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 19. 먼지(Dust)(2) >
30분 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당초아의 문자를 받았다.
[김 교수님, 잠깐 뵐 수 있을까요?]
개강 전 공원에서의 회식을 마지막으로 만난 적이 없는 이사장이었다.
요구르트 유니폼 입고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은 멀리서 몇 번 보긴 했다. 그건 여전하더라.
그나저나 이렇게 갑작스러운 연락이라. 뭔 일 생겼나?
만나보면 알 일이다. 딱히 이후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나는 간결하게 답장했다.
[네. 괜찮습니다.]
[바로 교수님 연구실로 뵐까요?]
[그러시죠.]
나는 연구실로 가서 바로 커피를 내렸다.
"하나야, 이사장님 오신단다. 자리 좀 정리해라. 소걸은 다과나 좀 꺼내주고."
"넹."
"알겠소."
도하나가 잽싸게 소파와 테이블을 정리했다. 금세 깔끔해졌다.
그래도 우리 하나가 뭔가를 없애는 거는 잘해. 무인이 그거면 됐지…….
소걸은 그 사이 과자 몇 종류를 접시에 예쁘게 담아왔다.
참 이것저것 다 잘하는군. 이런 훌륭한 조교가 3개월 후에 떠난다니 연구실을 책임지는 교수로서 아주 아쉬운 심정이다.
똑똑.
"넹~"
"당초아입니다."
"이사장 언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당초아가 도착했다. 도하나가 얼른 문을 열어줬다.
"반가워요, 도 조교님."
"저두요!"
"오랜만입니다."
"그렇네요. 그간 꽤 바빴거든요."
당초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도하나가 저 눈웃음에 홀린 거 같은데.
하나야, 이쁜 언니가 먹을 거 준다고 막 따라다니고 그러면 안 된다. 쓴맛 나면 바로 뱉어야 해. 알지? 사형은 믿는다?
"처음 뵙겠습니다. 개방의 소걸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당가의 당초아예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뭐, 커피로 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소걸과 당초아가 영광이니 기회니 훈훈한 통성명을 하는 사이, 나는 내려둔 커피를 인원수에 맞게 테이블로 옮겼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정신 좀 봐. 우선 이것부터 보시죠."
커피를 몇 번 홀짝인 당초아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뭔데요?"
"넘기면서 보시죠."
나는 조교 둘을 양옆에 끼고 태블릿을 한 장씩 넘겼다.
고무림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지역 경찰의 협력조서. 마지막엔 CCTV가 있었다.
흰 털을 가진 거대한 짐승이 찍힌 사진 몇 장이었다. 움직임이 상당히 빠른지 모습이 흐릿했다. 전봇대와 같이 찍힌 사진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웬만한 승합차 크기로 보였다.
"……북극곰이요?"
"확실하진 않아요. 경찰 쪽은 지리산 쪽에서 먹이를 찾아 흘러들어온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어쩌면 흰 털을 가진 반달곰 영물일 수도 있죠."
"일단 크기만 보면 곰에 가까운 것 같기는 한데. 생김새가 영……."
"생김새가?"
"곰이라기엔 너무 복슬복슬하지 않나……."
물론 흐릿한 사진이라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는 소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개방은 뭐 들은 거 없나?"
"아직 특별히 들은 것은 없소만."
"경찰도 오늘 신고를 받고 수사에 착수했다고 하더라고요. CCTV 사진도 건진 지 얼마 안 된 거고요."
"그렇군요. 근데 왜 이걸 저한테……?"
"아무래도 고무림 글이 진짜일 수도 있으니……. 만약 진짜 교내에 절정 수준의 영물이 침입한 거라면 학생들이 위험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교내의 최고 실력자이신 김 교수님이 나서주신다면 학생들이 좀 안심하지 않을까요?"
"제가요? 굳이요?"
제가 지금 최고 실력자가 아닌 몸 상태라. 옆에 있는 조교들 상대하기도 쉽지가 않거든요.
"계약 기억하시죠? 우리 학교 수위시잖아요!"
생각해보니 그런 계약이 있긴 했다.
근데 그거 이면계약 아니었어? 그냥 명목만 그런 느낌이었잖아. 그러고도 다른 학교 간 교수가 알고 칼침 놓으러도 왔었잖아.
"부탁해요! 교수님! 곰이 다른 곳에서 발견될 때까지만이라도요!"
"예, 뭐. 해야죠. 계약 내용인데."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화경 무인도 계약에 묶여 산다. 그게 21세기다.
당초아는 내 수락을 듣자마자 눈웃음을 치더니, 에코 백에서 모자와 완장, 명찰을 3개씩 꺼내 들었다. 도하나와 소걸 것까지 있었다.
이 양반, 거절은 생각도 안 했구만.
"제가 이것도 준비해왔어요."
"준비……를 잘하시는 편인가 봐요.'
"제가 꼼꼼하다는 소리 많이 들어요."
"그래요……."
못생긴 국방색 모자와 완장을 가지고 와서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우리 애들은 진작 하교한 상태겠지? 저런 걸 착용한 모습을 보여주면 교수로서의 위엄이 떨어질 거 같은데. 제발 마주치지 마라.
***
"……교수님, 거기서 뭐 하세요?"
"……뭐, 왜."
***
대충 학생들이 다 빠져나갔을 무렵 해가 저물었다.
평소엔 동아리다, 과제다, 하여 늦게까지 남아있는 학생들도 많지만, 오늘은 방송을 통해 일찍 하교하라고 공지를 해둔 상태였다.
원래는 해가 저물면 순찰을 하기로 했는데, 지금은 소걸이 우리 과 애들을 바래다주러 간 터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당초아의 비서 중 하나가 본관 중앙관리실에서 CCTV를 보는 중이었고, 특이사항이 있으면 무전을 해주기로 했다. 아직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하릴없이 괜히 냉수나 들이켜는 중이었다.
소걸아 언제 오니. 커피는 사오고 있지?
문득 대형 승용차 몇 대가 눈앞을 쌩 지나갔다.
"그 자 아니요?"
"맞는 거 같소만."
"하, 교수라는 작자가……."
"하하, 어쩌겠소. 학위도 없이 실무자로 들어왔으니 허드렛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어떤 차 안에서 대화 나누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자율무공학과가 아닌 다른 무과 교수들인 듯했다.
"죽일까요?"
"됐다. 그냥 둬라."
하나야. 왜 또 죽이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그래. 때릴까요? 밟을까요? 이런 좋은 말도 있잖아. 그럼 나도 마지못해 허락했을 수도 있는데.
사실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사천공대의 간판 교수들은 다른 학교에서 견제한다고 다 데려간 지 오래였다.
남아있는 무과 교수들은 자율무공학과를 가르칠 능력도 안되는, 견제할 가치도 없는 잔챙이들이라는 뜻이다.
나는 내가 잘 모르는 부분에는 내 적의 판단을 존중하는 편이다. 그들이 저들을 잔챙이라고 판단했으면 보통은 그게 맞다.
경솔한 뒷담이나 하는 모양새가 설득력을 더했다. 저치들은 내가 들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화경이라는 경지를 그려본 적도 없는 자들.
그런 잔챙이들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 물론 밟을 기회가 생긴다면 굳이 마다하지는 않겠다만.
치직─.
─김 교수님.
"듣고 있소."
─그것이 나타났습니다.
"어디요."
─정문 바깥 사천으로 가는 대로입니다.
나는 정문 쪽을 바라봤다.
방금 교수들이 지나간 방향이었다.
아직 소걸이 오지 않았는데.
물론 아무리 그래도 무과 교수라는 양반들이 한낱 미물한테 두드려 맞지는 않겠으니 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안 갈 이유도 없었다.
북극곰을 놓치면 곤란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일도 모자 쓰고 야근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지. 절정쯤 되는 영물을 아무 데나 떠돌게 하는 것도 영 불안한 일이고.
저기서 더 나가면 학교 앞 대학가였다. 거기서 더 가면 사천시.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물론 거기까지 가면 곧 당가에게 제압되겠으나.
나는 소걸에게 문자를 남겼다.
[정문 앞, 대로.]
"가자."
"네, 사형."
나와 도하나는 경공을 밟아 정문을 지났다.
***
쾅!
"이런 미친!"
거대한 영물이 앞발로 쳐내 자동차를 통째로 찢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있던 음식을 찾아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운전자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상태였다.
"박 교수, 괜찮소?"
"헉. 괜찮겠소? 죽을 뻔했구만."
뭔가 거대한 것이 길목을 막고 있기에 세웠더니, 예의 그 짐승인 듯했다.
"북극……."
곰은 누가 봐도 아니었다.
단추 같은 눈과 코. 하트 모양으로 앙증맞게 벌어진 입. 핑크색 혀. 삼각형 귀. 복실복실한 흰 털.
"왈!"
음식을 금세 다 먹은 짐승이 고개를 들고 가볍게 짖었다. 그리고 새로운 음식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개였다.
"이……, 한낱 미물 따위가……!"
뽑은 지 얼마 안 된 대형 외제 세단이 박살 나버린 박 교수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권기를 한껏 뽑아냈다. 남아있는 할부가 10개월이 넘는데!
주 무기인 소검이 차 안에 있기는 하나 알게 무엇인가.
박교수의 경지는 초절정 초입. 사천공대에 남은 교수 중에서는 수위를 다투는 수준이다.
한낱 절정 수준의 개 영물 따위를 상대하는데 무기에 구애받지 않았다. 아니, 개 따위가 절정이기는 할까.
"아르르르."
살기를 감지한 개도 박 교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오냐, 내 오늘 허드렛일을 한 번 해주마."
박 교수가 경공을 밟으며 빠르게 달려들었다. 내기의 반동이 도로 표면을 터트릴 정도였다.
극한의 쾌속.
박 교수가 몇 년 전에 고무림 블랙을 통해 입수하여 배우기 시작한 쾌선문 비전 풍신보였다.
'한낱 개 영물 따위는 반응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속도…….'
땅을 한 번 밟아 단숨에 공중을 가로지르는 쾌속.
몸으로 바람을 가르는 감각.
그리고 풍신보를 제대로 익혔다는 성취감 속에서.
'눈이…….'
박 교수는 개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느꼈다.
"왕!"
"끅!"
퍽!
개는 박 교수를 머리로 들이박았다. 박 교수는 도로 갓길을 넘어 날아갔다.
"……박 교수?"
남아 있는 교수들 얼굴의 핏기가 가셨다.
아무리 쪼잔하고 성격이 더러워도 박 교수의 무위는 인정하는 바였다. 이 자리에 있는 교수 중 박 교수를 이길 수 있다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박 교수가 한 수. 손도 못 쓸 정도. 다른 교수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저 영물, 아니, 마물은 분명히 반응했다.
"모이시오! 합공합시다!"
"그, 그냥 도망치는 게 낫지 않겠소?"
"박 교수님은 어떡하고요!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르잖아요!"
"뭘 어떡합니까. 안목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지! 똑같이 당해주자는 겁니까? 저 개의 움직임을 제대로 본 사람은 있습니까?"
"그건……."
"박 교수가 한 수였소. 저 개는 최소 초절정이라는 거지. 내 그냥 도망가자는 게 아니요. 그, 돌아가면 화산검룡, 아니 김산 교수님도 있지 않소. 도움을 요청해 같이 합공을 하자는 거요."
몇몇 교수들은 최소한 지금 얘기하는 최 교수는 돌아올 리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냥 입을 다물었다.
교수들이 무언의 합의를 하고 음식을 뒤지는 개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나는 와중.
하늘에서 그림자 두 개가 떨어졌다.
툭.
착지에 큰 소음도 없었다.
"뭐야, 포메네?"
"사형, 엄청나게 귀여워요!"
"귀엽……나? 아무리 그래도 저 크긴데."
"전 귀여운데요?"
하늘에서 나타난 화산의 사형제는 교수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시답잖은 사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 존재가 신경도 쓰이지 않는 것처럼.
"다, 당신들은 누구요?"
"아. 뭐야?"
김산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확인한 교수들이 움찔했다.
"진짜 교수 양반들이었군. 미물에게 쩔쩔매길래 설마 했는데. 왜 모르는 척을 하나? 다들 나 알잖아."
김산은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를 툭툭 건드렸다. 도하나도 동작을 따라 했다.
"이 학교 수위다."
"수위다!"