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 26. 도하나(Hana)(2) >
나는 검을 가볍게 내리그었다. 자하신검 레플리카였다.
촥─.
달려들던 짐승 하나가 공중에서 갈라졌다. 먼지보다는 좀 작았지만 역시 곰만 한 크기의 고라니였다.
이미 몇 마리 베어 넘긴 상태였으나 숫자가 영 줄지 않았다. 짐승들을 포함하면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물론 머릿수가 밀린다고 해서 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화경과 초절정의 관계는 이 정도 물량 격차로는 뒤집을 수 없다.
다만 내 기혈이 정상이 아닌지라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는 없었다.
당초아도 큰 역할을 했다.
독공은 다수에게 효과적이고, 재료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당초아처럼 좋은 재료를 쓴다면 무위가 다소 떨어지더라고 독공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
기본적인 독 내성은 인간보다 높은 편이지만 피독과 해독을 할 줄 모르는 짐승들을 상대로는 더 유용하다.
절정 수준의 독공에 최고급 독을 연계하면 초절정 고수에게도 어느 정도 통한다. 물론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길고 지루한 대치 상황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상대의 숫자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나는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시신경에 내공을 집중해도 시야가 끝까지 닿지 않았다. 통로에 굴곡이 있는 듯했다.
신경 쓰이는 것은 선봉대로 나선 도하나에게 소식이 없다는 점이었다.
소리의 공명 수준으로 보았을 때 동굴 전체가 그렇게 깊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동굴의 입구가 하나뿐이라면 도하나는 끝에 도달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곳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쪽으로 가봐야겠군."
"지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빠지면 분명 균형이 무너질 것이다.
내와 다른 초절정 둘이 전방에서 상대의 초절정들을 차단하고 있기에 당초아가 안정적으로 독을 뿌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빠지면 초절정 자체의 숫자가 밀리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결국은 비무(比武)는 일대일에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비슷한 경지의 다수와 다수가 겨룰 때는 숫자가 중요하다.
─남은 독은?
"양은 충분해요. 그렇지만……."
전음으로 묻자 당초아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당초아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용할 수 있는 독이 많다고 해서 초절정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 초절정의 숫자를 줄이면 된다.
대충 숫자만 맞춰줘도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짐승들은 대부분 독에 골골거리는 중이었다. 상태가 그나마 멀쩡했던 녀석들을 이미 칼에 맞아 절명한 지 오래였다. 무작정 달려들어서 그렇다. 조종할 수는 있는 모양이지만 섬세한 명령은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인간들만이 간단한 검진을 짜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초절정 여섯에 절정은 열이 넘었다.
하오문쪽 초절정 둘이 분전해준다고 해도 초절정 넷 이상은 내가 상대해야 했다.
강기는 검기에 무조건 우세하지만, 내 강기로 초절정 넷을 뚫기는 마냥 쉽지는 않았다.
초절정이라면 검기가 성강(成罡)을 이루기 전의 단계인 검화를 한시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경지다.
검화란 한 마디로 흐물흐물한 검강 같은 것이다.
검기가 검 너머로 길게 뻗어져 나오기는 하나 별빛처럼 안정적이고 단단하게 만들지는 못한 과도기 상태.
그 과도기를 기준으로 하여 절정과 화경 사이에 초절정이라는 애매한 경지가 있는 것이다.
초절정이란 표현이 얼마나 애매한가. 절정을 넘었다는 말 이외에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렇게 치면 이류도 초삼류고 현경은 초화경이다.
아무튼 제대로 된 검강에 비하면 조잡한 기공이지만 검화는 보통의 검기 이상의 무언가다.
검화가 모이면 검강의 화력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만약 내 내공이 여유로웠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초절정 나부랭이가 검화를 피어 올릴 수 있는 것은 잠깐.
그때 검강으로 검화를 받아내고 밑천 다 털린 하수들을 베어버리면 그만이다.
나는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나는 검강을 아주 잠깐씩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절정의 검화보다도 유지 시간이 짧았다.
물론 극도로 얇은 검강을 형성해 저들이 검화를 쓰는 것보다 내공을 적게 소모하지만 총량이 적은 것이 문제였다.
검강을 오래 유지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돌아가는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한 번에 하나씩.
거리 조절이 생명이다.
저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지 못하는 각을 만들었다.
운신하기엔 그럭저럭 넓은 동굴에서 그 절묘한 각을 만드는 것.
아주 약간의 위험을 감수한다면 내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저벅.
걸었다.
도달했다.
"뭣?"
서걱.
베었다.
나는 기공의 우위 대신 속도의 우위를 가져가기로 했다.
검에 내공을 두르는 대신 발과 다리를 위시하여 육신에 담았다.
부족한 자원을 보법(步法, Step)에 치중했다.
강철 같은 근육이 단단하게 조여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전신이 뜨거워지며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기경팔맥을 자극했다. 기 신경계를 따라 내기가 빠르게 순환했다.
강화된 화경의 육신은 총알을 보고 쳐낼 정도다.
초절정이 보고 대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걷듯이 도달했다. 그리고 동시에 베어냈다.
전조 동작 없이 발끝에 내공을 실어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고절한 상승 무공이다.
매화 향기가 바람에 떠돌듯 모든 걸음 사이에 자유로운 회전이 가미되어 있었다.
이동이 즉 공격이다.
화산파 독문무공.
암향표(暗香飄, Dim scent stream).
칼은 칼이다.
인간을 베기 위해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다.
호신강기도 쓰지 못하는 하수를 베는 데는 그냥 날붙이를 몸에 닿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스걱.
다시 하나를 베었다.
"무슨……?"
이래서 하수는 고수를 상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수는 고수를 상대로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해야 하지만.
고수는 자기가 가진 많은 것 중에서 유리한 것을 고를 수 있다.
만약 일대일이었다면 나는 순간 강기로 초절정을 상대했을 것이다.
시간이 여유로웠다면 검술의 우위를 기반으로 방어적인 태도로 팔다리부터 하나씩 깎아나갔을 것이다.
다대일에 시간이 급했기에 나는 단기 결전에 유리한 보법을 택했다.
물론 완벽한 방법은 아니었다.
내 부족한 내공으로는 보법에 기를 집중하면 검에 두를 것이 남지 않는다.
만약 간격과 타이밍이 한 번이라도 어긋나 상대가 반응하기만 했다면, 상대의 검기나 검화에 내 검과 육신이 찢겨나갔을 것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의 초식 교환을 통해 상대의 무공 수위를 철저히 파악한 것을 토대로 완벽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른 바 지피지기라는 것이다.
나는 여덟 발자국을 걸어 여덟 번을 돌았다. 여덟 번을 베었다.
이 자리에서 쓸 수 있는 최대한의 내공을 사용한 결과였다.
도하나 쪽에 화경이 없다고 가정한 배분이었다. 있다면 아마 오늘 죽을 것이다. 지금 몸 상태로 화경은 무리였다.
초절정 여섯과 절정 둘을 쓰러트렸다.
"먼저 간다. 정리하고 따라오도록."
저벅.
나는 마지막 아홉 번째 걸음으로 현장을 빠져나갔다.
***
'닥터를 공격하지 말 것.'
도하나는 그 규칙을 기억한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자를 기억한다.
이석희.
한국 측의 닥터였는데, 자기가 담당하는 아이를 잃고는 중국 측에 붙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도하나의 담당자를 죽인 자였다.
"규칙……."
그 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열여섯 살까지 도하나는 그 규칙에 얽매여 살아왔다.
어린 시절 각인된 그 규칙은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규칙이다. 기억하지? 자, 이리 와라. 실험을 계속하자."
도하나는 홀린 듯 천천히 걸어갔다.
규칙.
닥터를 공격하지 말 것.
"그래 그래. 옳…… 무슨 짓이냐?"
도하나는 한쪽 팔을 들었다. 도를 든 쪽이었다.
스걱.
툭.
"크아아아악!"
이석희의 팔을 베어냈다. 떨어진 왼쪽 팔이 바닥에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도하나는 규칙을 기억한다. 잊지 않는다. 그곳에서의 지옥 같은 시간을.
그러나 도하나는 그 규칙들을 극복해낸 지 오래다.
도하나가 그 시절을 잊지 않는 것은 그녀가 규칙에 구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규칙을 만든 자들을 여전히 증오하기 때문이다.
"찾고 있었어. 당신들을. 어디선가 또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도하나는 해맑게 웃었다. 이석희의 피가 얼굴에 튄 채로 웃는 것이 얼핏 섬뜩했다.
"그리고 담당자를 따르는 것이 제1규칙이잖아."
설령 규칙에 구속된다 하더라도 제1규칙이 제2규칙에 우선한다. 애초에 소년화경의 레플리카 제작을 의뢰한 자들은 닥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날 도하나가 김산에게 거둬진 이후.
홀로 명령 없이는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도하나는 김산을 새로운 담당자로 삼았다.
이제는 그럭저럭 알아서도 잘 살만하지만.
"사형이 말했어. 먼지를 제압하는 무언가를 처리하라고."
도하나는 여전히 김산의 말을 지침으로 삼았다.
"뭔, 무슨 먼지를 얘기하는 것이냐? 청소라도 하자는 거냐? 그게 나를 공격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
"넌 몰라도 돼."
그러니까 처리한다.
죽인다.
도하나 자신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김산에게 거둬진 이후 도하나는 방황했다.
담당자의 마지막 명령은 살아남으라는 것이었는데.
그건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동굴에서 살아남으란 건가? 계속 살라는 건가? 그렇다고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김산은 도하나에게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했다.
하고 싶은 일.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고아였을 때는 그냥 맛있는 걸 먹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도하나는 할 줄 아는 건 사람 죽이는 일뿐인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긴 했다.
시설을 만든 자들.
그때 놓친 자들.
나를 이렇게 만든 자들.
도하나는 그들이 죽기를 바랐다.
그렇게 말하자 김산은 매우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일단은 그거라도 목표로 살아라."
엇나가면 자기 손으로 목숨을 거두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스승이 아주 오래 전에 그랬던 것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럼 아저씨가 제 새로운 담당자예요?"
"담당자? 뭐 초절정 살인 기계를 아무 데나 풀어둘 수는 없으니 일단은 그러긴 할 건데. 근데 아저씨라니? 나 그런 사람 아니다. 아직 20대야."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음, 오빠? 너무 양심 없나? 그럼……."
김산은 호칭이 무슨 대단한 거라도 되는 듯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일단 사형이라고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