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 27. 도하나(Hana)(3) >
이석희는 당황한 눈으로 도하나를 쳐다보았다.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지? 먼지는 또 무슨 말이고?'
이석희는 당시 시설의 실험체 몇몇을 데리고 탈출했다. 담당자를 잃은 중국 측의 실험체들이었다.
대개는 당시에 절정이었고 시간이 지난 지금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실험체도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규칙에 묶여 이석희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석희가 그들의 유일한 담당자였으니까.
'한국-1호는 뭐가 다르지?'
한국 측 닥터들은 모조리 죽었으니 도하나에게 담당자가 있을 리가 없는데.
어찌 담당자의 명으로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는가.
'아니, 애초에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여유가 없어지고 위기감이 드니 그제야 의문이 생겼다.
실험체들이 바깥에 있다.
도하나가 아무리 성공작일지라도 벌써 화경이 되지는 못했을 것인데 초절정을 포함한 그들 모두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아닌가? 정말 소년화경의 레플리카로서 완성된 것인가? ……소년화경?'
이석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소년화경이 밖에 있구나! 분명 거동조차 힘든 몸 상태라고 들었거늘.'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소년화경이 현재 초절정 여럿을 상대할 수 있는 정도의 몸 상태라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위험했다.
실험체들이 아깝긴 했지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석희는 여러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다양한 장소에서 동물 실험과 인체 실험을 반복해왔다.
이제 인공적으로 고수를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 거의 최적화되어가고 있었다.
이 자료들만 가지고 나갈 수 있다면 실험체 따윈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이석희는 자기가 가진 수단들을 생각해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히 바로 옆에 있는 초절정 포메라니안이었다.
'개-3호.'
이번 7차 실험의 가장 큰 성공작.
불과 생후 2년 8개월의 나이로 초절정에 도달했다.
생장 속도가 인간보다 훨씬 빠르다고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지능도 사람 말을 알아들을 정도였다.
키우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인간 실험 때보다 나은 결과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석희는 뇌기를 다스리는 무공을 익혔다.
경지는 일류 수준이었으나 가까운 곳에서는 전자 장치에 간단한 조작을 가할 수 있었다.
파직.
얇은 전기가 튀며 먼지가 갇혀 있던 케이지가 열렸다.
"끼잉……."
먼지가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석희에게는 고려할 가치가 없는 의사 표시였다.
'개-3호를 한국-1호에게 붙인다. 그때 뒷문으로 도망쳐야겠다.'
한국-1호를 처리할 수 있으면 좋고 시간만 끌어도 상관없었다.
이석희가 다시금 뇌기를 쏘아 실험 장치를 발동시켰다.
그곳에서 전달된 전기 신호는 다시금 먼지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로 전해졌다.
즈즈즈─.
증폭된 전기 자극이 먼지에게 고통을 줬다.
"저 여자를 죽여라."
"끄으응……."
먼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도하나가 이석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안 됐네."
이석희는 먼지가 도하나를 공격하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냥 죽어."
도하나는 도를 휘둘렀다.
캉─.
"먼지야?"
먼지가 앞발을 휘둘러 도하나의 도를 쳐냈다.
먼지의 눈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때보다 규칙이 더 정교해졌지."
이석희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짐승들이니만큼 좀 더 공을 들였지."
백두산 실험 당시 간단한 규칙들에 비해 지리산 실험에서는 규칙들이 복잡하고 세심하게 추가되어 있었다.
이석희를 보호하는 것 역시 그 규칙 중 하나였다. 백두산 실험의 끝을 본 이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규칙이었다.
실험체가 규칙을 어기려 할 때마다 신체에 강한 전기 자극을 가함으로써 규칙을 몸에 새겼다.
아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의 강한 전기 충격이 포메라니안 영물의 전신을 태웠다.
"으르르르……."
인간에 가까운 사고 능력이 짐승 수준으로 저하되자 개-3호는 몸에 밴 규칙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를 죽여라."
"크앙!"
이성을 잃은 먼지는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려 도하나를 덮쳤다.
캉─!
도하나는 도기를 가득 담아 올려치는 참격으로 받아쳤다.
"먼지?'
도하나는 잠깐 한 번 더 확인했다. 개에게 제대로 된 의식이 있는지.
먼지는 그저 눈앞에 있는 여자를 죽이려 하고 있을 뿐이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도하나에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이지를 잃은 짐승을 보며 도하나가 해맑게 웃었다.
결국은 실험체들끼리 싸우게 된 것뿐이다.
실험체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시합이 아직 남아있는 것뿐이다.
─살아남아라.
여전히 그때 담당자가 말했던 명령대로 도하나는 살아가고 있다.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을 죽이며.
그게 도하나가 살아가는 가장 익숙한 방식이었다.
이번에는 도하나가 먼저 움직였다.
콰앙!
실험과 영약에 의해 촘촘하게 짜인 육신이 정교한 보법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분명 먼지도 쾌선문 풍신보를 정면 돌파할 정도로 반응 속도가 빨랐지만.
이 순간은 사람이 짐승보다 빨랐다.
짐승이 벽에 부딪힐 만큼 빠르게 튕겨났으나 즉시 벽을 차고 다시 달려들었다.
대도와 짐승의 발톱이 순식간에 수십 합을 부딪쳤다.
쿠쿵.
쾅쾅콰앙─!
두 인견(人犬)이 연신 밟아대는 보법의 반동과 도와 발톱으로 뿜는 발경 경파가 연신 동굴을 흔들어대며 파괴하고 있었다.
이석희는 떨어지는 돌 부스러기들을 쳐내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구석으로 향했다. 실험용 컴퓨터가 있는 쪽이었다.
'젠장.'
자료를 저장 장치에 옮겼다. 워낙 자료가 방대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조작하느라 품이 드는 것은 덤이었다.
실험용 컴퓨터의 저장 장치를 물리적으로 뜯어서 옮기는 것도 불가능했다. 강제로 충격을 주는 순간 메모리가 타들어 가는 종류였다.
서로를 믿을 수 없는 과학자들이 모여 공동으로 연구하는 곳이기에 이래야 했다. 어딜 가든 자료가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전송 완료]
곧 작업이 끝나자 이석희는 저장 장치를 분리해 품에 넣었다.
이어서 이석희는 근처 벽에 달린 잠금장치를 열었다. 작은 금고였다.
일부러 디지털에서는 비워두고 아날로그로만 기록해둔 몇몇 자료와, 계좌가 막히는 상황에서 쓸만한 금붙이 등이 있었다. 이석희는 가죽 가방에 빠르게 쓸어담았다.
툭.
그때 뭔가가 손끝에 걸렸다.
금고 안에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던 물건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석희는 슬쩍 뒤쪽을 보았다.
소녀와 짐승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미친듯이 자리를 옮기며 격전을 치르고 있는 터라 일류 나부랭이인 이석희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아서라.'
괜히 공격하려고 들었다가 개-3호가 맞으면 본인만 손해였다.
한국-1호를 개-3호에게 맡겨두고 어서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옳았다.
맞출 자신도 없었다.
그 사이 도하나는 먼지의 무위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가끔 먼지의 발톱 끝에서 검화가 피어올랐다.
초절정이 맞았다.
그때마다 도하나는 도화(刀火)를 피워올려 대응했다.
누구나 김산처럼 척 보고 무력 수준을 세밀하게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건 사람을 죽이는 별자리를 타고난 자에게나 주어지는 재능이었다.
보통의 무인이 상대의 기도를 읽는다 함은 무공을 익히며 자연히 변화하는 부분을 구분하는 것에 불과했다.
도드라진 혈이나 굳은살, 자세, 근육, 눈빛, 기세, 무기 등을 보고 이놈 무공을 좀 익혔구나 하는 정도였다.
도하나는 백 합 가까이 겨루며 이제야 먼지의 수준을 완벽히 파악했다.
도하나의 아래였다.
그렇다면 제압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죽여야 한다면 죽이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될 때 죽일 이유가 없었다.
도하나는 먼지와 보낸 시간이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즐거웠다. 살릴 방도가 있으면 살리고 싶었다.
'목줄.'
주기적으로 전기 자극을 주어 먼지의 폭주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목줄을 끊어내면 될 것 같았다.
초절정을 상대하면서 목을 노리되 목을 베지는 말아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하나는 그런 일을 반복해오는 등을 보며 자랐다. 어른이 되는 법을 알려준 사형이 있었다.
"좀 아플 거야."
"크르르르."
여차하면 팔다리 정도는 날려버린다는 생각으로 도하나는 달려들었다. 살아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도하나의 대도 위로 에메랄드빛 찬란한 검화가 넘실거렸다.
화산파 홍설문 비전.
──옥녀신공(玉女神功, The jade glow).
비취참(翡翠斬, Jade slash).
스걱.
도하나의 도화는 맞받아치는 먼지의 발톱을 그대로 갈라버렸다.
"이 정도면 운 좋은 건 줄 알아."
먼지의 발톱을 가르는 순간 도하나는 도화를 꺼트린 대도로 먼지의 가슴 몇 군데를 찔렀다.
인간으로 치면 몸의 마비를 유도하는 혈 자리였다.
동물에게는 사혈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어쨌든 먼지가 경직되기는 했다.
도하나는 그대로 먼지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이석희는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었다. 뭐가 번쩍하는 것 같더니 개 영물의 앞발톱이 잘려나갔다.
자료를 옮기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아직 비상구로 나가지 못한 시점이었다.
개-3호가 벌써 제압되면 안 됐다. 목걸이를 풀면 아예 끝장이었다.
선택지가 없었다. 이석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기를 들었다.
탕!
"읏."
도하나는 먼지의 목줄을 끊고 뒤를 돌아봤다.
먼지는 낑낑거리더니 풀썩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발톱 잘린 앞발을 핥작거렸다.
도하나도 상처를 확인했다. 총알이 다리를 스치고 지나간 듯했다. 스쳤지만 살이 꽤 많이 패였다. 근육이 상당히 크게 찢긴 모양이었다.
이석희는 총을 들고 있었다. 손을 덜덜 떨면서.
"쏴봐."
도하나는 비웃으며 허세를 부렸다.
일류도 총을 들면 초절정을 죽일 수 있다. 그런 시대다. 하지만 그건 기습에서나 가능하다.
일류와 초절정쯤의 격차가 나면 총구 위치를 보고 반응할 수 있다.
문제는 도하나가 먼지를 제압하기 위해 너무 많은 기력을 썼다는 것이다.
먼지를 죽이려 들었다면 이렇게까지 힘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총알 따위 웬만큼은 쳐낼 수 있겠지만 한 발도 놓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한 발도 잘못 맞으면 죽는다.
'일단 머리와 심장만 보호한다.'
도하나는 거대한 도를 세우고 움츠렸다.
이석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확률은 낮았지만 총으로 죽이는 것 말고 살 방법이 없었다.
이석희는 조금이라도 충격을 강화하기 위해 도하나에게 접근했다.
초절정 고수의 보법을 생각하면 위험한 일이었지만 권총의 부족한 살상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첫발에 다리에 상처를 입혔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냉병기는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간 이석희는 도하나에게 총을 갈겼다.
"죽어어!"
타탕탕탕!
칭─!
화약 소리와 총알 튕겨내는 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대한민국에서 총은 불법인 걸로 아는데. 하긴 법 지키며 사는 놈은 아닌 것 같았다."
도하나와 이석희 사이.
"……소년화경."
김산이 서 있었다.
"하나야. 많이 다쳤느냐?"
"아뇨. 괜찮아요!"
타타타타탕!
채채챙!
김산은 태연하게 총알을 계속 쳐냈다. 이석희 쪽을 보지도 않은 채였다.
기 신경계를 통해 가속된 화경의 반응 속도와 공기 중에 넓게 퍼진 기감이 그걸 가능케 했다.
이석희의 자동권총은 탄창이 개조된 물건이었으나 탄약이 무한하지는 않았다. 열댓 발을 막자 이석희의 권총이 헛도는 소리를 냈다.
척─. 척─.
그제야 김산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이석희를 보았다.
"이게……. 이럴 리가……."
김산은 품에서 비수를 두 개 던졌다. 날붙이가 아니라 손잡이 쪽으로 이석희의 혈도를 때렸다. 아혈과 마혈이었다.
입을 닫고 몸을 마비시켰다.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석희는 밖에서 죽은 자들을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김산은 미치광이에게 듣고 싶은 것이 많았다.
김산은 제자리에 주저앉은 도하나를 안아 들었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집에 가자."
도하나는 해맑게 웃었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네,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