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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35화 (35/120)

< 35 : 34. 검룡패(Medal of the dragon of sword)(1) >

다음날 오전 일찍 검과 학생들은 펜션을 나섰다.

고개가 뻣뻣하게 정면만 향한 채였다. 우연으로라도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어째 어젯밤에도 조용하게 놀더라니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검과 박 교수도 멀리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버스에 올랐다. 나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멀어지는 관광버스 뒷모습을 보며 정이삭이 머리를 긁적였다.

"괜히 미안하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지들이 시비 걸다가 얻어터지고 찌그러진 거잖아."

"그런가? 듣고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네."

"과대 말이 맞다."

나는 늦은 아침 식사를 하는 우리 애들을 보며 말했다. 원지혜의 말이 과격하긴 했으나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대가를 치른 것을 동정하지 마라. 그것도 오만이다. 저들의 실수로부터 무공을 내키는 대로 휘두르면 안 된다는 것만 배우기를 바란다. 우물 안의 개구리[井中之蛙]가 되지 마라."

"예."

"교수님. 오늘 일정은 어떻게 돼요?"

"어떻게 되긴."

나는 학생들을 쭉 둘러봤다. 다들 안색이 피곤해 보였다. 하긴 이틀 내내 낮에는 구르고 밤에는 달렸으니 그럴 만했다.

"밥 먹고 쉬다가 관광지 좀 보고 돌아간다. 따로 훈련은 없다."

"와아! 역시 우리 교수님이야! 믿고 있었다구요! 충성충성!"

"혹시 수련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따로 해도 된다."

"아, 그건 괜찮습니다."

김지원이 정색하는 건 처음 봤다.

수련에 대해서는 어제 수중 비무 진득하게 시켰으니 만족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어젯밤에 산에서 비무를 시키고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밤낮으로 굴리는 건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힘들어할 것 같아서 자제했다.

낮에는 물에서 구르고 밤에는 산에서 구르면 사람이 거의 미친다. 경험담이다.

아침 느긋하게 먹고 학생들에게 짐 정리할 시간을 준 이후 관광버스를 타고 펜션을 떠났다.

그래도 경주에 온 만큼 바로 가기는 뭐해 불국사는 들렀다. 개인적으로 꼭 와보고 싶던 곳이었다.

"호오."

"과연 미려하군."

"평면 배치가 실로 치밀하오. 고대 국가의 진법 구성을 엿보는 재미가 있군."

"신라라고 했나? 본인이 도사임에도 과거 불가의 건축물에서 경이로움을 느낄 정도다."

"……현재는 별로라는 거요? 소림이라든지 웅장하잖소."

"별로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화산의 화려하고 신비로운 도관을 따라잡기에는 미학적으로 부족한 편이지."

"……."

"왜. 뭐. 무슨 불만이라도?"

나와 소걸은 절을 아주 만족스럽게 구경했으나 학생들은 다소 지루해하는 눈치였다.

"야야. 지혜야. 나 먼지랑 사진 좀 찍어줘."

"그래? 알았어."

찰칵.

"어때? 이쁘게 나왔어?"

"응, 이뻐."

"정말? 몇 장만 더 찍어줘. 저기서도 찍자!"

"……그래."

찰칵찰칵.

"어때? 괜찮아?"

"어, 이뻐. 완전 이뻐. 대박. 모델 같아."

"영혼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몇 장만 더 찍자. 저기 어때?"

"……그래? 정말? 그렇게까지?"

"응! 왜, 힘들어? 힘들면 하지 말구."

"……아냐, 가자."

찰칵찰칵찰칵.

그나마 항상 업로드와 어그로에 열심인 최수아 정도만 촬영한다고 표정이 다채로운 상황.

그건 그렇게 우리 과대는 맨날 까칠한 척하는데 은근히 마음이 약한 모양이다.

관광지인 만큼 입마개를 한 먼지가 그 뒤를 느긋하게 쫓아다녔다.

사람들이 무서워할 법도 했지만 먼지가 누워서 재롱 몇 번 피워주자 가까이 오는 꼬마들도 생겼다.

과연 현직 사천공대의 비공식 마스코트.

먼지는 항상 방실거리는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응대했다.

몇몇은 먼지를 알아보기도 했다.

"저 먼튜브 구독자예요! 언니!"

"어머, 정말?"

"왕왕!"

영물 포메라니안은 슈퍼스타의 꿈을 꾸는가.

한낱 개가 전직 타임지 선정 검룡인 나보다 유명한 현실에 절로 걱정이 들었다.

무림, 이대로 괜찮나?

"만져봐도 돼요?"

"물론이지!"

"와아! 엄청 부드럽다! 언니! 먼지는 낯선 사람 안 무서워해요? 다른 포메는 성격 나빠서 물기도 한다던데."

"물면 우리 조교 언니가 도와주실 거야."

"……."

깜짝 팬미팅까지 열어버린 최수아와 먼지를 제외하면 우리 과 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졸려 보였다. 제 눈에 흥미롭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니 이제야 피로가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하긴 스무 살 꼬마들이 어찌 문화재의 참맛을 알겠나.

아이들 중에 딱히 불교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미나 소림의 제자라도 있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불국사를 꼼꼼히 다 둘러본 후 기념품까지 샀다.

"애들은 영 재미없어하는 모양인데. 슬슬 갈까?"

"헌데 김 형. 듣자하니 석굴암이라는 것이 근처던데. 그것까지만 보고 가는 게 어떻소. 우리가 이곳까지 언제 또 오겠소. 지금이 아니면 보지 못할지도 모르오."

"그건 그렇군."

"또한 무인으로서 안목을 넓히는 것도 중요한 일. 학생들이 지루해한다 한들 이 기하학적 구조를 보며 진법학적으로 얻어가는 것이 있지 않겠소?"

"……그럴까? 그렇겠지? 우리가 또 교육자로서 학생들이 배움에 소홀히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내 말이 바로 그것이오. 김 형, 아니, 김 교수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참교육자요."

"허허, 뭘 이런 것 가지고. 다 소 조교의 보조 덕분 아니겠는가."

"하하하하!"

이후 마구마구 관람했다.

***

돌아가는 버스에서 학생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지쳐 잠이 들었다.

3일간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듯했다.

나는 잠든 학생들을 잠깐 보다가 당초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련회 무사히 끝내고 사천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우웅?.

곧 당초아의 답장이 왔다.

[별 탈 없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숙소는 마음에 드셨나요?]

생각해보면 별 탈이 없지는 않았다. 첫날밤 사소한 주먹 다툼이 있긴 했다.

뭐 이런 사소한 일까지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네. 숙소 앞바다도 좋았고 경주의 문화재들도 아주 즐겁게 보고 왔습니다.]

[그렇다니 준비한 보람이 있네요.]

신나서 날뛰는 괴이한 생명체의 이모티콘.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고민하던 사이 당초아는 다음 문자를 보내왔다.

[교수님. 그때 하신 제안 받아들일게요.]

동시에 고무림 블랙 어플에서도 알림창이 떴다.

[독접(甲)과 바스타드(乙) 간의 계약

]

[갑이 을에게 계약 내용의 변경을 제안합니다.]

나는 지문을 인식시켜 고무림 블랙에 접속했다.

[수락의 남은 유효 기간 02:58]

[변경 사항 : 보상 지급 시기를 '계약 종료시'에서 '오늘'로 변경]

[계약 내용의 변경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부]

망설임 없이 수락을 눌렀다.

[변경된 내용의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보상의 지급은 오늘 고무림 측의 공증 아래에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고무림 측이라고 말은 하지만 어차피 제갈세가 사람이 올 것이다.

나는 당초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도 그러길 바래요.]

드디어.

검룡패의 두 번째 조각을 얻었다.

***

사천시에 도착하자마자 학생들을 보내고 이사장실로 향했다.

소걸에게도 며칠 휴가를 주었다. 도하나만 호위를 겸하여 나를 따라왔다. 이미 호위가 필요없는 수준까지 몸을 회복하긴 했지만 명목이 그렇다는 거다.

똑똑.

"김산입니다."

"들어오세요."

기름칠 잘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이사장실 내부에는 이미 검은색 양복을 갖춰 입은 사내 몇이 있었다. 고무림 쪽에서 온 자들이었다.

나는 당초아가 앉아있는 소파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도하나가 조용히 내 뒤에 섰다.

"고무림 블랙입니다. 각자 기기에 계약 명의를 인증하여 주십시오."

고무림 직원 하나가 테이블 중앙에 인증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스마트폰, 당초아는 태블릿을 각자 갖다 대 명의를 인증했다.

[독접 님의 인증이 완료되었습니다.]

[바스타드 님이 인증이 완료되었습니다.]

"계약 내용의 변경에 따라 계약의 보상을 선지급합니다."

직원이 품 안에서 작은 만년한철 보관함을 꺼냈다. 하얀색 비단 장갑을 낀 직원이 보관함을 인증기에 접속하자 보관함이 열렸다.

"여기."

나는 말없이 안에 있는 물건을 집었다. 만년한철 금고 안에 보관된 물건 특유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마음에 흔들림이 있었으나 손이나 눈동자가 떨리지는 않았다. 그런 경지였다.

패 조각을 여러 각도에서 돌려봤다.

진짜였다. 찾고 있던 것이 맞았다.

"맞소."

내가 확인하자 고무림 블랙 직원들이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오늘도 고무림 블랙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직원들은 이사장실을 떠났다.

"교수님."

"네."

고개를 들자 당초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거 받았다고 저 버리시면 안 돼요."

"뭘 그런 걱정을."

나는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세상이 아름다웠다. 당초아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저 진짜 고민 많이 한 거란 말이에요."

"압니다."

나는 품에서 동그란 보관함을 꺼냈다. 오로지 이 패를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이윽고 당초아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저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입니다."

"……믿을게요.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시죠."

당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초아에게 인사하고 이사장실을 나왔다.

이사장실이 있는 본관을 나설 때.

"축하합니다. 김 대협."

"오랜만이군."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도하나가 바로 내 옆에 섰다.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아까 보았던 고무림 블랙의 직원이었다. 그냥 직원은 아니다.

제갈가의 인물.

가문의 후계자는 아니지만 경지가 화경에 닿은 중진 고수였다.

섭선과 경공으로 나름 이름 있는 제갈세가의 장로.

선풍사(扇風士) 제갈수.

고무림 블랙의 이사 중 한 명이었다.

아마 한국에서는 가장 지위가 높은 자가 아닐까.

"웬일로 직접 나섰소?"

"김 대협이 오래도록 찾던 물건인데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우리 회사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일 없게 제가 직접 온 거죠."

"문제 생기면 내가 깽판을 칠지도 모르니까 몸소 오셨다?"

"말하자면 그렇죠."

"역시 제갈세가다운 안목이군. 정확했소. 난리를 피워도 아주 크게 피웠을 거요."

"칭찬 감사합니다."

"용무는 그게 끝이오?"

"그럴 리가요."

제갈수는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튕겼다. 바람을 타고 느릿하게 날아왔다. 나는 한 손으로 받았다.

"뭐요?"

"저희도 하나 찾았습니다. 검룡패."

"진짠가?"

"제가 목숨이 두 개도 아니고 김 대협 앞에서 이런 걸로 농담하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보아하니 선지급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도 그렇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여튼 눈치 빠른 놈들이었다. 고무림 블랙을 장악하고 있으니 흐름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채는 것이다.

개인정보 보호법? 제갈세가 놈들은 그런 거 모른다. 내 생각에는 어플 인증에 필요한 지문도 모으고 있을 것이다.

"조건은?"

"서류 열어보시죠."

나는 손톱에 기를 둘러 서류 봉투 윗부분을 잘라내고 내용물을 꺼냈다.

[천급 낭인 고용 계약서]

그 아래에는 아무 내용도 없었다.

"백지 계약서가 보이는군."

"어렵습니까?"

"어떤 걸 시키려고?"

"저희가 김 대협을 필요로 하는 일이야 늘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화경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런 추적 임무겠죠."

어떤 건지 대충 감이 왔다.

고무림 계약을 위반한 화경을 찾아 계약 내용을 지키게 강제하는 임무. 사람이면 사람을 데려오고 물건이면 물건을 가져오는.

저들이 직접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내버려두기에는 고무림의 신뢰성이 위협받는 그런 문제에 나를 써먹으려는 것이다.

"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백지 계약서에 사인해서 제갈수에게 돌려줬다. 똑같이 손을 튕겨 서류를 날렸다.

"계약 성립이군요."

"물건은?"

"여깄습니다."

제갈수는 품에서 아까 것과 똑같이 생긴 만년한철 금고를 꺼냈다.

나는 패 조각을 집고 잘려진 단면을 보았다.

손가락 끝으로 한기와 함께 열기가 느껴졌다.

이 감각.

"맞습니까?"

"맞군."

하루아침에 검룡패 조각을 두 개나 얻었다.

학교와는 2년의 세월을 붙잡혔고, 백지 계약서에는 최대 목숨까지 저당 잡혔지만 말이다.

아주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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