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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38화 (38/120)

< 38 : 37. 벚꽃(Cherry Blossom)(2) >

"교, 교수님. 도, 돈이요? 갑자기 그게 무슨……."

"김 형. 좀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만."

"그렇군. 차근차근 이야기하지."

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김소원의 정확한 몸 상태부터 그녀가 연명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들까지.

"현재 김소원의 단전은 핵폭단에 의해 진원진기가 분해되고 있는 상태다. 효력이 약한 것을 복용해서 그 작용이 느릴지언정 멈출 일은 없지. 중요한 것은 이 단전 분해가 김소원에게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요? 진원진기가 분해되면…… 사람은 죽잖아요."

"김소원은 절맥이다. 너도 알지?"

"네. 어렸을 때부터 소원이는 몸이 약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먹으면서 그게 불치병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칠음절맥이라고."

"맞다. 칠음절맥."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느새 미지근했다.

"진원진기가 내기로 분해되는 과정을 거쳐, 김소원의 기경팔맥으로 그 애의 수준에서는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내기가 빠르게 순환하고 있다. 그 양과 속도 덕분에 내기가 끊어진 맥을 '뛰어넘으며' 몸 전체를 순환해 신체 일부가 폐사하는 일을 막고 있지."

"많은 내기가 빠르게……. 그럼, 만약 진원진기가 분해되지 않는다면……."

"진원진기가 분해되는 걸 멈추면 김소원은 절맥으로 죽는다. 지금보다 훨씬 일찍 고통스럽게 죽겠지."

김지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할아버지의 약은…… 소원이의 병을 완전히 치료한 게 아니었군요. 단전이 분해되는 건 약의 부작용이 아니라……."

"그래. 그건 부작용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네 조부가 의도한 약효지."

"……몰랐어요. 이런 사실은…… 그 어떤 의사도 이런 건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의원들 역시 몰랐을 수 있다. 절맥과 단전 분해의 증상을 각각 파악했을 뿐 그 두 개를 연결 짓지 못했다면. 또 지금 진단해서는 김소원에게 절맥이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기 힘들 것이고."

김지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잔을 조용히 매만졌다.

김소원의 몸 상태와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게 지금이 처음인 모양이다.

양자택일의 상황.

아니, 사실은 선택의 여지도 없다. 설령 선택할 수 있더라도 모든 선택지의 끝이 죽음일 뿐이다.

"……그럼 방법이 없는 건가요?"

"방법. 아까 말했듯이, 없지는 않다."

"뭔가요?"

"일단 전제부터 설명하지. 핵폭단 복용에 의해 시작된 진원진기 분해는 멈출 수 없다. 결국 진원진기는 모두 소모될 것이다."

"네."

"그러니 진원진기가 다 소모되는 날짜를 극한까지 연장해야 한다."

보통 사람도 살아가면서 진원진기가 자연히 줄어든다. 근육이 약해지고, 피부가 늘어지고, 주름이 생긴다. 그걸 늙음이라고 부른다.

"의도한 것이겠지만 열화핵폭단은 원본보다 진원지기 분해의 속도가 매우 느리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진원진기를 계속 보충한다면 생을 연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피할 수 없는 시간의 독에서 도망치려는 사람들이 간절히 찾는 물건이 있다.

이미 진원진기를 보충해주는 보배.

한없이 순수한 자연진기의 농축물.

바로 영약이다.

"영약을 계속 복용한다면, 그리고 그 영약의 복용 과정에서 진기도인을 도와줄 고수가 있다면, 소모된 만큼 진원진기를 보충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진기도인을 도와줄 수 있는 초고수는 구해놓은 상태지."

"……김 형, 그 초고수가 혹시?"

"무얼 묻나. 당연히 본 교수다."

"역시 그랬군. 하마터면 다른 고수라도 있는 줄 착각할 뻔했소."

"본인만큼 기에 능통한 자가 이 땅에 드문데 굳이 다른 고수를?"

"참으로 잘났소. 아주 대단하오."

"익히 아는 사실이군. 새롭지 않다."

"……."

"……영약, 비싸겠죠?"

"물론."

영약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영약을 제조할 만한 대방파로부터 직접 영약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신분이 필요했다.

마땅한 신분이 없다면 김지원은 고무림 블랙을 통해 우회해서 영약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돈이 필요했다. 더 많은 돈이.

"……영약이 어느 정도 필요할까요?"

"그건 김소원이 몇 살까지 살기를 바라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나이를 먹을수록 진원진기 소모는 점점 급속화될 거다. 10대에는 몇억이면 되겠지. 허나 20대 때는 일 년에 십수억이 필요해질 것이고 30대가 되면 매년 수십억 치가 필요해질 거다."

"적어도 수억……."

"김 형, 영약이 그렇게까지 필요하단 말이오? 아무리 영약이래도 하나에 몇억을 넘는 경우는 드물지 않소?"

"적게 잡아도 그렇다. 김소원의 진원진기 분해 속도를 굳이 묘사하자면, 남들보다 10배 빠르게 늙어가는 것과 같다. 그럼 김소원에게 필요한 건 수명을 10배 늘리는 것과 같지. 10배의 시간을 더 사는 데 필요한 돈으로 계산하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니지."

"10배의 수명이라……."

"물론 이건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그럼요?"

"김소원이 무공을 익혀 단전에 대한 통제 능력이 늘면 그 비용을 어느 정도는 줄일 수는 있겠지. 만약 현경위에 오른다면 진원진기의 소모를 거의 정지시킬 수도 있다."

뭐, 현경에 오를 수 있다면 비용을 생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한순간에 수십 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현경이니.

"일단은 내가 김소원을 좀 가르쳐보도록 하마."

사실 절맥에게 개인적으로 기대되는 부분도 있었다. 한 사람의 무인이자 무학자로서 궁금한 질문이다.

삶의 길이에 반비례하는 절맥 특유의 오성. 칠음절맥은 스물다섯을 넘긴 경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절맥은 기혈 경화로 천천히 폐사하기 때문에 그렇다.

시간과 맞바꾼 오성에 마땅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절맥은 어떤 자질을 뽐낼 것인가.

"……감사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감사 인사를 하는 김지원의 표정이 마냥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집이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일 년에 수십억을 감당할 만큼 여유로운 집안이 도처에 있을 리가 없다. 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에 불과했다.

김지원 자매의 조부가 의사이긴 했으나 큰 부를 저축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절맥을 연구도 그 원인의 일부일 것이다.

그런 허황된 연구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주는 자를 찾기는 힘들었을 테니 자비로 연구를 계속했겠지.

마선과 접촉하고 핵폭단으로 분야를 옮긴 이후에는 지원을 받았겠지만, 그전에는 의미 없는 시도를 상당히 많이 했을 것이다.

"일단 시간이 됐으니 점심이나 먹으면서 계속 얘기하자."

"……네."

우리는 연구실을 나섰다.

캠퍼스에 돗자리를 깔고 김소원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기로 했다.

김밥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소풍 같은 것을 가본 적이 없었다 한다. 다 같이 놀러 김밥을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와! 진짜 소풍온 거 같아요!"

벚꽃 시즌의 사천공대 캠퍼스는 소풍 장소로 부족함이 없었다.

"근데 무슨 김밥을 이렇게 많이 사온 거냐?"

"이 정도는 다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도하나가 들고 온 김밥은 쉰 줄이 넘었다. 사람이 다섯이니 단순히 계산하면 한 사람당 열 줄씩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소풍이 아니라 1박 2일 캠프를 해도 김밥 열 줄은 남길 것 같은데."

"남으면 제가 다 먹을게요!"

"언니, 저도요! 제가 같이 먹을게요!"

"……많이들 먹어라."

어린애들이 좋아하니까 그냥 뒀다. 행복하다니 됐다.

김밥을 나눠 먹으며 느긋하게 꽃구경을 했다. 꽃이 가장 예쁘게 필 시기였다. 눈을 어디로 돌려도 온통 벚꽃이었다.

예쁘긴 한데 치우는 게 아주 힘들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얘기하자 다들 나를 미친놈처럼 봤다.

"왜. 뭐. 맞잖아."

김소원은 신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 두 자매의 과거와 꿈 따위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 할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고 싶어요!"

아마 그렇게 되진 못할 거다. 의사는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 말에 울컥한 김지원이 화장실에 갔을 때였다.

"아저씨."

"뭐. 왜."

"우리 언니 말 다 안 들어줘도 돼요. 전 괜찮아요."

나는 김소원을 물끄러미 보았다.

무엇이 괜찮다는 것일까. 본인을 살게 해달라는 것이?

칠음절맥의 오성이 비단 육신에만 국한될 리가 없었다.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살아온 아이는 때로는 어른보다 어른스러운 법이었다.

"너, 내일부터 청강하거라."

"청강요?"

"수업을 들으라고. 언니랑 같이 와라."

"그럼 제 학교는 어쩌구요?"

"그게 중요하나?"

"중요하죠! 학생이 학교에 가야죠!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학교라는 교도소에 갇혀!"

"학교를 싫어하는 거냐, 좋아하는 거냐……."

"좋아해요. 늘 가고 싶었는걸요. 친구도 사귀고, 선생님한테 혼나기도 하고, 시험도 치고."

김소원이 방긋 웃었다. 표정이 맑고 눈빛에는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으나 얼핏 공허하고 삶에 초연해 보였다.

"어차피."

하지만 온전히 삶에 초연할 수 있는 인간은 별로 없다.

"어차피 저 죽잖아요."

김소원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아니면, 아저씨 말 들으면 저 살 수 있어요?"

"모른다."

"모른다……."

김소원의 동공이 커졌다.

"그럼 살 수도 있는 거네요!"

"확실하지는 않다."

"움, 그럼 어떡하지."

고개를 몇 번 갸웃하던 김소원은 이내 해맑게 외쳤다.

"할게요. 청강!"

"……그래. 결정이 빠르구나."

김소원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여기도 학교잖아요! 여기서도 시험도 치고, 친구는 아니지만 언니 오빠들도 사귀고, 선생님한테 혼나고는 할 수 있잖아요!"

"……선생님한테 혼나는 부분이 과연 학교생활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인가?"

"그럼요! 학생이라면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죠! 전 한 번도 혼나본 적이 없는 걸요!"

목숨이 다해가는 아이를 혼낼 선생은 많지 않으리라.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된다. 나는 혼내야 할 부분은 혼낸다."

"좋아요! 어디 맘껏 혼내보세요!"

"그럼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라. 이제부터 아저씨라고 부르면 혼낼 거다."

"……."

"……김 형, 그런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소?"

"마땅한 예의를 가르친 것뿐이다. 마음에 담아둔 적 없다. 진짜다."

어째 분위기가 싸했다. 다행히도 그때 김지원이 돌아왔다.

"흠. 김지원이 왔구나."

"네, 교수님."

김지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행의 표정을 보았다.

"분위기가 왜 이래요?"

"나도 모른다. 그나저나, 영약을 살 돈이 부족한 것 같던데."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네. 아무래도 그렇죠. 몇억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은."

"가장 확실한 방법은 둘 중 하나가 고수가 되는 거다. 한 명이라도 화경이 되면 일 년에 몇백억쯤을 감당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크지 않지."

"……그렇죠."

"몇억이요?"

김소원이 화들짝 놀랐다.

처음엔 김소원이 없는 자리에서 얘기할까 했지만 김소원도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녀를 위해 그녀의 언니가 감당하고 있는 것과 감당할 것을.

"아까 김지원 네가 그렇게 말했지. '뭐든' 할 수 있다고."

"……네."

김지원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할게요."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긴 하다. 하지만 떳떳한 일은 아니지."

"……뭔가요?"

"스무 살 여대생이 큰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야 뻔하지 않겠나?"

꿀꺽.

좌중이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김 형,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그래."

서로에게 최적의 시기였다. 마침 그쪽도 일생일대의 승부를 준비하는 중이었으니.

"바로 하오문 전속계약이다."

"……음?"

"예?"

"무력도 명예도 부족한 하오문이 고수들을 영입할 수 있는 수단이 뭐 있겠나. 돈 급한 유망주들 노예 계약으로 데려가는 거지."

"하오문, 말인가요."

"그래. 20년쯤 계약하면 그럭저럭 돈을 쳐줄 거다. 경지가 오른다면 중간에 조건을 인상할 수도 있겠지. 마침 사천 지부에 너에게 우호적일 인사가 있기도 하다."

"20년……."

아득한 세월이다.

묘목이 크게 자랄 수 있고,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는 시간이다.

하오문에 가면 김지원은 살아온 날만큼 뒷골목에서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김지원이 후기지수로서 어떤 꿈을 꿔왔든 마피아 조직에 청춘을 바칠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문 정파의 정예를 꿈꿨을 수도 있고, 정의로운 무림맹의 여협을 꿈꿨을 수도 있다.

하오문에 20년이 묶이면 그런 꿈은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고작 일류 수준인 후기지수가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반짝이는 미래를 담보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하오문 입장에서도 마냥 이득 보는 일은 아니다.

모든 후기지수가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후기지수를 영입하는 것은 일종의 복권을 긁는 것과 같다.

어쩌면 하오문 쪽에서 거절할지도 모른다. 김지원이 아직 절정도 되지 못한 새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검증되지 않은 유망주다. 하지만 시도는 해볼 만하다. 하오문이니까.

"너만 좋다면 소개해주마."

그 말을 끝으로 돗자리 위는 조용해졌다.

빈 찬합 위로 초속 5cm의 속도로 벚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렇게 하얗고 찬란하다 한들 꽃은 진다. 오래가지 않는다[花無十日紅].

봄은 꽃이 피는 계절인 동시에 꽃이 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김지원은 멍하니 떨어지는 벚꽃을 보았다. 옆에서 동생이 울면서 말리는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다.

긴 고민 끝에 김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할게요."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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