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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30화 (30/120)

< 30 : 29. 편지(Letter) >

지리산 먼지 납치 사건 이후 2주.

영물 실험 사건과 그 배후에 관한 조사는 소걸과 당초아에게 맡겨둔 상태였다.

처음엔 소걸이 내키지 않아 했으나 결국 개방과 H.A.O는 단기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잘 부탁합니다. 서민계급 지원기구 사천지부장 목화입니다."

"어쩔 수 없군. 알다시피 개방 후개요. 딱 독괴 문제를 파헤칠 때까지만 잘해봅시다."

그렇다고 사이가 막 좋지는 않았다.

"개방이 잘 따라와 주면 좋겠네요."

"따라간다……? 대개방이……?"

"그렇잖아요. 소 조교님. 먼지 찾는 것도 우리 기구가 다 했고."

"……대개방의 밑천을 빼가시나 마시오. 근본 정보단체가 어딘지 똑똑히 보여주지."

"그런 게 있나요? 거지분들인데 밑천이라니. 아무래도 사천에서는 힘을 못 쓰는 모양인데.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기부 좀 하고요."

부들부들.

소걸이 몸을 떨었다.

확실히 이번 일에서 개방이 힘을 못 쓴 것은 사실이었다. 거지가 시골에 적은 것을 어떡하겠느냐만.

상황이 커지면 사천특별시 전체에 피바람이 불 수도 있는 사안이었기에 마지못해 손을 잡은 모양이었다.

여튼 티격태격해도 힘을 합치는 게 어딘가.

당초아는 당문 내에도 어느 정도 끈이 있었으니 사실상 사천특별시의 모든 정보단체가 협력하는 셈이다.

업계 전문가들이 뭉친 이상 내가 따로 낄 구석이 없었다.

그동안 나는 몸조리와 수업에 집중했다.

뒤틀린 기혈은 이제 거의 다 가라앉혔다. 단전도 안정되었다. 상태가 아주 온전하지는 않았으나 7년분의 내공은 다시 확실하게 다스릴 수 있을 만큼 회복했다.

학생들과의 수업은 여전히 삼재종합공 위주였다.

스터디는 나름의 효과를 내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치르는 비무 대련에서 학생들의 실력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정이삭. 몸이 가벼워졌군. 좋다."

"감사합니다!"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무공은 물론 종합적인 이해도 상승이 눈에 보였다. 수법이 늘어나고 심리전도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실력이 가장 크게 는 것은 당수련이었다. 생각했던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공수로 펼치는 모든 박투에 재능이 있었다.

"당수련. 훌륭하다. 하던 대로 계속하도록."

"네!"

다만 새로 치러진 서열전에서 아직 서열이 바뀌지는 않았다.

다들 재능이 출중한 편이고 아직 배움이 얕은바 너나 할 것 없이 골고루 발전하는 중이라 그런 듯했다.

당수련이 실력이 크게 늘긴 했으나 바로 위 서열이 절정 초입의 창수인 원지혜이기에 당분간 뒤집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원지혜 역시 극도의 노력파이기도 했고.

"과대."

"네."

"더 열심히 하도록."

"아, 왜! 저한테만! 그래! 요……."

넌 쪼으면 더 잘하는 스타일 같아. 이게 다 널 생각하는 스승의 마음이란다.

자율무공학과로 전출 온 이정은 교수는 원래 삼재과 출신이라 그런지 삼재공에 대한 이해가 높은 편이었다. 애초에 2급 삼재 대가라는 타이틀에 혹해 데려온 것이었기도 하고.

"그럼 삼재심공의 정공과 동공 비율을 조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생사현관을 타통하기 전에는 웬만하면 정공 위주로 돌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아래 경지에서는 동공으로 어쭙잖게 회복하는 것보다 그냥 정공으로 내공 총량을 늘리는 게 나으니까요."

"좋소. 그럼 학생들에게는 정공 위주로 가르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는군."

"네. 저는 전과하기 전에도 학생들에게 정공 위주로 내공을 쌓으라고 했어요."

다만 삼재종합공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너무 정석적이기는 했는데 그 부분은 이야기를 나눠주면 조율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아마 이정은 교수가 이론 위주의 무학자라서 그런 것 같았다. 들어보니 실전 경험은 극히 드문 듯했다. 무공 수위는 절정 초입이었다. 이신을 생각하면 학생보다도 낮은 수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무학자면 이론만 잘 가르치면 되지. 실전과 비무 부분을 맡아줄 나와 조교 둘이 있었기에 충분히 메꿔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다만 동공을 아예 놓아서는 안 되오. 싸움 도중에 내공을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니. 몸에 배게 하는 것이 중요하오. 특히 절정 이상의 학생들은 동공 비율이 더 높아야 하오."

"음, 그 부분은 생각을 못 했네요. 역시 검룡님이세요!"

"크, 크흠. 뭘 이런 걸 가지고. 별것 아니오."

"아니에요! 저는 생각도 못 한 부분인걸요!"

그리고 인성과 안목이 아주 훌륭했다.

"아, 아무튼 이신 쪽은 내가 맡겠소. 아무래도 특이한 경우이니. 이 교수님은 다른 학생들을 잘 관리해주시오. 심공을 포함해 이론 강의를 6학점 정도 맡아주셔야 할 것 같소."

이정은 교수가 이론 강의를 나눠맡아 주는 것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상 업무 강도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왕왕!"

돌아온 먼지는 캠퍼스의 마스코트가 된 느낌이었다. 하긴 엄청나게 크기는 해도 가만히 보다 보면 모양새는 귀여웠다.

"오늘의…… 먼튜브……."

인터넷 망령인 최수아가 어느 날 각 잡고 털을 깎아준 이후에는 더 인기가 많아졌다. 곰돌이 컷이라나 뭐라나. 저 크기면 곰돌이가 아니고 그냥 곰컷 아니야?

"곰돌이컷……비포 애프터……."

최수아는 어느새 먼지를 이용해서 돈을 벌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만큼 먼지에게 먹을 걸 많이 갖다 줘서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먹방까지……. 오늘 영상은 2개다……!"

먼지는 몸집이 있는 만큼 음식을 산더미처럼 집어삼켰다. 최수아가 도와주면 고마운 일이었다.

꼴에 영물이라도 품질이 낮은 음식은 먹지도 않았다.

……아니잖아. 너 처음에 나타났을 때는 배고파서 아무거나 훔쳐먹었잖아. 이것저것 잘 먹었잖아. 이놈 봐라.

"왕왕!"

내가 지그시 노려보자 먼지가 멀리 있는 다른 학생들에게 도도도 달려가더니 애교를 부렸다.

야, 너 지금 살기 느끼고 도망간 거냐?

"아하핳. 얘 하는 거 좀 봐! 엄청 귀엽다!"

"얘 이름이 뭐예요?"

"먼지에요! 귀엽죠!"

수아야. 네가 먼지 주인이니?

딱히 입마개를 하지는 않았다. 위험하기로 치면 몸통 박치기만으로도 위험한 수준이기도 했고. 다만 교내에서는 빠르게 뛰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아뒀다.

영물답게 말귀를 잘 알아들을 것이라고 믿었다. 생존 욕구는 있을 테니. 살고 싶으면 잘해라.

"먼지!"

도하나가 부르자 자기를 한껏 귀여워해 주고 있는 여대생들을 내팽개치고 먼지는 다시 도도도 달려왔다.

도하나 앞까지 달려와 바로 고개를 박았다.

"왕왕!"

은인……으로 여기는 거 맞지? 무슨 조직의 보스 같은 걸로 보는 거 아니지?

어느 쪽이든지 먼지는 도하나를 아주 잘 따르고 있었다. 자신을 살려준 게 도하나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폭주하는 걸 도하나가 목숨 걸고 살려준 건데 그걸 모른 척하면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지. 내가 겪어본바 사람은 가끔 모른 척하고 살아간다.

먼지가 자는 곳은 교직원 숙소 근처였다. 당초아가 커다란 개집을 만들어줬다.

크기는 교직원 숙소 거실보다 컸는데, 그럼에도 그렇게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최다 방문객은 최수아였다. 무슨 인테리어를 하겠답시고 찾아오기도 했다. 쟤는 무섭지도 않나.

먼지가 인테리어에 찬성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수아가 사 들고 온 고기를 환영하는 것은 분명했다. 잘 먹더라.

"하나야."

"네, 사형!"

"나 잠시 이사장님 뵙고 오마."

"네넹!"

나는 먼지를 타고 캠퍼스를 순회하는 도하나를 잠깐 보다가 경공을 밟았다. 곧 소걸이 따라왔다.

본관. 이사장실.

"오랜만이오."

이사장실에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당초아를 뒤통수 친 당초아의 전 비서였다. 용케 살아있었군.

몰골이 정상은 아니었다. 온 몸이 너덜너덜했는데 당가를 배신한 것치고는 상태가 썩 괜찮았다.

아니지. 하긴 엄밀히 말하면 당가를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반대쪽도 당가였으니 단순히 당초아를 배신한 것뿐이다.

"심문 결과, 숙부, 아니, 독괴의 사주를 받은 것이 맞았어요. 찾아보니 곳곳에 독괴측 인사가 더 있더군요. 확인한 건 제 주변 인물뿐이지만 수련이나 다른 당 씨 주변에도 여기저기 사람을 뿌린 것 같아요."

"당천갈이 그렇게 영향력이 강한 자요? 후계 구도에서는 탈락이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철두철미를 맡고 있으니까요. 영향력이 크고 작은 것과는 별개로 무력 단체의 수장이다 보니 따르는 자들은 충성심이 높은 편이에요."

"영물을 길러서 무슨 이득을 보려고 했을 것 같소?"

소걸이 물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사실 고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야 어디든 있는 편이다. 그것을 위해 실험을 할 수도 있고 교육을 할 수도 있다.

비록 실험의 책임자로 불법 인체실험까지 해왔던 이석희를 고용하기는 했다만 이번 사건에서 인체실험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영물들을 길러 철두철미에 쓰겠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지리산 한구석에 비밀 실험을 한 것을 굳이 인정하고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올해 중순에 수련이의 생일이 있어요. 그때를 기점으로 가주님이 후계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인정한 모든 인물이 성인이 되는 거죠. 그래서 수련이의 생일에는 모든 후계자가 모이기로 했어요. 그날부터 진정한 경쟁이 시작되는 거죠."

"그때를 노려서 한 번에 엎으려고 했다? 후계 경쟁자를 다 제거하면 본인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으니까?"

"확실하진 않지만요. 이런 잡 끄나풀들이 자세한 정보를 알 리도 없고. 다만 연구원들을 심문해보니 독괴 측에서 요청한 연구 완료 기한이 그 며칠 전이더라고요. 그래서 탈출한 먼지를 무리하게 납치까지 해서 데려온 거고요."

"고려해볼 만한 여지는 있는 것 같소. 개방에서 알아본 결과에 의하면 철두철미 내부에서도 근래에 '진정한 충성'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하더군. 지리산 실험실을 폐쇄한 이후부터는 그런 요구가 더 강해진 모양이오. 김 형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잠깐 생각했다.

"어차피 몇 개월 남은 일. 거기다 솔직히 말해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정쟁에는 끼지 않는 것이 맞다고 본다."

암왕이 호구도 아니고.

암왕 정도 되는 인물이 이런 흐름을 못 알아챌 리가 없다. 현경 무인이 상황을 두고 보고 있다면 우리는 빠지는 것이 옳았다.

물론 당천갈이 무력 단체를 조직해 사천시를 피바다로 만들려고 했다거나,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려고 했다면 나도 개입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천갈이 후계자들만 깔끔하게 정리하고자 한다면 내가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그건 그냥 어디에든 있는 무인 간 싸움의 연장선이니까.

설령 그 자리에서 내 의뢰인이 목숨을 다하게 되더라도. 애초에 그런 걸 대비하는 계약은 아니었다.

나는 당초아와 눈을 마주쳤다.

당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웃음을 쳤다.

"그러실 수도 있죠. 다만, 그런 대답을 예상한 분도 있는 것 같군요."

그러면서 당초아는 편지 한 장을 건넸다. 몹시 얇은 편지였다.

"뭡니까?"

"읽어보세요."

편지에는 휘날리는 글씨로 단 몇 줄만 적혀 있었다.

[어이, 화산의 꼬마야. 오랜만이다. 한국에 있다고 들었다. 석 달 후에 내 손녀의 생일인데 그때 한 번 놀러 오려무나. ─ 白]

백(白).

그런 이름을 쓰는 인간 중에서 나를 화산의 꼬마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몇 없다. 그중에 몇 달 후에 자기 손녀 생일에 놀러 오라는 사람이라면.

암왕.

사천당가주.

당기백.

"……이 영감님이 왜 이러실까."

나한테 뭘 바라는데 그 사지로 오라는 것일까.

거절할 수는 없었다.

현경이 까라면 까는 게 무림의 법도인 법.

더군다나 이 영감님은 내 스승님의 오랜 친구였다. 그러니까 검룡패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고.

세 달.

승부를 보기에 나쁘지 않은 기간이었다.

"이사장님."

"예?"

"계약 조건을 바꿉시다. 검룡패를 미리 받는 걸로."

"……그러면요?"

"당수련의 생일. 그날 제가 당천갈을 막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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