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 36. 벚꽃(Cherry Blossom)(1) >
어느덧 봄의 중순이었다.
창밖으로 하얗게 한껏 피어오른 벚꽃이 보였다.
4월이었다.
"오늘 점혈개론 강의는 여기까지. 오늘 강의에 나온 주요 혈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까지 확실히 숙지할 수 있도록 한다."
"감사합니다!"
나는 교재로 쓰고 있는 무인해부학총론서(武人解剖學總論書)를 착 덮었다.
백두의방(白頭醫幇)에서 백두의대 학생들의 해부학 공부를 위해 만든 전공 서적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학생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복습하는 데 한창이었다.
최수아는 아예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혼자 못하겠는지 원지혜에게 엉겨붙었다.
"힝. 이거 왜 이렇게 어려워. 지혜야~. 나 이것 좀 가르쳐줘."
"에휴. 넌 이것도 못 해? 여기 봐봐."
하긴 점혈을 익히는 것만 생각한다면 새내기들의 교재로 쓰기에는 난이도가 과하게 높긴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전신 혈도와 경락의 흐름을 한 번 확실히 집고 가는 것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해 이 책을 교재로 골랐다.
현대에서 무인으로 살아가려면 해부학을 어느 정도 익히는 것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점혈도 점혈이지만, 상승의 심법과 기공, 외공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인체 전반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십이경맥부터 시작해서 기경팔맥, 그리고 삼백육십오 개의 혈도 중 주요 혈도만큼은 위치와 역할을 확실하게 알아두는 것이 좋았다.
머리가 나쁘면 무인조차 할 수 없다. 무인은 단순하게 몸 쓰는 직업이라는 편견도 있지만, 고수 중에는 지능이 낮은 사람이 드문 이유가 다 있다.
문무를 겸비하는 고수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문무를 겸비하지 않으면 애초에 고수가 될 수 없다.
돈만 있으면 쉽게 고수를 고용할 수 있고, 고수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요즘엔 공부가 과거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었다.
젊고 부유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후기지수를 노리는 사기꾼들이 도처에 깔렸다.
기초적인 법 지식은 알고 있어야 사기를 안 당한다.
학생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모르는 걸 물어보고 알려주고 학습법을 공유했다.
삼재종합공 스터디로 인해 형성된 분위기가 다른 과목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 노리기도 했으나 기대 이상으로 분위기가 좋았다.
좋은 신호였다.
아직까지 낙오되는 학생 없이 전체적으로 수준이 오르고 있었다.
눈에 띄게 성정이 나쁜 학생이 없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미꾸라지 하나가 온 도랑을 더럽히는 법인데, 내가 따로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저……, 교수님."
"무슨 일이지?"
막 강의실을 나서려고 했을 때 김지원이 나를 불렀다.
"저, 상담할 게 있는데요."
김지원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긴장한 듯했다.
"교수 연구실로 따라오도록."
"네!"
나는 조교들과 함께 연구실로 이동했다. 김지원이 그 뒤를 졸졸졸 따라왔다.
"지원이 무슨 일 있대?"
"오늘 학교에 동생 온다던데?"
닫힌 강의실 문 너머에서 학생들의 잡담 소리가 들려왔다.
***
"일단 거기 앉아라."
김지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소파에 앉았다.
"마실 건 뭐가 좋나? 커피? 차?"
"아, 저, 저는 괜찮은데요."
"어차피 네가 아니라도 내가 마실 것이다. 빨리 말해라."
"그, 그럼 커피요."
"나도 커피로 주시오."
"저도요!"
"……."
조교라는 것들이 교수 일을 대신할 생각은 안 하고 교수를 부려 먹기나 하다니. 나는 그냥 김지원에게 상담 내용을 정리할 시간이나 주려고 한 건데.
나는 연구실 한 켠에 있는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몇 잔 뽑았다. 이왕 하는 김에 조교들 몫까지 뽑긴 했다.
옆에 놓인 다과도 몇 개 챙겼다. 뜨거우니까 테이블까지는 허공섭물로 옮겼다.
물론 내 몸은 스무 살쯤부터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이르렀다. 뜨거운 거나 차가운 것 좀 집는다고 다칠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뜨거움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걸 못 느끼면 그냥 신경이 마비된 거다.
"헌데 김 형, 저번에 콜드브루가 아니면 못 마신다고 하지 않았소?"
"정확히 말하면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도사가 어찌 원하는 것을 모두 누리며 살겠느냐. 다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지."
"……."
나는 소걸의 시선을 외면하고 커피를 홀짝였다. 김지원은 양손으로 뜨거운 커피를 꼭 쥐고 있었다. 뜨거울 텐데.
"그래서 상담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김지원은 이윽고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저, 그때 제 동생 기억하세요?"
"물론."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었으니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핵폭단과 관련된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절맥연구소라는 괴집단에서 절맥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화핵폭단을 개발했던 사건.
김지원의 조부가 절맥연구소의 연구소장이었으며 그는 김지원의 동생에게 열화핵폭단을 복용시켰다.
그곳에서 취견자를 상대하기 위해 내공 금제를 해제하는 바람에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배후에는 마선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니 쉬이 잊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개방의 힘을 빌려 마선의 행적을 좇는 중이기도 했다.
김지원의 동생 역시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름이 아마 김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열화핵폭단을 복용한 칠음절맥 소녀.
구하지 못한 아이였다.
나는 그곳에서 실종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핵폭단 연구를 막긴 했지만 그 누구도 구하지 못했다.
절맥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환자.
핵폭단을 복용하고 단전이 녹아가는 자.
그들은 칼 좀 휘두른다고 구원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제 동생 좀 봐주시면, 안 돼요?"
"……봐달라는 게 어떤 뜻이지?"
"그때 교수님이 도와주신 이후로 병원을 몇 군데 돌아봤는데, 제 동생이 아직도 많이 아프대요. 겉으로 아파하지는 않는데, 속이 아프대요. 오래 못 살 거래요."
"……."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김소원은 이미 핵폭단을 복용했다.
"단전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대요. 근데 의사들은 교수님처럼 고수는 아니니까. 혹시 교수님은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교수님한테 왔어요."
고수라고 해서 의원들이 못하는 걸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핵폭단에 의해 시작된 단전의 분열은 누구도 멈출 수는 없다.
설령 현경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니.
멈출 수 있다고 해도 굳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핵폭단에 의한 내기 파도를 멈추면 다시 칠음절맥에 의해 더 아프게 죽어갈 뿐이니까.
임시방편이지만,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
"교수님. 제 동생 좀 살려주시면 안 돼요?"
나는 울먹이며 머리를 숙이는 내 학생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그냥 한낱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수백 가지를 알고 있었지만, 사람을 어떻게 살려야 하는지는 잘 몰랐다.
그나마 의사들보다 나은 건 내가 핵폭단에 대한 지식이 많은 편이라는 점이었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정말요?"
김지원이 반색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방법이다."
"괜찮아요! 뭐든지 해볼게요!"
"일단은 상태를 한 번 봐야겠다."
"네!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마침 동생이 학교에 오기로 했거든요."
"그래."
김지원은 울면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벌써 감사할 필요는 없다."
내가 감사받을 만큼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
김지원은 원래 김소원과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고 말했다.
벚꽃 구경할 겸 소풍으로 왔다고.
벚나무를 가득 심은 사천공대 캠퍼스는 주변의 데이트 명소이기도 했다.
김지원은 연락을 받고 김소원을 데리러 갔다.
김지원이 나간 연구실에는 잠깐 적막이 흘렀다.
그 고요함을 깨트린 것은 소걸이었다.
"김 형, 가능한 거요?"
"뭐가?"
"이미 핵폭단의 분열이 시작됐는데 그걸 멈출 수 있소? 그 소녀를 단기간에 현경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못 멈춘다."
"그럼?"
나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봤다.
열화핵폭단이라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확답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진원진기의 분해 속도가 느리다는 것. 그걸 어떻게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현경 사양으로 제작된 프로토타입의 핵폭단을 복용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일단은 봐야 알 것 같다."
똑똑.
15분 정도 지났을 때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도하나가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긴장한 표정의 언니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동생이 들어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래, 잘 지냈니?"
"넹! 아저씨는요?"
"여기 아저씨는 없지만 나는 그럭저럭 잘 지냈단다."
그동안 포메라니안 한 마리도 길들이고 집 나간 포메라니안도 찾아오고 박살 난 몸도 회복하고 이 나라 최고수의 초대장도 받고 내공 금제도 좀 풀었다.
고작 한 달 남짓 기간 안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꽤 다사다난했다.
별로 잘 지낸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여기 앉아봐라."
"넹!"
나는 김소원을 옆자리에 앉히고 맥을 짚었다.
현장에서 했을 때보다 더 천천히 시간과 공을 들여서 내부를 관조했다.
단전 끝 부분이 바스러진 상태였다. 내기의 흐름은 이류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격렬하고 빨랐다.
"아프진 않니?"
"네넹!"
다행히도 단전의 파손 정도가 예상보다 심하지는 않았다. 딱 생각했던 수준이었다. 이 정도 속도가 유지된다면 남은 시간은 7년 정도일까.
확인할 것은 다 확인했다.
"김지원, 얘기 좀 하지."
"……네."
"하나야?"
"네, 사형."
"소원이 데리고 먼지랑 좀 놀다가 와라."
"놀면서 소원이랑 간식 먹어도 돼요? 저 배고픈데."
너 이미 아까 카카오벽곡밸런스바 몇 개 먹었잖아. 그 정도면 이미 체내 영양소가 언밸런스해질 만큼 많이 먹었잖아.
"그걸 또 먹……."
타박하려고 말하면서 옆을 보는데 김소원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고 싶으면 먹어야지. 내 카드 써라. 좀 있다 점심 먹어야 하니까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
"네, 사형!"
"와! 언니 우리 뭐 먹어요?"
"난 다 좋아!"
"저두요!"
"그럼 우리 다 먹자!"
"좋아요!"
"얼른 가자!"
"와아!"
대화만 들으면 둘이 뷔페라도 갈 것 같은데.
정신 연령 수준이 비슷해 보이는 둘은 손을 잡고 산뜻한 발걸음으로 연구실을 나섰다.
끼이익.
"뭐냐?"
나가다 말고 김소원이 연구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저씨."
"왜."
"우리 언니 괴롭히지 마요."
"……노력해보마."
누가 보면 내가 악질 교수인 줄 알겠다.
어린애들이 나가고 연구실에는 어른 셋만 남았다.
도하나가 김지원보다 생물 나이는 많지만 사회 내공이 부족하니 어린애가 맞다. 사실 사회력(社會力)만 따지면 김소원보다 어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김소원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 김지원을 불렀다.
"김지원."
"네, 교수님."
"한 가지 질문하겠다."
"네. 뭐든요."
맞은편에 앉은 김지원의 표정에는 굳은 결의가 어렸다.
동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눈빛에 드러났다.
"얼마 있냐?"
"……네?"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학생한테 삥 뜯으려는 부패 교수 같다.
"집에 돈 좀 있냐고."
……뉘앙스가 별로 안 바뀐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