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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39화 (39/120)

< 39 : 38. 벚꽃(Cherry Blossom)(3) >

당초아는 김지원의 사정을 듣더니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승낙했다.

"저야 좋죠. 자세한 조건은 김지원 학생과 만나서 얘기할까요?"

"조만간 절정으로 만들어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 더할 나위 없죠. 고수는 항상 부족하니까요."

이로써 김지원은 하오문의 유망주가 되었다.

아직 정식적으로 계약한 것은 아니지만 지부장이 승낙했으니 웬만하면 계약이 진행될 것이다.

"앞으로도 부단히 노력해야 할 거다. 둘 다."

"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 저도요! 아저……, 교수님!"

하오문도가 되었다고 해서 고생이 끝난 게 아니다. 오히려 본격적인 고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오문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하오문은 투자한 만큼 뽑아먹기 위해 김지원을 최대한 굴릴 것이다. 김지원이 수준 이상의 고수가 되지 못한다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일도 있을 것이다.

설령 엔간한 실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오문에 미래를 판 것만으로 자매에게 닥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당장은 계약금과 봉급으로 김소원의 영약 값을 해결할 수 있겠지만 10년 뒤에도 그러기는 힘들 거다.

설령 김지원이 초절정이 된다고 해도 그렇다.

초절정이라고 해봐야 보기 드문 경지는 아닌데 그렇게까지 큰돈을 벌 수는 없다.

오히려 기대할 만한 것은 김소원이다.

일단 김지원이 땡긴 돈으로 김소원의 수명을 연장한다면, 김소원이 칠음절맥의 오성을 발휘하여 놀라운 결과를 보여줄 수도 있다.

그래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자매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비용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수입이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절맥의 주인은 잠깐 연기한 천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일단 오늘은 쉬고, 내일 수업부터 둘이 함께 와라."

"내일요? 오후에 비무 대련 강의는……."

"오늘은 열외다. 동생이 같이 수업 들으려면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지 않나."

"알겠습니다."

해가 중천이었다. 오후 수업이 시간이 머지않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봐요!"

"그래."

나는 고개를 숙이는 자매에게 대충 손을 휘저어 인사했다. 자매는 손을 잡고 멀어져 갔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

"네, 사형!"

우리는 자매가 떠난 자리를 정리했다. 쓰레기들과 돗자리 따위였다. 먹은 양이 많은 만큼 쓰레기도 꽤 많았다.

"사형,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뭐냐?"

"사형은 돈이 엄청나게 많잖아요."

"그런 편이지."

초절정부터 화산파에서 암매화로 활동했고 화경으로 살아온 시간도 십수 년이다.

문파에 있을 때는 수입이 온전히 내 것은 아니었지만, 몇 년 전부터는 낭인으로 활동도 했으니 모은 돈이 적지는 않았다.

화경쯤 되면 어느 국가에서든 높은 수준의 면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돈을 벌기만 하면 모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자세한 포트폴리오는 화산파 소속 세무사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각종 장비, 부동산, 화산파 지분에다가 위안화, 원화, 달러 등 현금까지 모두 합치면 1조 원 조금 안 되는 수준일 것이다.

나는 별다른 사치를 하지 않기 때문에 경력이 비슷한 다른 화경들에 비하면 조금 많은 편이었다.

한 마디로 나는 부자다.

"그럼 사형이 걔네들한테 영약 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내 재산을 김소원에게 투자한다면 아마 마흔 살까지는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소걸은 어떻게 생각하나."

"……김 형에게는 분명 두 자매를 도울 만한 재산이 있소."

"있을 것이오, 도 아니고 있소? 지금 개방 정보력을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아무튼. 하지만, 세상에 돈이 없어서 죽어가는 자가 김소원뿐만은 아니오. 당장 김상후에게 납치되어 열화핵폭단을 복용한 다른 피해자들 역시 마찬가지지. 오히려 그들에게 김씨 자매들은 가해자의 가족이기도 하오. 김 형이 그자들 대신 김소원을 구할 이유가 있소?"

"움……."

"그 모두를 김 형이 구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들 외에도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수없이 많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김소원에게 필요한 영약 값을 제3세계의 빈민들에게 기부한다면 수십만 명을 살릴 수도 있을 거요. 김소원 한 명의 목숨이 그들 수십만보다 귀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

"음. 듣고보니 그렇겠네요……."

"또 그들을 마냥 돕는 것이 능사가 아닐 수도 있소.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최선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오. 받기만 해서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소. 그건 무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똑같소."

"어려워요, 소 조교님."

소걸은 오래간만에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역시 항상 고민하는 주제일 것이다.

개방은 동양의 적십자라고 불리는 집단이다. 자기 자신들도 거지로 출발해 가난하게 살면서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대방파.

개방에게도 돈은 많다. 세계 양대 정보단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방도 모두를 구휼할 수는 없다. 돈이 많다한들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개방은 늘 구원할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개방의 후개로서 소걸은 항상 그 선택에 직면해 있을 것이다.

소걸의 말은 도하나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개방 후계자의 고뇌였다.

"김 형이 자매를 돕는 것은 그녀들이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이후라도 늦지 않다는 것이오."

"그런 건가요?"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소."

그것이 개방의 신조였다. 스스로를 구하는 자를 돕는다. 하늘이 어질지 않으니[天地不仁], 거지들이 백성을 돕는 것이다.

우습고도 존경스러운 자들이었다.

나 역시 소걸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낭인 생활까지 하며 돈을 박박 긁어모은 것은 나 역시 돈을 쓸데가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고무림 블랙에 검룡패 조각이 올라왔을 때 돈이 부족해서 살 수 없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협객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진 모든 것을 털어서 눈앞에 있는 자를 구해야 할지도. 그렇게 따지면 나는 분명 제대로 된 협객은 아닐 것이다.

시대의 마지막 협객이었던 사내의 부족한 제자일 뿐이다.

보고 배운 것이 협행이라 늘 그쪽으로 손이 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모든 것을 내놓지는 못하는 것이다.

"하나야."

"네, 사형."

"걔네들이 불쌍하냐?"

"……잘 모르겠어요."

도하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돕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거면 됐다."

"네?"

"네가 돕고 싶으면 도와도 좋다."

"제가요?"

도하나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교로서 네가 받는 돈도 있지 않으냐. 의뢰금 중 네 몫으로 모아둔 것도 있다. 그걸로 영약을 사도 된다. 아니면 네가 두 자매를 가르쳐보는 것도 좋겠지. 여고수의 가르침은 그녀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떠냐. 해볼 테냐?"

입을 헤 벌리고 생각하던 도하나는 문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 저 해볼래요!"

"그래라."

근래 들어 도하나의 표정이 다양해짐을 느꼈다. 똑같이 웃더라도 자연스러운 표정이 늘었다. 도하나의 인간성이 회복되고 있는 징조로 여겨졌다.

원래 도하나는 어떤 상황에서건 웃기만 하는 아이였다. 감성이 망가져 있었다. 인간이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렇게 되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진 편이다. 계속 나아진다고 느껴졌다.

문득 한국에 와서 교수직을 맡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잔잔한 환경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개 한 마리를 기르는 것이 도하나의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된 것 같았다.

한국은 비교적 평화로운 나라다. 총기도 금지되어 있고 치안도 좋다.

여기 와서 손에 피를 묻힐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낭인 생활을 할 때에 비하면 새 발의 피[鳥足之血]였다. 그때는 매일 피를 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도하나의 정서를 위해서는 진작 이런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난 몇 년은 나에게도 절박하고 바빴던 시간이었기에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여유를 가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 강호에서 살아가는 것은 계속해서 은원을 쌓는 일이다.

지금에야 적은 내공으로 검강까지 다루는 편법을 익혔으나 처음 내공을 잃었을 때는 검기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암매화 시절부터 쌓아온 원한이 시시때때로 나를 공격해왔다. 온 세상이 칼로 이루어진 밭이었다.

은거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몸을 회복하고 기술을 연마하고 서서히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는 것까지 모든 과정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지금은 괜찮다.

상황이 매우 안정되었다. 내공도 무려 21년분이다. 하수를 상대로는 온종일 싸울 수도 있는 분량이다.

"그럼 이제 들어가자."

"네, 사형. 근데, 저희 점심은 언제 먹어요? 점심시간 다 끝나가는데."

"……지금까지 먹은 건 뭔데?"

"이건 간식이잖아요. 사형이 아까 점심 먹어야 하니까 너무 많이 먹지 말라 그래서 많이 안 먹었는데요."

"……."

나는 도하나의 손에 들린 쓰레기들을 보았다.

김밥 쉰 줄 중에서 마흔 줄가량을 혼자 먹어놓고 뻔뻔하게 저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초절정고수의 기초 대사량이 범인에 비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도를 넘은 도하나의 식탐에는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당장 옆에 있는 소걸도 김밥을 다섯 줄밖에 안 먹었다.

"헛소리 말고 배고프면 연구실 가서 벽곡바나 먹어라."

"힝."

"힝 같은 소리."

나는 도하나의 투정을 뒤로하고 연구실로 갔다.

도하나는 기어코 연구실에 벽곡바를 몇 개 더 집어먹었다.

그거 하나가 다른 사람 한 끼인 건 아니? 남들은 한 달 먹고 살 분량을 오늘 점심으로만 먹은 것 같구나.

도하나가 소리도 내지 않고 벽곡바를 우물거리는 동안 나와 소걸은 서류나 처리했다.

"김 형."

"아."

나는 소걸이 정리해서 넘긴 서류를 보았다.

하긴. 벚꽃 시즌이었지.

혹자는 벚꽃의 꽃말을 이렇게 칭하기도 했다.

중간고사라고.

다다음 주였다.

***

다음날 독접관.

"뭐야? 웬 꼬마야? 지원이 네 동생이야?"

"응. 오늘부터 청강하기로 했어."

"얘가? 우리 수업 따라갈 수 있겠어? 고등학생도 안 되어 보이는데?"

"안녕하세요! 김지원 동생 김소원이에요!"

"되게 귀엽다. 소원아, 언니랑 브이로그 찍을래? 너 방송 나와도 돼?"

교실에 들어오자 김소원이 사교성 있게 돌아다니며 언니, 오빠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먼지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소원을 강단 앞으로 불러내 인사시켰다.

"오늘부터 당분간 특별 청강하게 된 김소원이다. 너희와 성적 경쟁을 하지 않겠지만 시험까지도 같이 칠 거다."

"아하. 하긴 성적을 매기지는 않겠지."

"다시 한 번 인사 드립니다! 김소원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말 나온 김에 말하자면 다다음 주 중간고사인 거 알지?"

"엑, 벌써요?"

"뭔 벌써야. 밖에 벚꽃 떨어지는 거 안 보이나? 아무튼 중간고사 시간표 올려놨으니 확인하도록 하고.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까 부담 없이 평소 실력대로 보도록."

그 이후 이주일은 빠르게 흘렀다.

급하게 중간고사 준비를 한다고 나와 이정은 교수, 소걸도 며칠간 바빴다. 지식이 청순한 도하나는 옆에서 군것질이나 하고 있었다.

급하게 치러진 중간고사의 결과는 학생들에게는 나름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중간고사 필기 1등은 김소원이었다.

실로 벚꽃과 같은 재능.

꽃처럼 순간을 살지만 그때만큼은 아름답고 풍성하게 피어나는 것이 절맥의 오성이다.

불과 중간고사 칠 주야 전에 청강을 시작한 주제에 김소원은 이론 시점에서 압도적으로 1등을 차지하는 결과를 내놓았다. 물론 실기는 꼴찌였다. 몸뚱어리는 아직 이류에 불과했기에.

"……절맥이라고?"

"그런 사정이……."

"어쩐지."

이후 김소원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학생들이 또 다른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

김소원의 자율무공학과 합류는 삼재종합공 스터디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소, 소원아. 나 이거 좀 가르쳐줄래?"

"언니! 그러니까 먼지랑 그만 놀고 공부 좀 하라니까요! 이러다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요!"

"나 다 큰 게 이거……. 아, 아냐. 열심히 할게……."

"이리 오세요. 오늘 이거 다 하고 집에 가요."

"……응? 이거? 이걸 다 하겠다고?"

다양하고 복잡한 삼재종합공의 이론적인 측면에서 중심을 잡고 총괄적으로 정리해줄 인재가 생긴 것이다.

이로써 학생들의 성장은 궤도에 올랐다.

이제는 내가 없어도 어느 정도 대학 생활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죽을 생각은 없지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커리큘럼은 잘 만들어뒀다.

이제 당수련의 생일이 두 달쯤 남았다.

슬슬 당천갈을 상대할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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