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 39. 사천당문(Tang men)(1) >
당수련은 요즘 고민이 많았다.
중간고사 때문에? 아니었다.
시험을 아주 잘 본 것은 아니지만 노력한 만큼은 보상을 받았다. 실력이 쑥쑥 올라가는 게 눈에 보여 당수련은 요즘 수련하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그럼 남녀 문제? 그것도 아니었다.
동기들은 착하고 좋은 친구들이었지만 그 중 이성으로 느껴지는 남자애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젊은 교수를 볼 때 가끔 가슴이 콩닥거리기는 하는데. 거긴 너무 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학생이랑 교수는 아니지.
당수련이 고민에 빠진 것은 바로 그녀의 스무 살 생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일이라는 것은 원래 축하와 축복을 받는 경사스러운 날이지만 올해는 달랐다.
당수련의 스무살 생일.
조금 무섭지만 존경스러운 당수련의 할아버지는 올해 당수련의 생일에 사천당가의 후계자들이 모두 참석해 축하해줄 거라고 말했다.
사천당가의 후계자가 될 자격을 얻은 경쟁자 중 마지막 인물이 성인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사천당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진정한 경쟁이 시작된다고 했다.
당수련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갈피를 못 잡는 중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의 어른들은 당수련이 사천당가의 후계자가 될 거라고 말하곤 했다.
어느 순간 당수련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잘 놀아주던 친척 언니나 오빠들이 당수련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당수련이 가장 유력한 후계자이기 때문에. 당수련이 암왕 당기백의 손녀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그런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사천당가의 후계들은 매일 같이 모여 놀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천당가 직계의 아이들은 당수련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사천당가 직계의 어른들에게 배운 것이었다.
직계들은 당기백에게 빼앗긴 게 많았다. 당가의 지배권, 인사권, 재산권을 사실상 몰수당했고 당가가 사천으로 옮기면서는 오래된 고향까지 떠나왔다.
사천당가가 그토록 주창하던 실력지상주의에 어긋나는 것은 없었지만, 막상 그 실력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기자 직계들은 당가의 번영을 보면서도 당기백의 일가를 속으로 미워하기 시작했다.
다시 당가를 되찾아야 한다. 지금은 당기백의 세상이지만 후대에까지 그래서는 아니 된다.
직계 고수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결국 또래 친척들은 당수련을 하나둘 멀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엔 가장 친했고 언제나 같이 놀아주던 당초아마저 당수련을 떠났다.
당수련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것 때문에 미움받는 것을 견딜 만큼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날 당수련은 어른들에게 촉망받던 암기술을 내려놓았다. 당기백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고 불릴 만큼 재능이 출중하던 것이었다.
대신 검을 잡았다. 암기를 만들던 기술을 살려 사용할 검을 직접 두드렸다. 어렸을 때부터 당가 장인들과 어울려 배웠으니 검 한 자루 만드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그 검을 다루는 것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른들은 화를 냈다.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하는 것이냐. 그런다고 열등감에 찌들어 있는 직계들이 너를 돌아봐 줄 줄로 아느냐. 네 할아버지를 보아라. 너도 저런 위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수련은 꿋꿋하게 검을 잡았다. 태어나서 처음 해본 반항이었다.
당수련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모든 어른이 당수련을 다그쳐도 당수련이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왕 당기백은 당수련이 검을 수련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수련을 후계 경쟁자 중 하나로 선정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지금은 검을 내려놓은 당수련은 아직도 암왕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어여쁜 손녀라서 뭘 하든 지지해주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련히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던 걸까. 어쩌면 검을 선택해 도태되면 그 역시 당수련 스스로 책임지면 될 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검을 버리고 권각을 수련하는 재미에 빠진 요즘, 당수련에게는 하루하루가 짧았다. 정신을 차리니 대학교에 입학한 지도 어느덧 두어 달 가까이였다.
생일이 다가온다. 채 두 달이 남지 않았다.
미루고 미뤘던 선택의 순간이 왔다.
상속을 포기해야 할지, 당가 후계자의 일원으로 당당히 경쟁해야 할지.
원래는 포기하려는 마음이었다.
당수련은 스스로에게 늘 자신감이 없었다.
남들이 칭찬하던 암기에 대한 재능 역시 할아버지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독공은 친척들보다 딱히 낫지도 않았다.
당수련은 본래 경쟁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당초아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천공대에 입학했다.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
나 나쁜 짓 안 할게. 대신 예전처럼 놀아줘.
그런 뜻이었다.
당초아는 답하지 않았다. 12명의 장학생 중 4등으로 공평하게 당수련을 대할 뿐이었다.
요즘 당수련은 자신감이 좀 붙었다.
몸을 다루는 재미가 있었다. 친구들도 실력이 빨리 는다고 칭찬해줬다. 진짜로 재능이 있나 싶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당수련은 늘 위축되어 있었다. 그때처럼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냥 포기하는 것. 지금까지 살았던 것처럼 도망치는 것. 그게 제일 편한 방법이다.
불쑥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생겼다.
언제부터였을까.
젊은 교수와 어린 조교를 뒷골목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다.
그제서야 당수련은 깨달았다.
지금까지 무가에 태어나서 당연히 무공을 익혀왔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철권을 휘두르는 당차고 어린 조교를 보는 순간에야, 당수련은 비로소 강호를 종횡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사천당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당수련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부딪히지도 않고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인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천공대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주.
어두컴컴한 방 한구석에서 창밖의 별을 보며.
당수련은 문득 당가의 후계 구도에 참전하기로 결심했다.
***
"김 형. 당가에서 손님이 찾아왔소."
"당가에서?"
"로비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더군."
"알았다."
소걸이 전화를 받더니 문득 그렇게 말했다. 나는 처리하던 서류를 접어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가에서 왔다고? 무슨 일이지?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지금의 당가는 하나가 아니다.
당가 내부의 후계 전쟁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당가 내부 파벌은 꽤 많을 것이다.
그저그런 대기업이 아니라 사천당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경쟁이다. 줄과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느 쪽에서 온 것 같으냐?"
"나라고 해서 척하고 당가 내부의 파벌을 구분할 수는 없소. 그쪽은 개방의 정보력이 미치지도 않는단 말이오. 다만 굳이 로비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당초아와 당수련 쪽은 아닐 가능성이 높지. 그쪽은 김 형과 직접적인 창구가 있잖소."
"그건 그렇지."
"굳이 김 형을 찾아왔다면 아무래도 그쪽 아니겠소?"
"당천갈?"
"내 생각은 그렇소. 사천독괴는 김 형과 접점이 있긴 하니 말이오. 독괴가 정보를 통제한 정황이 있으니 나머지 경쟁자는 김 형의 존재조차 모를 수도 있소."
"흠, 그럴듯하군."
하긴 내 쪽에서도 한 번은 만나보려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 집에 귀여운 강아지를 분양해준 만큼 책임비 내는 셈 만나봐야겠다.
"그럼 중간고사 결과 보고는 부탁한다."
"……금방 오는 것 아니오? 와서 김 형이 하면 되잖소."
"천하의 사천당가를 맞이하면서 그렇게 안심할 수는 없지. 끝나고 가봐야 할 데가 있으니 돌아오지 않겠다. 처리하고 알아서 퇴근하도록."
"알겠소."
도하나를 이끌고 로비로 향했다.
갈색 봄 코트를 입은 큰 키의 사내가 로비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얼굴을 제외하면 전신에 드러난 피부가 없었다. 손에도 하얀 면장갑을 끼고 있어 누가 봐도 수상한 모양새였다. 호흡이 고르고 기척이 아주 얕았다.
"아, 오셨군."
내 기척을 느꼈는지 밖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안광이 빛났다.
알고 있는 남자였다.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검은색 눈동자 안에 동공 중앙이 녹색으로 잠깐 번들거렸다. 독공을 경지에 이르도록 익힌 자가 안법을 시전한 모양새였다.
그런다고 나를 쉽게 읽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본인이 직접 올 줄은 몰랐소만."
"대협 정도 되는 인물을 맞이하려면 한가한 몸을 직접 이끌고 나서야겠지 않겠소. 반갑소."
독괴가 손을 내밀었다. 포권이 아니라 악수였다.
철저한 사업가로서의 자세였다. 무인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철두철미의 당천갈이오. 부족하지만 사장직을 맡고 있소."
"당가의 인물과 악수를 하는 것은 보통 저어되는 일로 생각하지 않소?"
"하늘 아래[天下]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화산의 검룡 아니오?"
"반갑소."
화산검룡. 당천갈은 나를 세력 외의 고수로 여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팔린 몸이다.
나는 당천갈의 손을 마주 잡았다. 내심 출수할 생각까지 하면서였다.
천독불침을 이룬 몸이지만 당가 장로인 화경 고수의 독공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천무공대학 수위 김산이오."
"수위라. 검룡이 아니라?"
"그렇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당천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혼잣말 같았다.
"사리분별을 못하는 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고금 이래 가장 어린 나이에 화경을 이루지 않았나. 뇌의 회전이 보통이 아닐 것인데."
혼자서 뭐라고 중얼중얼하더니 당천갈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내게 물었다.
"초아 그 아이가 나보다 나은 게 있소?"
"그건 모르겠소만.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오."
"왜지?"
"두 가지가 이유가 있소."
"무엇이오?"
"첫 번째는 내가 당 이사장에게 이미 대가를 받았다는 것이고."
"흠. 이미 어떤 보패(寶貝)를 선지급했다는 것이군. 두 번째는 뭐요?"
"두 번째는 나는 선배 말처럼 원래 하늘 아래 두려운 것이 없기 때문이오."
"하."
당천갈이 재밌다는 듯 씨익 웃었다. 살짝 긁어보려고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내게 흥미를 느낀 듯했다. 하긴 별호에 괴(怪) 자가 붙는 인간이 정상일 리가 없다.
"그 상대가 당가라고 해도?"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그렇소."
당천갈과 당초아의 전력 차이가 내게 당초아를 배신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좋은 대답이 되었소. 더 말을 나눌 필요는 없는 것 같군."
"동감이오."
"수련이 그 아이의 생일에 오는 것이오?"
"그렇게 되었소."
"생일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겠군."
"그럼 나도 선물 단단히 챙겨서 찾아가겠소."
"정말 마음에 드는 젊은이군. 내 아들이 반만 닮았어도……."
당천갈은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선물이오."
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게 툭 던지고 돌아섰다.
"멀리 가지 않겠소."
당천갈은 곧은 걸음걸이로 휘적거리며 멀어져갔다. 남의 안방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마음대로 나간다. 이것은 당천갈과 당초아의 전력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였다.
당초아의 땅에서조차 당천갈은 자유롭다.
나는 품안에 든 것을 풀었다. 알싸한 단약 냄새가 났다.
당문제약에서 제조하는 영약이었다. 손도 크지, 참.
"김소원 주면 되겠군."
나는 영약을 도하나에게 툭 던지고 팔짱을 꼈다.
잠깐 당천갈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내 하수가 아니었다. 암왕이 후계 자격조차 인정하지 않은 일개 장로였음에도 큰 인물이었다.
준비를 철저히 할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