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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21화 (21/120)

< 21 : 20. 먼지(Dust)(3) >

개다.

거대한 개.

종은 포메라니안이었다. 동글동글하고 복슬복슬했다. 하얀 솜사탕을 보는 것 같았다.

솜사탕이 좀 컸다.

"아르르르."

개와 눈이 마주쳤다. 눈높이가 나와 비슷했다. 그…… 개라는 종이 그럴 수 있는 거였나? 뭔데 진짜로.

멀리서 보면 충분히 북극곰이라고 오해할 수 있겠다 싶었다. 아니, 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 웬만한 곰보다도 얘가 클 것 같았다.

털은 전반적으로 더러웠는데 입과 가슴 부분이 특히 지저분했다. 이것저것 음식물 찌꺼기 같은 것들이 묻어 있었고 피 냄새가 났다.

저게 사람 피라면 개는 오늘 죽을 것이다.

털 너머로 얼핏 보이는 근육의 형태는 단단하고 탄력 있어 보였다.

기세는 초절정 정도로 느껴졌다. 이신보다는 낫고 소걸보다는 못한 수준.

속단하기는 힘들었다.

영물이라는 존재는 본래 인간의 기준으로 재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심법을 익히지 않았으나 내기를 쌓고, 무공을 배운 적 없이 내공을 다룬다.

인간이 그런 일을 한다면 그를 대종사라 부를 것이지만, 짐승이 행하였기에 그저 영물이라 일컫는다.

한 마디로 영물은 대종사에 가까운 짐승이다.

대종사의 그릇은 겉보기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법이다.

아무리 그래도 포메라니안 영물이라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종의 한계치에 가까운 우수한 신체를 가진 개체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내기를 쌓을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며, 마침내 어떤 업(業, Karma)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영물이 될 수 있다.

야생 포메라니안의 수가 극히 적고 그 중 영물이 될 만큼 오래 산 포메라니안은 더더욱 드문 만큼, 이 녀석이 자연 발생한 영물일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아주 높은 확률로 인간이 개입했을 것이다.

인위적으로 고수를 만들려는 시도는 지난날부터 수없이 반복되어 온 일이다.

그 대상이 인간이었던 적도 있는데, 말 못 할 짐승에게 어떤 조작을 가한다는 것은 놀랄 거리도 아니었다.

나는 괜히 도하나의 눈치를 봤다.

"어떡할래? 하나, 네가 할래?"

"네, 사형!"

"할 수 있겠어? 귀엽다며."

"할 수 있죠! 죽일까요?"

도하나가 해맑게 대답했다.

영물이 자연산이든 양식이든 저대로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저 거대한 덩치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영양분이 필요할 것이다. 대도시 인근에서 사냥만으로 충족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지금만 해도 인간을 습격하는 상황이다.

비록 인간을 직접 먹으려 들지는 않았으나, 음식을 얻기 위해 인간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일단 죽이지는 말고 제압해."

"네, 사형!"

만약 저 녀석이 실험과 조작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면 배후 세력이 있을 거다.

그들은 자기네 실험체가 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접촉하려고 들겠지.

마선이 한국에 있는 것을 이미 확인한 만큼, 이렇게 수상쩍은 짓거리를 하는 놈들은 미리 파악해두는 것이 좋았다. 아예 한 통속이라면 반가운 일이고.

일단은 저 녀석을 통제하에 두는 것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스릉.

"아르르르……."

도하나가 도를 꺼내 들자 포메라니안은 한번 움찔하더니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인상을 한껏 찌푸리면서 몸을 낮춰 위협하는 자세를 취했는데, 품에 안을 수 있는 크기였으면 저마저 귀여웠겠다 싶었다.

대형 승합차만 한 녀석이 그러고 있으니 마냥 귀엽지는 않았다.

도하나는 빵긋 웃으며 달려들었다. 나는 도하나와 개가 서로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개를 귀엽다고 말했으면서 어느새 도하나의 눈빛은 무감정했다. 그녀 앞에 있는 짐승보다 오히려 짐승 같은 눈이었다.

마침내 두 초절정이 격돌하려는 순간.

휙─.

"왕왕!"

"웅?"

"헥헥헥헥─."

포메라니안이 도하나의 바로 앞에서 드러누웠다. 배를 덜렁 까고. 짧은 혀도 한껏 빼물고.

도하나는 도를 하늘로 치켜든 자세로 멈췄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깜빡깜빡했다. 거대한 도 위로 짙은 도기를 횃불처럼 피워올린 채였다.

"저, 저것이 무슨 조화인가."

"마물이…… 마물이……."

뒤에서 무과 교수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상황이 이해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영물은 영물이군."

분명한 건 하나였다.

저 포메라니안은 강호를 살아가는 중요한 덕목을 갖췄다.

눈썰미[眼目, Sharp eye].

***

"……김 형, 저건 뭐요?"

"뭐. 아, 저거? 나도 잘 모르겠다."

소걸이 커피를 건네며 턱짓했다.

콜드브루 맞네.

나는 한 모금 마시고는 소걸이 가리키는 쪽을 슬쩍 보았다.

거대한 포메라니안의 등에 도하나가 올라타 있었다.

"사형, 이것 보세요!"

짐승이 살기를 인간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영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으르렁거리며 한 번 센 척이나 해보고 안 통하면 배 까고 드러누울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아무리 고수의 살기를 잘 느꼈다 해도, 저렇게 개같이, 개처럼 굴복할 수도 있는 건가? 개니까 당연한 건가?

"먼지야! 춤춰!"

"왕왕!"

이제는 도하나를 태운 채 덩실거리고 있는 포메라니안을 보며 나는 상식을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사람도 개도 다 이상해.

사람 말을 잘 알아듣고 저렇게 간사하기까지 하다니 보통 영물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먼지라니. 벌써 이름도 지어준 건가?

"하나야."

"네, 사형!"

"개 이름이 먼지냐?"

"네!"

"……왜?"

"몸에 먼지가 많이 묻어 있어서요!"

"오……."

도하나의 대답을 듣고 소걸이 탄식하며 질린 표정으로 도하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하나야……, 아무리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말귀를 잘 알아듣는 동물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너무한 거 아닐까?

그 와중에도 먼지는 좋다고 방실거리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야, 너 사람 말 다 알아듣잖아. 이걸 듣고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춤을 춰? 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니?

나는 도하나와 먼지가 재롱부리는 모습을 잠깐 보다가 당초아에게 연락했다.

[일단 영물은 잡았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교수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푹 쉬세요!]

남은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이제 집 가면 되나? 이거 개는 어쩌면 좋을까. 강자에게 약한 타입인 거 같으니 소걸이나 도하나 곁에 두는 게 맞는데.

나는 개를 옆에 두고 자고 싶진 않았다.

근데 애초에 저 덩치가 숙소에 들어가긴 하려나.

그때 웬 고함이 들렸다.

"나는 인정 못 한다!"

가드레일 너머로 날아갔던 교수 하나가 씩씩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박 모였나? 김? 이? 최? 넷 중 하나는 확실하다. 내가 잘 기억한다.

"그, 이 교수?"

"박문식이다!"

아깝다. 4분의 1이었는데.

"그래서 박 교수. 뭔 소리요? 인정? 무슨 인정?"

뭔지는 몰라도 딱히 당신 인정이 필요하지는 않은데. 별로 안 궁금했지만 나한테 한 말 같아서 대꾸는 해줬다.

박 교수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였는데 인중 아래로 코피 자국이 있어 화를 내도 그저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이런 영물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곳에 돌아다닐 리가 없다! 더군다나 나를 단숨에 날려버릴 정도의 영물이 저런 소녀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애초에 영물의 주인이 아니고서야!"

"아하."

뭐라는 거야. 아하, 라고 했지만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애당초 나를 공격해 수치심을 주려는 수작이었던 것 아니냐!"

니가 누군데.

나는 박 교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껏해야 초절정 초입쯤이나 될까.

약관의 아이가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뛰는 것은 봐줄 수 있는 일이지만, 나이 지긋이 먹은 어른이 아이와 똑같이 굴면 안 된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다.

학교라는 우물에서는 초절정이 꽤 대단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경지가 낮은 교수들은 칭송해줬겠지.

하지만 넓은 강호에서는 결코 드물지 않은 경지다. 때로는 지나가던 개도 초절정일 수 있다. 그런 세상이다.

까놓고 말해 다른 학교의 견제 대상도 못 된 인간 아닌가.

뭐 이것저것 따질 필요도 없다.

"그래서."

"어, 어?"

"뭐 어쩌자는 거요?"

"어어……."

"최 교수 말이 맞다 칩시다."

나는 박 교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럼 뭐가 바뀌나?"

박 교수는 나와 도하나, 먼지, 소걸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결국은 개 한 마리 못 당해낸 인간이다. 설령 박 교수의 말이 맞다한들 그 개 한 마리가 있는 지금 따져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그리고 어린 소녀라."

보아하니 이 양반은 먼지한테 맞고 날아가 있느라 도하나의 움직임과 도기를 제대로 못 본 모양이다.

다른 교수들은 괜히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분위기를 잘 못 읽는 편인가 보다. 보통 우물의 일인자가 그런 경향이 있다.

"하나야."

"네, 사형!"

자기 몸뚱이만 한 먼지의 귀를 갖고 놀던 도하나는 내가 부르자 부드럽게 뛰어내렸다.

"이 양반 한 수만 상대해줘라."

"죽여요?"

"그만 죽이고……. 삼재보 풍운유신으로 피하고 왼쪽 옆구리에 주먹 한 대 넣어줘라. 안 죽을 정도로."

박 교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보고 이 소녀와 비무라도 하란 말이오?"

"각설하고. 빨리하시오."

"……김 교수 미쳤소? 아무리 몸이 성치 않다고 하나 어찌 내가 소녀와 손속을 겨루겠소."

"쫄았소?"

박 교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개만도 못한 안목을 가지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날 지경이군. 얼른 하시오. 기억하시고. 풍운유신. 왼쪽 옆구리요."

"이……."

박 교수는 눈동자를 이글거리더니 표정을 침착하게 가다듬었다.

"후회하지 마시오. 소녀가 다치면 김 교수가 책임을 져야 할 거요."

"걱정하지 마시오.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저, 박 교수님. 그냥 하지 마시죠."

"됐소. 놓으시오. 이제는 어쩔 수 없소. 내 자존심이 달린 일이오."

"그게 아니라……."

"어허. 놓으라니까."

젊은 여교수가 박 교수를 잠깐 말렸지만 박 교수가 완강한 태도를 보이자 포기한 듯 물러났다.

저 교수가 당신의 그 자존심을 위해서 말린 것인데.

"사천무공대학 검과교수 박문식이오. 내 연장자로서 소저에게 세 초식을 양보하겠소."

뭔.

"네! 갈게요!"

빡!

박 교수가 날아갔다. 아까 먼지에게 맞았을 때와 반대쪽으로.

그, 나는 쾌선문 풍신보를 풍운유신으로 피하는 그림을 그린 건데. 이게 아닌데. 뭔 깡으로 삼 초를 양보하는데?

나는 아직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고 날아가는 박 교수를 보았다.

어쩌겠어. 제 팔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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