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 32. 수련회(Membership training)(3) >
"저, 김 교수?"
"뭐요."
"그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어서 그런데, 애들 싸우는 걸 구경만 하고 있었던 거요? 그, 술을 마시면서?"
"그냥 술만 마신 게 아니고 회도 먹었소. 최 교수도 좀 들겠소?"
"……."
박 교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우리 애들한테 밀리고 있던 검과 학생들은 소강상태가 되자 부상자들을 옮겼다.
부상자라고 해봐야 주먹으로 치고받고 싸운 정도. 기껏해야 뼈나 한 두 군데 부러졌을 거고 그 이상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우리과 애들은 어느새 호흡을 고르고 도열한 상태였다. 몇 군데 얻어맞은 거 같긴 했지만 부상은 없는 듯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최 교수가 아니라 박 교수요.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교수라는 사람이 학생들 싸우고 있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으면 어떡하오?"
"애들이야 싸우면서 크는 거 아니오."
"무슨……. 그러다 학생들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떡하려고 했소. 김 교수가 책임질 거요?"
나는 아까 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죽이지만 마라. 책임은 내가 지마.
"이보시오. 최 교수."
"최 교수가 아니라……."
"됐고. 보시오. 여기가 누구 펜션이오."
"누구 펜션이냐니……. 그거야 이사장님 펜션 아니오?"
"……그렇지. 물론 그렇소. 이사장님 소유긴 하지."
나는 양손을 들고 펜션을 한 동씩 가리켰다.
"여기는 자율무공학과 건물 동이고. 저쪽이 검과가 쓰는 동 아니오. 그런데 검과 학생들이 여기 와서 난리를 피웠으니 누구 책임이겠소."
"……."
"첫 번째로는 남의 구역에 와서 시비를 건 검과 학생들의 책임이고 두 번째로는 관리 감독을 제대로 못 한 최 교수 책임 아니겠소?"
"아니, 그냥 김 교수가 학생들을 말렸으면 되는……."
박 교수가 맞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난 도리어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왜 사람이 맞는 말을 하고 그래?
"그럼 뭐 이기든가."
"……예?"
"학생들 안 다치게 잘 가르치지 그랬소. 우리 학생들은 다 멀쩡하지 않소."
"……."
"아무튼 난 모르는 일이오. 무인이 싸우다 보면 다칠 수도 있는 거지 참. 그렇게 걱정되면 얼른 데려가서 돌봐주기나 하시오."
박 교수는 미친놈 보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도하나와 먼지를 번갈아 본 후 검과 학생들을 챙겨서 얌전히 돌아갔다. 얼굴을 아주 빵점 맞은 시험지처럼 구긴 채였다. 검보다 역용술에 재능이 있어 보이는데.
검과 사람들이 돌아가자 우리 과 애들이 다가왔다.
"……교수님. 아까는 다 책임지신다고……."
"왜. 뭐. 벌써 다 책임졌잖아."
이신이 사소한 클레임을 걸었지만 무시했다.
책임을 무사히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 말도 근거는 있었으니 검과에서 나나 우리 애들에게 책임을 묻지는 못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남의 집에 와서 깽판 쳐놓고 맞고 나서 책임을 묻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무인의 세계에서는 안 통한다. 이기면 장땡이다.
사실 오늘 같은 경우는 서로 무기를 안 든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다. 술 먹고 다투다 보면 팔다리 한두 개 날아가는 것은 예사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애들이 서로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했다. 내일 아침 일정은 없으니 놀 사람은 더 놀고 쉴 사람은 푹 쉬도록. 뒤늦게 아픈 사람 있으면 찾아와라."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더 노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싸움 직후라서 그런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원래 있던 테이블로 돌아갔다.
회가 없었다.
"……소걸."
"왜 부르시오."
"왜 회가 없을까?"
"김 형. 회는 음식이오."
"……그래서?"
"음식은 다른 물건들과는 달리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오. 자연의 섭리가 그러하지. 생물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사라지는 것만을 섭식한다는 것은 참으로 오묘하지 않소?"
"멋진 말이에요!"
어디가 오묘하고 어디가 멋진데?
"소걸."
"듣고 있소."
"좋은 말로 할 때 회 다시 시켜라. 사라진 적 없는 것처럼 그대로 복구하도록. 너도 사라지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그 집 벌써 문 닫았소."
나는 말없이 소걸을 쳐다보았다.
담담하게 시선을 잠깐 마주한 소걸은 곧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 후개인데. 별건 아니고……."
***
자율무공학과 학생들이 펜션에 우르르 들어와 여기저기 앉았다. 남자 건물 거실에 모였다.
"에휴, 뻐근해."
"그래? 내가 안마라도 좀 해줄까?"
"뭐래. ……좀만 해줘 봐."
"응. 여기 앉아."
"야. 근데 니 아까…… 그 아직이란 건 뭔데."
"……어? 뭐, 뭐가."
"아까…… 아직이라며."
"내, 내가 그랬나? 기억이 안 나는데."
"……됐다. 치워라."
"……안마는?"
"됐어. 저리 가."
이신과 원지혜가 구석에서 티격태격하는 동안 다른 자율무공학과 학생들은 방금 교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수련. 제법이던데?"
"그, 그래? 헤헤. 열심히 했거든."
"그래 보이더라. 검에서 갈아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응응. 근데 삼재권법이 나랑 엄청 잘 맞는 거 같애. 특히 교수님이 교정해줄 때마다 뭔가 나한테 딱 맞는 독문무공을 익히는 느낌? 뭐라 그래야 하지? 마치 나 하나를 위해 만들어진 무공 같애."
"어, 그래? 나도 그런 거 느낀 적 있는데."
"그러고 보니 나도."
김지원과 최수아도 동의했다.
특히 김산 교수가 지도 대련을 하면서 동작을 미세하게 교정해줄 때, 몸에 꼭 들어맞는 느낌이 나곤 했다.
마치 개개인에 맞춰 초식을 새로 짜맞추는 것처럼.
그런 감각을 느끼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에이. 우연이겠지. 우리 교수님이 대단하신 분은 맞지만 무슨 삼재검신도 아니고. 그게 가능하면 대종사게?"
"대종사는 아니라도, 1급 삼재 대가이시긴 하잖아."
"그, 그런가? 1급 대가쯤 되면 원래 그게 되는 건가? 막 삼재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건가? 만나본 적이 없으니 몰랐어."
"하긴 나도 만나본 적이 없긴 해. 숫자 엄청 적잖아."
"아마 그렇지는 않을걸."
정이삭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일하게 삼재종합공 대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정이삭만이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자율무공학과 학생 중에서 입학 당시부터 삼재종합공 성취가 가장 높았고 현재도 독보적인 것이 정이삭이었다.
정이삭의 다섯 스승 중의 한 명이 삼재종합공의 2급 대가였는데, 1급에 가까울 정도로 삼재종합공에 대한 연구 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스승에게 오랫동안 배워온 삼재종합공을, 김산은 정이삭을 세 번 봤을 때부터 하나씩 교정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정이삭이 느끼기에도 바뀐 것이 신기할 정도로 부드럽고 편안한 자세였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우리 교수가 대단한 건 맞는 거 같아."
학생들 중 유독 김산에게 반항하는 원지혜마저도 그에 동의했다. 사실 겉으로는 틱틱거렸지만 내심으로는 김산을 인정한 지 오래였다.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이신, 정이삭, 원지혜, 당수련은 확실하게 김산의 대단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각자 기연이나 가문을 통해 쟁쟁한 고수들을 만나봤기에 가능한 적확한 평가였다.
일류를 가르치는 것과 절정을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무공이 운동의 영역을 넘어 기예의 영역에 다다르는 경지라 그렇다.
나아가 초절정인 이신에게마저 매 순간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대한민국 삼대세가인 덕수이가에서, 파조 이래 최고의 재능이라는 이신을 위해서도 김산만 한 스승을 구해주지 못했다.
가르치는 법을 아는 화경.
무공이 전 세계에 보급되고 공식적으로 알려진 화경이 400명이 넘는 이 시대에도 몹시 귀한 존재였다.
다른 일류 학생들은 그냥 대단한 교수쯤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경지에 이른 고수와 교습자를 볼 만큼 봐온 절정 이상의 네 명은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김산을 만난 것은 분명 기연이었다.
"스터디도…… 엄청 도움이 됐던 거 같애."
"그치. 나도 느껴지더라. 그게, 투로가 보이더라구."
비슷한 경지의 선배들을 상대하는데 가장 도움되었던 것은 그 점이었다.
대부분의 초식이 보였다. 읽었다. 읽을 수 있었다.
여태껏 자율무공학과 학생들이 삼재종합공을 익히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배움의 깊이는 달랐으나 모두가 삼재종합공을 어느 정도는 익히고 있었다.
그러나 초식 하나하나의 투로를 분석하여 외우기를 반복한 적은 없었다. 특히 주요 분야가 아닌 무공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모든 것을 완성도 높게 익히기엔 분량이 너무 방대했고 투자하는 것에 비해서 얻을 성과가 적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
공유하는 것만으로 익히는 속도가 몇 배가 되었다. 각자가 자세히 분석했기에 모든 초식이 정밀했다. 그러고도 부족한 부분은 김산 교수가 메꾸었다.
마치 삼재 재단 소속으로 삼재종합공만 연구하는 것과 같았다.
물론 실제로도 학생들이 최근에는 삼재종합공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맞긴 했다.
그리하여.
연구와 반복과 체화가 모두 부족한 검과 선배들의 삼재종합공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숨 쉬는 것부터 발걸음과 손짓, 투로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조리.
"그건 그렇고, 선배들. 우리 싫어하는 거 같았지."
"응……. 나는 입학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는걸."
"정말?"
"응. 그때는 교수님이랑 조교 언니가 도와주셨어."
"부럽다."
"응?"
"아, 아니야."
김지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세 명을 상대하는 것도 힘들어서 도움을 받았었는데……. 5년 넘게 익힌 검으로 말이야. 이번에는 전혀 어렵지 않았네."
당수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과거를 떠올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신비한 일이었다.
무의 공부는 쌓아올리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단기간에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래서 할아버지가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나 봐.'
당수련은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익힌 5년의 세월이 조금 아쉬웠지만 말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겠지?"
박위목이 울적하게 말했다.
자율무공학과 내의 서열이 가장 떨어지는 박위목은 이번에도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몇 명을 쓰러트리긴 했지만 동기들에 비하면 초라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이신의 대답을 끝으로 학생들은 잠시 각자 생각에 빠졌다.
후기지수로 살아가는 것.
학교에서 특별대우를 받는 것.
그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모두 지금까지 게으르게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더 열심히 수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뭔가 배운 게 있는 수련회였다.
"우리 내일 교수님한테 낮처럼 수련시켜달라고 할까?"
"그러자. 그래도 밤에는 놀게 풀어주시더만. 낮에 땀 흘리고 밤에 먹고 마시고 하니까 좋더라."
"나도 찬성."
학생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최수아는 그냥 먼지랑 놀고 싶었지만 굳이 넘어가 버린 여론에 토를 달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내가 교수한테 말할게. 우리 오늘처럼 수련하는 게 좋다고."
학생들의 의견을 모은 원지혜가 결의의 찬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과대야."
"과연 원주원가의 보석."
"아씨.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