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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31화 (31/120)

< 31 : 30. 수련회(Membership training)(1) >

"그건…… 좀 생각해볼게요."

당초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내 제안이 받아들여질 거라고 확신했다.

내가 먹고 튈 거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검룡패를 미리 달라는 제안 자체가 내가 계약에 충실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거였으니까.

까놓고 말해 내가 제대로 양아치 짓을 하려면 당천갈 쪽에 붙는 게 훨씬 나았다.

가진 전력이라곤 싸울 수나 있을지 의문인 교수들과 뒷골목 건달들이 전부인 당초아에 비해, 철두철미라는 확실한 무력 기반을 갖춘 당천갈이 꽝 붙는 싸움에서 유리한 건 자명한 사실이다.

굳이 고르라면 당천갈한테 붙어 당씨 후계자들을 싹쓸이하고, 당초아의 유품인 검룡패를 거두는 쪽이 훨씬 쉽다.

암왕 영감님도 그것으로 나를 추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감님은 나를 당수련의 생일에 초대한 게 전부니까.

당초아는 당천갈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없다. 당천갈 측이 영물을 양산하지 못하고 철두철미만 이끌고 와도 그렇다. 애초에 전력에 자신이 없었다면 당천갈은 그런 계획을 꾸미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당초아에겐 나를 믿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처음 계약을 할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때 당초아에게 필요했던 것은 경영 능력을 증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능한 교수였지만, 당천갈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난전에 능한 화경의 고수가 필요하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나면 당초아는 이 제안을 나의 호의로 받아들일 것이다.

물론 나는 계약을 위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빨을 들이미는 것은 양아치나 하는 짓이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다. 실패했을 때의 뒤끝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마음에 뒤끝이 남기 때문이다. 패배는 극복할 수 있지만 양심의 상처는 돌이킬 수 없다. 협을 외면하는 것은 항상 다음이 더 쉽다.

"그럼 천천히 생각하고 결정해 주십시오. 저로서는 결정이 빠를수록 좋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용무는 이게 전부인가요?"

"아, 김 교수님. 잠깐만요."

당초아는 책상 밑에서 서류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다음 주에 학생들이랑 MT 다녀오시죠."

"MT요?"

"네. 이번에 이런저런 일로 고생도 하셨잖아요. 쉬실 겸 다녀오세요. 다른 과들도 보통 이때쯤 가거든요."

MT가 뭔데? 마운틴이야? 학생들이랑 산을 가라고? 화산에는 MT 같은 거 없어.

나는 눈치를 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걸도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하긴 그럴 시즌이긴 하군요. 한국 대학에는 그런 문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가 그럴 시즌인데. 이맘때쯤 산이 특별히 좋은가? 한국에서는 봄산에 기가 막 풍부하고 그러나?

"……MT라. 좋죠."

나도 소걸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MT가 뭔지 감도 안 잡혔다.

"하지만 굳이 저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요?"

스무고개를 하는 느낌으로 질문했다.

"학생들끼리 가는 일도 있지만 아무래도 인솔자가 있는 편이 안전하니까요. 요즘 흉흉하기도 하고요."

하긴. 다른 학교의 견제에, 마선에, 이제는 당천갈까지. 올해 사천공대에는 유독 마가 낀 느낌이었다.

다른 학교의 견제 말고는 내가 긁어 부스럼을 일으킨 것 같기도 했지만, 내가 사천공대 교수이니까 어쩔 수 없다. 우리 가족이잖아. 그치?

듣다보니 MT란 산을 일컫는 약어인 거 같았다. 왜 한국인이 굳이 산이라는 짧고 어감도 좋은 단어 대신 MT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일정은 어느 정도로 잡는 게 좋을까요?"

"2박 3일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숙소랑 버스는 학교에서 잡아드릴게요. 재밌게 놀다가 오세요."

2박 3일을 등반할 정도면 상당한 험산이다. 그런 곳에서 재밌게 놀다 오라니. 화산에서 자란 나라면 몰라도 학생들이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의뢰인이 권유한 것이기도 했고, 한국 대학교의 문화라기도 하니까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나는 산 좋아한다.

"아, 찾았다."

당초아는 서류를 한 장 꺼내어 건넸다.

[사천공대 자율무공학과 수련회(M.T.) 계획서]

산이 아니었네.

"……수련회를 MT라고 합니까?"

"네? 네네. 멤버십 트레이닝. 교수님도 알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알았죠. 물론. 당연하죠. 멤버십 트레이닝. MT는 알았는데 수련회라는 명칭이 낯설어서 말입니다. 하하."

수련회였구나. 확인.

한국에는 이렇게 좋은 문화가 있구나.

나는 산을 좋아한다. 수련도 좋아한다. 산에서 하는 수련은 더 좋아한다.

***

그 다음 주 수요일.

나는 학생들과 관광버스를 타고 경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바로 뒤에서는 트럭 한 대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트럭에는 먼지가 실려있었다. 3일 동안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같기 가기로 했다.

숙소로는 사천공대 재단이 가지고 있는 펜션을 쓴다고 했다.

펜션은 바위에 붙은 조개마냥 따닥따닥 붙어 있었는데, 옆에 몇몇 건물은 타과 학생들이 쓸 수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인원이 20명도 되지 않았으니 별 상관없었다.

"수아야, 기대되지 않아? 바로 옆에 바다도 있대."

"말 걸지 마. 나 가서 제대로 즐기려면 지금 먼튜브 편집 다 끝내놔야 돼."

"아앜. 그래. 열심히 하구. 나도 잠깐 잠이나 자야겠다. 오늘 밤새야지."

"야, 이신. 과자 먹을래?"

"아, 나 몸에 안 좋은 거 안 먹잖아."

"……그럼 유기농 젤리 먹을래?"

"젤리 식감이 별로라서 안 좋아해."

"……됐어. 니랑 안 놀아."

"응?"

학생들이 기대에 가득 차 도란도란 떠드는 것들이 들려왔다.

저렇게까지 기대를 하면 나 역시 전심전력으로 부응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도 조교. 말한 건 다 준비해 왔겠지."

"네, 사형! 물론이죠!"

"학생들이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닐 것 같소만……."

소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거지 조교가 수련회에 대해 뭘 안다고.

나 김산. 자율무공학부의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련회를 선사해 줄 것이다.

어느덧 창밖으로 한옥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웬 커다란 무덤도 보였다.

경주였다.

***

숙소에 짐을 풀고 나는 학생들을 집합시켰다.

나는 목검을 등에 걸치고 학생들 앞으로 나섰다. 바닷가에 온 만큼 멋들어진 선글라스도 걸친 채였다.

"앞으로 2박 3일간 본 교수가 성심성의껏 여러분의 수련회를 잘 지도해 주겠다.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이 하기 나름이다. 여러분이 하기에 따라 본 교수는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는……."

수련(修鍊) . 회(會). 모여서 갈고 닦는다는 것 아닌가.

아쉽게도 이곳이 산은 아니었지만 괜찮았다. 바다를 앞에 낀 널찍한 평지여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아 보였다.

나는 한국 대학생들의 향상심에 감동해버렸다. 등교하고 하교하는 시간이 아까워 이렇게 날을 잡고 합숙하며 수련을 한다니. 기간이 3일밖에 안 되는 것이 좀 아쉽기는 했다. 이왕이면 방학 시즌에 3개월 정도 날을 잡고 했으면 좋겠는데.

한국 대학교의 수련회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은 몇 시간이 지나고 옆 건물에 타과 학생들이 온 이후였다.

해변에서 연속 비무를 치르고 있던 우리를 미친놈 보는 듯한 표정으로 보면서 지나간 타과 학생들이 곧 노래를 부르고 신나게 레크리에이션을 하는 것을 듣고서야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학생들은 이미 널부러져 숨을 헥헥거리고 있었다.

"왜 아무도 말 안 했나."

나는 학생들에게 시무룩하게 물었다.

2박 3일 일정 꽉꽉 짜놨는데. 아쉬웠다. 수중비무는 한 번 해보고 가면 안 되나. 이게 다 경험인데. 짠내나는 수중비무는 어디 가서 하기도 힘들다.

"저희도 선배도 없고 그러니까 잘 몰라서……."

"아닌 거 같긴 했는데……."

하긴 모두가 다 처음이었다.

과에 단 12명밖에 없는 특수과이기도 했고. 사람이라도 많았으면 누구 하나라도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알았을 것인데 말이다.

"뭐 시간도 늦었고, 준비한 것도 없고."

나는 옆 건물에서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저쪽도 저녁 먹고 벌써 술판인 모양이었다.

저쪽은 뭐 만들어 먹고 요리 경연 대회 비슷한 것도 한 모양이었는데 나는 고기만 잔뜩 사왔다. 몸 만들기에는 육식이 좋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펜션에 바비큐 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고기 구워 먹으면서 술이나 마시고 놀아라. 과음하고 사고 치지는 말고."

애들을 고개를 파닥파닥 끄덕였다. 무인이라는 것들이 수련보다 술과 고기를 좋아하면 쓰나. 하긴 약관이면 그럴 나이긴 했다.

애들 노는데 끼기는 그래서 나는 조교들과 술이나 한잔하기로 했다.

"급한 일 생기면 2층 올라와서 보고해라."

먼지에게도 고기를 한가득 챙겨준 이후 우리는 2층 거실로 향했다.

우리 애들이 술 취한 꼴은 아직 못 봤지만 평소엔 다들 성정이 괜찮았다. 술 좀 마셨다고 사고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

문제는 숙소에 우리 애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야~, 니들이 그렇게 잘났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채 두 시간도 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녁으로 구운 고기를 해치운 후 2차 술안주로 회를 먹으려는 참이었다. 개방의 정보력을 동원해서 근방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배달 횟집을 수소문해서 막 배달이 왔는데, 학생들끼리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맞잖아~. 선배 대우도 안 해주고~. 뭐, 어, 자율무공학과? 그렇게 잘났냐고. 어! 표정 봐라! 얘들아. 얘 표정 봐. 한 대 치겠다. 하긴 뭐 잘났으면 선배 때릴 수도 있지~."

툭. 툭.

타과 학생으로 보이는 놈이 이신의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받고 있었다.

보아하니 일류쯤인 거 같은데. 용기가 가상했다.

걔가 제대로 치면 너 죽을 수도 있어, 인마. 조심해.

바로 개입하지는 않고 유심히 지켜봤다. 말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당수련도 입학 전에 비슷한 일을 겪었다.

자율무공학과의 학생들은 학교에 다니는 내내 비슷한 취급을 당할 것이고 유사한 상황도 겪을 것이다. 학교로부터 특별 취급을 받는 만큼 질투하는 타과 학생들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기지수의 숙명이다.

우리 애들이 선배가 되면 후배들을 지켜주기도 해야 한다.

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피드백을 해주기로 했다. 웬만한 상황에는 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정 심각해지면 개입하겠지만 말이다.

이신은 나를 쳐다봤다. 내가 나온 것을 알아챈 듯했다. 하여튼 햇병아리 치고는 기감이 좋았다.

"어떻게 할까요?"

"마음대로 해라."

나는 조교 둘을 1층으로 불러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회와 밑반찬을 쫙 깔고 소주에 맥주를 섞었다.

한 입에 털었다. 쌉싸름한 맛이 혀를 찔렀다.

"죽이지만 마라."

"네."

"책임은 내가 지마. 하고 싶은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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