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 35. 검룡패(Medal of the dragon of sword)(2) >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걸어 바로 교직원 기숙사로 향했다. 도하나도 바로 뒤를 따라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블라인드를 치고 바닥에 대충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하나야, 호법 부탁한다."
"네, 사형."
밖에서는 멀쩡한 척했지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검룡패의 조각을 두 개 얻으며 해금 된 진원진기가 단전에서 날뛰고 있었다.
원래 내 것이 아니라 그렇다.
마땅한 '업'을 수행하여 해금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내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길들이는 과정이 필요했다.
하루에 두 개를 연속으로 얻어서 그런지 날뛰는 정도가 심상치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원래 내가 다스리고 있던 부분의 두 배에 해당하는 크기를 한꺼번에 해금한 것이니.
나는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단전은 진원진기와 그를 둘러싼 내기로 구성된다.
진원진기란 태어나면서 가지고 태어나는 생명력의 총체를 의미한다.
소우주(小宇宙)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진원진기를 한 곳에 뭉치면 비로소 외기(外氣, Outer ki)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장기가 형성된다. 이를 단전이라 한다.
단전을 통해 자연에 있는 기운을 몸 안에 담고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마침내 바깥으로부터 받아들여 단전을 중심으로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된 기를 내기(內氣, Inner ki)라고 부른다.
인간은 최초로 단전을 형성한 직후부터 내기를 더욱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개발된 호흡법과 기경팔맥의 주법, 그리고 세상을 보는 마음가짐을 통틀어 심법(心法, Mind arts)이라 칭한다.
진원진기로 단전을 형성한 후 심법을 통해 내기를 다스린다.
이것이 일반적인 무인이 운기하는 방법이다.
나는 그 흐름에 커다란 장애가 생긴 상태였다.
내 생명을 구성하는 진원진기의 대부분을 스승님으로부터 격체전력(隔體傳力, Infusing energy)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진원진기가 고갈되어 원래 죽었어야 할 나를 살리기 위해 스승님은 본인의 진원진기를 내게 전달했다.
그 결과 어떻게든 생(生)을 부지할 수는 있었지만, 스승님의 진원진기는 내 의지에 반응하지 않았다.
'업'과 '격'의 차이 때문이다.
현경위(玄境位, SS class)의 정점에 올라 수십 년간 협행을 해온 스승님과, 이제 막 화경이 되었던 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업과 격의 차이가 있었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운기의 요체가 되는 진원진기를 다스릴 수 없었으니 그에 따라 내기가 묶인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처음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단 한 줌의 내기도 사용할 수 없었으니.
실제로도 처음 1년은 실의에 빠져 화산에서 잡일이나 하며 살았다. 검을 들지 않았다. 사실은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스승님을 생각하면 계속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스승님이 왜 나 따위를 위해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스승님을 대신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의지는 있었으나 방법은 요원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업과 격으로 묶인 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화경의 육신을 가지고 있다 한들 내공이 전무한 상태로 뭔가를 할 수는 없었다.
어느날.
스승님이 무무문에 유품으로 남긴 검선패(劍仙牌) 조각을 만지는 순간 오랫동안 굳어있던 진원진기가 꿈틀거렸다.
깨달았다.
격이 모자란다면 그에 맞는 격에 오르면 된다.
업이 부족하면 그만한 업을 쌓으면 된다.
스승님이 은혜 입은 자들에게 나눠준 검선패의 일곱 조각. 무슨 일이든 필요하면 돕겠다는 약속의 증거.
그것을 되찾는 것은 나의 목적인 동시에 방법이었다.
스승님이 미처 지키지 못한 약속을 대업(代業)함으로써 현경의 업을 쌓을 수 있었다.
현경의 업을 쌓는 만큼 진원진기가 움직였다.
어쩌면 이조차 스승님의 안배였을지도 몰랐다.
스승님의 것이니 마땅히 검선패라고 불려야 할 물건을, 스승님은 검룡패라는 이름으로 다른 친우들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나의 대업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현경의 시선은 미래에까지 미치는 것일까.
내가 현경이 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을 일이었다.
꿈틀.
날뛰는 진원진기를 다스렸다. 온몸을 헤집으며 내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진원진기를 단전 안에 다시 가두었다.
길들였다.
진원진기를 통제하는 데 성공하자 자연히 묶여있던 내기도 따라 전신 혈도를 따라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느릿한 쾌감이 따라왔다.
무인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을 이 감각.
해금된 내기는 14년 분량이었다.
고작 14년 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게는 절실한 부분을 채워주는 가뭄의 단비로 느껴졌다.
당장 몇 개월 후 화경 간의 접전이 예정된 지금은 더욱 중요했다.
사천독괴는 취견자 같은 후기지수를 막 벗어난 수준의 화경이 아니었다.
당천갈은 칠대세가의 장로. 당문을 대표하는 무력 부대의 수장이다.
이미 농익을 대로 농익어 완성된 고수였다. 경험도 전력도 환경도 내가 밀렸다.
알량한 7년 내공 가지고 어떻게 요행으로 이길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내기를 해금한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초아에게 보상의 선지급을 요구한 것이기도 하고.
다만 고무림 측에서 패 조각을 찾아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오래 전부터 개방과 고무림에 의뢰를 맡겨놓은 상태였는데 그동안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제갈세가는 오래 전부터 패를 입수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초아가 없었다면 아직도 내게 검룡패의 발견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제갈세가 인간들은 그럴 놈들이었다. 가장 값비쌀 때를 기다렸다. 운영자 측이 그러는 건 신의칙 위반이 아닌가 싶은데.
나 역시 만약 당천갈을 상대하게 될 일이 없었다면 아무리 그래도 백지 계약서에 서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뭐, 됐다.
그래봐야 이제는 지나간 일이다.
나는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동공(動功)의 흐름을 재정비하는 데 집중했다.
나는 쌓을 수 있는 내기의 한계치가 21년에 불과하므로, 정공을 도외시하더라도 동공에 집중하여 회복 속도 자체를 극한까지 올리는 것이 나았다.
사용할 수 있는 내기가 세 배가 되었으니 기맥을 따라 움직이는 속도와 통행량을 다시 효율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임독양맥을 따라 몇 차례 소주천을 하며 운기 속도를 조정한 다음 대주천을 통해 기경팔맥 전체에 내기를 퍼트렸다.
점점 내기를 멀리까지 퍼트려 기 신경망의 아주 가느다란 한 줄기까지 전신에 내기가 스며들게 하였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모든 세맥, 모든 신경에 내기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제야 화경의 육신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윽고 전신을 끊임없이 순환하며 외기를 흡수하고 내기로 전환하는 동공 체계가 완성되었다.
기존에 비해 내기의 회복 속도가 5할가량 빨라졌다.
이 정도면 전투 도중 얇은 호신강기(護身罡氣)를 유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강기로 방어막을 형성하는 호신강기는 몹시 어려운 기교가 필요하지만 그만큼 화경 간의 싸움에서 상당한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수법이다.
본래 나는 검강과 경공을 동시에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내공이 몹시 쪼들렸다.
그러나 이번 내공의 해금을 통해 피부 위에 아주 얇은 호신강기를 덮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필요한 경우 자하강기로 전환한다면 웬만한 강기 공격을 한 두 번은 방어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때마다 내기가 뭉텅이로 빠져나가겠지만.
그래도 독강(毒罡) 같은 경우에는 일격을 허용하는 것이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 있기에 상대할 때 호신강기가 크게 유용했다.
손 볼 부분은 다 손 본 것 같았다.
만족스러웠다.
전반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금제를 해제하지 않고도 자하강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었다. 쌓인 내공이 15년을 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단기 결전에서는 내 위의 화경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나는 내기의 순환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제를 다시 억지로 비틀지 않는 한 이 흐름은 계속해서 유지될 것이다.
눈을 떴다.
깜깜했다.
아, 블라인드 쳐놨지.
블라인드를 걷었다.
여전히 깜깜했다.
"……하나야."
"네, 사형."
"지금 몇 시냐?"
"밤 11시네요."
"그럼 6시간이나 이렇게 있었던 건가?"
"아뇨."
도하나는 해맑게 웃었다.
"30시간을 그렇게 있었던 거죠."
"……."
뭐라고? 그럼 지금 토요일인가?
하루를 꼬박 저 상태로 있었다는 말인가. 주중이 아니라 수업을 안 빠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아무리 갈무리해야 하는 분량이 내가 본래 통제하고 있던 것보다 두 배 많았다고 해도 너무 오래 걸렸다.
"너는 그동안 계속 호법을 서고 있었고?"
"당연하죠."
"밥은?"
"사형."
"……왜."
"나 배고파요."
"……밥 먹으러 가자."
"네, 사형!"
안 그래도 먹을 걸 좋아하는 애한테 몹쓸 짓을 했군.
그래도 필요한 일이긴 했다.
서른 시간이 흐른 지도 모르고 운기를 했는데 호법이 없었으면 얼마나 위험했겠는가.
화경도 칼침 맞으면 죽는 건 똑같다.
***
나는 대충 모자만 쓰고 대학가로 나왔다.
사실 좀 씻고 싶긴 했는데 도하나를 더 굶게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나오는 길에 도하나가 먼지의 고기에 눈독 들이는 걸 보니 잘했다 싶었다.
"먹고 싶은 거 있냐?"
"전 맛있는 거요!"
그 맛있는 게 뭔데. 보편적 인간은 다 맛있는 걸 좋아한단다.
하지만 나는 서른 시간을 꼬박 서서 나를 지켜준 애한테 그렇게 말할 냉철함을 갖추지 못했다.
"피자 어때?"
"좋아요!"
"까르보나라는?"
"좋아요!"
"소갈비?"
"좋아요!"
이쯤 되면 괜히 싫어하는 게 뭔지 찾고 싶어지는 오기가 생길 정도였다.
됐다. 아무거나 좋으면 내가 먹고 싶은 거 먹는 거지.
나는 도하나와 대학가를 쭉 걷다가 훠궈 집을 발견했다.
[40년 전통 사천식 양고기 훠궈]
"훠궈 먹을까?"
"네, 사형!"
암왕이 사천당문의 본가를 쓰촨 성에서 사천특별시로 옮기면서 당연히 딸려있는 식구들도 많이 따라왔다.
그래서 사천특별시에는 본토식 사천 요리를 원전에 가깝게 가져온 식당들이 많았다.
시간이 흐르며 이주민들은 한국에 동화되었지만 차이나 타운을 중심으로 여전히 본토 문화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천당가 종중 직계가 한국말을 쓰는 마당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
아무튼 40년 전통이라는 거 보아 이 집도 그때 이주해서 문을 연 가게 같았다. 대학가에는 드물지 않은 편이다.
"점소이."
"예~ 몇 분이세요?"
"여기 훠궈 2인분."
"네~. 훠궈 둘!"
"무한 리필로 주시오."
"네, 자리에 앉아 있으시면 갖다 드릴게요~ 재료는 가져다 드시면 됩니다!"
도하나는 훠궈 집을 거덜 낼 기세로 60분간 맘껏 먹었다.
양을 한 마리는 먹은 거 같은데. 그냥 고깃집을 갈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