있었다. 화산검룡쯤 되는 이가 수위를 자처하며 지킬 가치가 있나 하여.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더구나."

"……아까는 관리를 잘하셨다고."

"밭이 아름다워 봐야 영웅이 목숨을 걸 이유는 되지 못하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화산검룡은 수위를 자처했다. 당수련의 생일에 너의 편을 들겠다는 말이 아니냐. 그러고 보니 어떤 보패를 선지급하였다는데."

"예, 검룡패를 선지급……."

"하. 내가 우습게 보이느나."

"……예?"

당초아는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어느 순간 숙부와 대화의 초점이 어긋난 느낌이었다. 화제로 김산이 등장한 이후인 듯했다.

"검룡패 하나로 두 번을 부려 먹었다고 말할 셈이냐? 교수로 만드는데 한 번을 썼는데, 어찌 검룡패를 선지급한다 하여 너를 지킨다는 것이냐. 검룡패가 그리 귀한 물건도 아닐 것인데. 그저 선대가 한 약속의 징표 아니냐."

"……."

당초아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보호의 대가로 검룡패의 선지급을 요구해서 일단 주기는 했는데, 그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당초아의 편을 들어줄 이유가 되나 싶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김산이 당초아의 편을 들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저 당수련의 생일에 당천갈을 상대해주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초아는 그게 그거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거기서 당천갈 상대해주면 내 편 아니야?

"내가 당가의 후계자가 되면 초아 너와의 약속은 화산검룡이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다."

그렇기는 하다. 당초아가 후계 경쟁에서 탈락하면 그간 약속이 무슨 소용인가.

사실 김산이 당천갈의 편을 들어도 상관이 없었다. 고무림 블랙을 통한 계약은 사천공대를 근무지로 하는 수위 및 교수 계약이었니.

"그런데도 네 편을 들었으니. 허, 보패, 보패라."

"아니, 근데 진짜입니다."

"혹여 너 자신이라도 내어준 것이냐?"

"……예?"

"하긴, 미인계도 당가인다운 훌륭한 수법이다. 아름답기도 하고 방년이기도 하니. 잘했다."

"제, 제가요?"

당초아는 드물게 당황했다.

"꺼릴 것 없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는 것은 미련한 일이지.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화산검룡 입장에서 너를 가지고 경우에 따라 당가 자체를 얻을 수도 있는 선택이라 한다면 걸어볼 만한 도박일 수도 있겠구나. 위험한 일이기는 하나 만일 네가 후계자가 된다면 당가의 부마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

"……아니."

그런가? 당초아가 딱히 그런 약속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김산 교수가 내심 원했을 수는 있었다.

당초아가 의도하고 미인계를 쓴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했다면?

이게 '화산파 출가 도사가 요구르트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재벌집 SSS급 미녀 아가씨에 대해 호감이 생겨버린 건'이었다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당초아는 내심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당초아는 눈앞에 있는 경쟁자를 다시 한번 눈여겨보았다.

역시 당가 장로의 안목이었다.

논리의 빈틈에서 이런 내부 사정을 추론해내다니.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올해 중순부터는 이런 자들이 모여 제대로 부딪히기 시작한다. 당가 후계 전쟁이란 그런 일이었다. 심지어 당초아의 숙부는 정식 후계 경쟁자조차 아니었다.

당초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백했다.

"사실……! 맞습니다……!"

"과연."

"예! 제가 화산검룡을 유혹했습니다!"

"오호라."

"화산검룡이 제게 반한 겁니다!"

"제법이다. 당가 여아 중에서도 그 정도 사윗감을 낚아채올 녀석이 많지 않을 거다."

"제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죠!"

"훌륭하군."

잠깐 자신감에 차서 이것저것 내뱉은 당초아는 얼굴이 빨개졌다. 한마디 할 때마다 숙부가 칭찬을 해주니 자기도 모르게 헛소리가 이어졌다. 사실 확실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숙부님은 그걸 알아보시려고 여기서 절 기다리신 겁니까?"

"겸사겸사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김에 한 번 보고자 한 것이다. 네 의지를 확인하려고 말이다."

"의지요?"

"원래 보잘것없는 치기로 끼어들고자 했다면 다 내려놓고 학교나 관리하도록 하고자 했다."

"그런데요?"

"그런데 보아하니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구나."

"예, 진심입니다."

"그거면 됐다. 건투를 비마. 당수련의 생일에 보자꾸나."

"예, 그럼 이만 들어가십시오."

당천갈은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고지를 점령한 자의 태도였다.

당초아는 그것이 몹시 띠꺼웠지만 그리 싫지는 않았다.

말했듯, 당수련은 독을 마주하는 것이 즐거운 타입이었다. 자신만만한 숙부를 잡아먹는 날을 몹시 고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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